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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7주기, 참사는 왜 일어났고 왜 해결되지 않고 있는가

이 글은 4월 9일 유튜브 채널 노동자연대TV에서 진행한 온라인 토론회의 발제문을 다듬은 것이다. 영상 보기(링크)로 이동하면 김승주 기자의 발제와 시청자 토론을 볼 수 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당시 모든 사람들을 일순간 멈춰 세운 사건이었다. 그중 누군가에게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완전히 바꿔 버린 사건이었다.

최근 4·7 재보선에서 참패한 박영선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는 20대를 향해 ‘오세훈을 지지하는 걸 보니 역사적 경험치가 없다’고 재단했다. 그러나 지금의 20대는 세월호 참사 당시 단원고 2학년이던 희생 학생들과 또래로 커다란 충격을 받았는데, 그중 다수가 박근혜 탄핵 촛불 운동을 지지했다. 이번 재보선에서 청년층이 민주당을 혹독하게 심판한 것은 촛불 운동을 잊어서가 아니라, 문재인 정부에게 개혁 염원을 배신당했기 때문이다.

304명을 품고 침몰하는 세월호 사람들은 말로 다 못할 슬픔과 충격을 느꼈을 뿐 아니라 참사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이윤, 부패, 친제국주의

7년 전 세월호 참사는 단지 배 한 척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뒤집어진 우선순위로 돌아가고 있음을 드러냈다.

세월호는 청해진해운 소속의 배였다. 그 회사는 당시 인천과 제주 사이 항로를 독점하고 있었다.(사건 한 달 뒤 이 항로의 운항면허가 취소된 데 이어 폐업하게 됐다. 하지만 관련 기업이 70개에 이른다.)

세월호는 여객선보다 화물선에 가까웠다. 침몰 당시에 세월호에는 승객 470여 명과 2400톤 이상의 화물이 실려 있었다. 엄청난 과적(적재정량을 초과해 화물을 실음)이었다. 안전 기준에 따르면, 이 2400톤의 절반은 실어서는 안 되었다.

청해진해운에는 세월호와 쌍둥이배라고 불린 오하마나호도 있었다. 세월호에 실린 화물 2400톤 중 700톤은, 4월 15일 오하마나호 선장이 더 실으면 가라앉는다고 항의하면서 항구에 두고 간 화물이었다. 결국 세월호는 자리도 없는데 급하게 화물을 더 실었다. 화물이 움직이지 않게 단단히 고정하는 장치들도 제대로 된 게 거의 없었다.

또, 세월호는 이미 일본에서 18년간 운항된 낡은 배였다. 청해진해운은 세월호를 중고로 싸게 사와서 마구 불법 개조했다. 화물을 더 싣기 위해서였다. 이 과정에서 세월호는 구조적으로 왼쪽이 더 무거워졌다. 세월호는 참사 발생 몇 달 전에도 바람이나 파도로 항해를 중단해야 할 만큼 왼쪽으로 기운 적이 있었다. 선원들은 세월호를 두고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배”라고 불렀다.

침몰 전날인 4월 15일은 안개가 잔뜩 끼고 날씨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세월호를 제외한 다른 배들은 출항을 포기했다. 하지만 청해진해운은 세월호 출항을 강행했다. 이 점도 세월호에 실린 화물과 그리고 정부 정책과 연관이 있다. 바로 제주해군기지행 철근 문제다.

세월호는 인천에서 제주로 가는 제주해군기지 건설 자재 운송의 많은 부분을 감당하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 후 공사에 차질이 빚어질 정도였다. 청해진해운이 세월호를 급하게 사와서 개조한 까닭도 다른 선박회사들보다 먼저 뛰어들어 물동량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이명박 정부는 선령(선박의 나이) 제한을 20년에서 30년으로 늘려 줘 선박회사들을 지원해 줬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정부 정책과 이윤에 눈먼 기업들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일은 뻔했다. 온갖 유착과 부패가 일어났다. 청해진해운은 2013년 한 해 동안 직원 안전 교육에는 겨우 54만 원을 쓴 반면, 선박 중간검사나 정기검사 때는 뇌물로 200~300만 원씩 썼다.

예컨대 인천항만청의 한 간부는 3500만 원과 양주 3병에 세월호 허가를 맞바꾼 혐의로 기소됐다. 1심에서는 징역 5년과 벌금 7000만 원이 선고됐다. 다른 간부들도 돈과 접대를 뇌물로 받았다는 증거가 많았다. 증거 조작 시도도 발견됐다. 그런데도 2016년 초 대법원은 1심 선고를 완전히 뒤집어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저 청해진해운에 속았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터무니없는 판결이었다.

제주해군기지는 한국 정부의 대표적인 친제국주의 정책의 하나다.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군사력을 투사하기 위해 추진하는 미사일방어체계(MD) 계획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제주해군기지는 김대중 정부 때 논의되고 노무현 정부 때 결정되고 이명박 정부 때 공사가 시작됐다. 제주해군기지 건설 사업은 제주도민을 비롯해 평화 운동, 환경 운동 진영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를 비롯한 여러 이유로 2014년 4월 당시 제주해군기지 공사는 지연되고 있었다. 정부는 시공업체에 300억 원 이상의 손해를 물어 주고 있었다. 이것이 청해진해운이 세월호 출항을 강행한 이유였다.

세월호가 기울기 시작한 최초 발단은 조타기, 쉽게 말해 핸들 고장이었다. 정상적인 배는 아무리 급하게 방향을 최대로 꺾어도 10도 이상 기울면 안 된다. 세월호는 비정상적인 배의 구조와 화물의 이동으로 금세 20도 넘게 기울었다. 그때 가장 먼저 쏟아져 내린 것이 제주해군기지행 철근이었다. 그 무게는 400톤 이상으로, 승객 5000명에 해당하는 무게였다.

요컨대 제주해군기지행 철근의 선적은 침몰의 가장 주된 원인으로, 선박 허가나 구조 문제뿐 아니라 침몰의 원인 자체에 국가가 책임 있음을 보여 준다.

구조 실패와 국가의 총체적 책임 회피

배의 침몰만큼이나 많은 의구심과 충격을 일으킨 것은 바로 국가의 구조 무능 또는 실패였다. “가만있어라”는 선내 방송은 이 문제의 상징이다. 학생들은 선내에 전기가 꺼지고 공기압이 터져 물기둥이 솟아오르는 순간 직전까지 “가만있어라”는 방송 지시를 들었다.

배 안에 있던 학생들의 영상이나 문자 메시지 등을 종합하면, 선내 방송을 듣고 피해자들은 배가 기울어 침몰하는 상황에서 대거 이동하면 침몰이 더 심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압도적 무게의 화물이 쏠려 배가 침몰 중인 상황에서는 한시 바삐 탈출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문제는 구조에 책임 있는 자들, 선박 안전 사고 시 대처 방법을 잘 알아야 하는 자들도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다. 선원들조차 배가 기울자마자 탈출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만있으라는 방송을 거듭하면서 해경을 기다리기로 했다. 목포해경도 선원에게 가만있으라는 방송 지시로 기다리라고 했다.

그렇게 기다렸지만 정작 출동한 해경 배는 123정이라고 하는 고작 100톤짜리 한 척이었다. 123정에는 의경 몇 명을 포함해 10명도 안 되는 인원이 타고 있었다. 소형 헬기도 몇 대 왔지만 서해의 더 큰 배, 더 좋은 설비의 헬기들은 중국 어선 단속에 주로 사용되고 있었다.

세월호는 100분 만에 완전 침몰했는데, 123정이 도착했을 때는 그 100분 중 45분이 지난 상황이었다. 더구나 세월호는 123정이 도착한 시점 즈음부터 더 빠른 속도로 기울기 시작했다.

123정은 도착해서 정확히 30분 동안 아무것도 안 했다. 30분 후 처음 한 일은 연락이 닿는 선원들한테 가서 그들을 꺼내준 일이었다. 그리고는 9분 만에 100미터 밖으로 후퇴했다. “90도 이상 기울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보고하면서 말이다.

그때 단 한 명이라도 학생들에게 나오라고 외쳐 줬다면 어땠을까? 가슴이 미어지는 ‘만약’을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선원이나 경찰 개인의 이기심, 직업의식 결핍 등만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문제는 자본주의 국가의 성격이라는 시스템 차원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정부의 우선순위는 대중의 안전에 있지 않았다. 2012년 이명박 정부는 “해양 사고가 연간 계속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며 구조·구난의 많은 부분을 신자유주의적으로 민간에 맡겼다. 뒤이어 박근혜 정부도 집권 첫해에만 600개 넘는 규제를 없앴다. 결국 예산 부족 때문에 인명 구조, 수난 구호 명령, 선박 좌초·전복 대처를 담당하던 지방 해양경찰청 수색구조계가 없어졌다.

참사 때 출동한 123정 대원들은 선박 침몰 시 구명볼을 던져 주는 훈련만 해 왔다. 단적으로 말해, 일단 사람이 물에 빠져 둥둥 떠 있는 상황에만 대비했다. 이런 123정이 침몰하는 배와 수백 명의 피해자들을 멀뚱멀뚱 보는 사이에 윗선의 명령과 지시는 전혀 구체적이거나 적절하지 않았다.

해경 본청과 서해청은 “중앙과 광역까지 나서서 상황 지휘를 하면 통신망에 혼선이 생긴다”며 일선으로 책임을 미뤘다. 목포서는 선장이 판단하게끔 하라거나, 123정장이 스스로 판단을 내리라고 했다. 청와대는 빨리 상황을 파악해 보고하라는 지시에만 열을 올렸다. 배는 빠르게 기울고 있는데, 지시받지 않은 행동을 했다가 어떤 덤터기를 쓸지 모르는 상황에서, 너도 나도 책임을 미루기만 한 것이다.

한마디로, 세월호 참사 구조 방기는 국가 기구들의 총체적인 책임 회피 방식과 메커니즘이 작동한 결과였던 것이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들이 쓴 책 《외면하고 회피했다 - 세월호 책임 주체들》(2017)은 이 과정을 이렇게 요약했다. “관료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각종 운영 규칙을 지키는 것을 동아줄 삼아 결과적으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다. 이는 세월호 참사 당시의 충격과 혼돈 속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관성처럼, 그리고 수많은 대형 참사를 겪는 과정에서 줄곧 유지되어 온 방식이었다.”

나중에 청문회에서 목포서장은 이렇게 말했다. “현장지휘관과 상황실에서 잘 알아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세월호 7시간 문제도 마찬가지다. 박근혜는 침몰에 대해 첫 보고를 받은 지 무려 7시간 만에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등장했다. 그 긴 시간 동안 박근혜는 머리를 올리고 최순실 등과 비밀 회의를 했다. 이에 대해 박근혜는 탄핵 확정 위기에 처해 있던 2017년 1월 1일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바쁜 사람이에요. 거기 119도 있고 다 있지 않겠습니까? 거기에서 제일 잘 알아서 하겠죠, 해경이.”

고위급일수록 현장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고위급일수록 책임이 없다는 말인가? 이토록 무책임한 국가 지도자의 모습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은 “국가란 무엇인가? 왜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이런 질문과 그 속에 담긴 분노는 참사 이후 정부가 벌인 일을 보면서 더욱 커졌다. 박근혜 정부는 유가족을 모욕하고 발 빠르게 항의 운동을 탄압하고 책임자 규명과 처벌을 가로막았다. 세월호 참사를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우기 위한 수작이었다.

박근혜의 운동 감시와 탄압은 참사 당일의 무책임·무관심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줬다. 자본주의 국가의 전반적이고 일상적인 우선순위 자체가 대중의 생명과 안전이 아니라, 국가 관료 자신을 포함한 지배계급과 그들 중심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문재인 4년과 세월호 약속 배신

세월호 참사로 대표되는 박근혜 정부의 숱한 악행들은 결국 박근혜 퇴진 촛불 운동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광화문 중심부의 세월호 광장을 수백만의 촛불 행렬이 휘감았다. 결국 박근혜 정부는 중도하차해야 했다. 박근혜는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나 구속됐고, 세월호 선체가 드디어 인양돼 뭍으로 올라왔다.

이후 문재인 정부가 “촛불 정부”를 내세우며 들어섰다.(촛불 운동에서 별로 한 일도 없으면서 그렇게 자임했다.) 집권 초 문재인 대통령은 “안전 때문에 눈물 짓는 국민이 하나도 없게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세월호 참사 이후 7년 중 4년이 문재인 정부 하에서 지나갔다.

지금의 현실은 어떤가? 문재인 정부의 번지르르한 세월호 약속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여전히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피해자들은 눈물 짓고 있다. 지난해 말 그들은 찬 겨울에 청와대 앞 농성을 하고, 집단 삭발을 하고, 단식을 하다가 병원에 실려갔다.

올해 1월 집단 삭발로 정부와 검찰에 항의한 유가족들 눈물을 머금고 있는 ‘호성 엄마’ 정부자 씨 ⓒ이미진

세월호 문제 해결이 멈춰 있다는 사실은, 2014년 박근혜 정부하에서 이뤄진 검찰의 수사 결과와 그에 따른 법원 판결이 멈춰 있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2014년 참사 직후 검·경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와 검찰 특별수사팀은 침몰 원인, 구조 방기, 해운 비리에 관한 수사를 흐지부지 종결시킨 바 있다. 지독하게 부실하고 부당한 수사였다.

그런데 2014년 검찰 수사의 지휘 라인 인사의 상당수가 문재인 집권 후에도 출세 가도를 달렸다. 이들은 앞서 노무현 정부 하에서, 특히 문재인이 당시 민정수석일 때 주요 직책을 맡으며 그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현 서울중앙지검장 이성윤이다. 그는 2014년 검·경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세월호 적폐 수사 전체를 이끌었다. 이성윤은 추미애 사단의 대표주자로, 문재인 정부가 주구장창 외친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검찰 개혁”의 기수로 나서 왔다.

한편, 한국선급 해운비리 수사팀장 배성범은 조국 수사,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수사 등이 있었던 2019년 말까지 서울지검장을 지냈다.

문재인 청와대와 추미애 법무부의 “검찰 개혁” 인사 칼바람이 불고 난 뒤인 올해 1월, 검찰 특별수사단은 세월호 참사 재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 결과는 유가족이 처벌하라고 요구한 책임자 78명(황교안, 우병우 등 청와대 책임자와 해경 지휘부 등) 대부분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린 것이었다. 불구속 기소된 해경 지휘부 10명조차 2월 법원에서 전원 무죄 및 집행유예를 받았다.

결국 문재인 정부의 이런 행태로, 세월호 구조 방기 혐의로 처벌된 사람은 아직도 123정장 단 한 명뿐이다.

계속되는 참사와 코로나19

문재인 정부 하에서도 재해와 참사는 계속됐다. 노후 불법 개조 선박이었던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사고의 실종자들을 찾아 달라는 피해자 가족들의 절박한 외침은 외면당했다. 실종 선원 수색과 침몰 원인 규명 요구는 문재인 정부 1호 민원이기도 했다.

영흥도 낚싯배가 침몰해 15명이나 사망한 사고가 있었는데, 당시 문재인 정부는 영흥도가 있는 인천을 포함한 전국 5곳 권역에 특수구조대를 설치하려는 해경의 계획을 거부하고 있었다.

가장 큰 규모의 참사는 화재 사고들에서 발생했다.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밀양 세종병원 화재, 이천 물류창고 화재 등 각 사고마다 30~50명이 사망했다. 늘 그렇듯 기업은 비용이 싸지만 불 붙기 쉬운 자재나 건물 구조를 선호하고, 정부는 그런 선택을 신자유주의적 규제완화로 뒷받침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고 김용균 청년 노동자를 비롯해 하루에 6명 이상이 산업 현장에서의 참사로 목숨을 잃고 있다. 그런데도 2020년 4월 총선 이후 민주당이 공룡 여당으로 다수 의석을 차지한 국회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알맹이가 빠진 누더기로 통과시켰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18년간 이어져 온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아직까지 피해자를 무수히 만들어 내고 있다. 지금까지 무려 1만 4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집계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지난해 7월 사회적참사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였고, 이는 기존 정부 발표의 10배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박근혜 정부 때 일어난 메르스 참사 이후 공공의료 확충이라는 과제는 전혀 실행되지 않았다. 결국 지금 1800명 가까이가 코로나19로 희생됐다. 몇 달 전 동부구치소 집단감염 사건도 국가의 무책임으로 인한 또 다른 참사였다.

해결되지 않는 참사, 원인을 알고도 계속 반복되는 수많은 참사들을 보면, 세월호 참사는 박근혜 정부의 끔찍한 악행이자 실패인 동시에 민주당 정부도 공유하는 우선순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문재인 정부도 평범한 대중의 안전보다 기업의 이윤부터 지켜야 한다는 자본가 지배계급의 우선순위를 철저하게 공유한다.(경제 침체는 그런 성격을 더 두드러지게 만든다.)

우파와 문재인 정부 모두와 싸워야 한다

지난해 4월 총선 때는 미래한국당(지금의 국민의힘)이 참패했다. 세월호 수사 개입 책임자인 황교안과 총선 직전 유가족 비방을 터뜨린 차명진은 물론이고, 악질 막말로 손꼽히는 김진태, 민경욱, 조원진, 심재철 등 강성 우익들이 모두 줄줄이 떨어졌다. 그에 비해 이번 재보선에 나온 국민의힘 후보들은 박근혜 정부 때 핵심부에서 밀려나 있었다. 그들은 그 덕을 본 셈이다.

한편, 이번 재보선에 나온 민주당 후보들(서울 박영선, 부산 김영춘)은 전혀 개혁 기대감을 일으키지 못하는 인물들이었다. 2014년 ‘기소권과 수사권이 보장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 운동이 벌어질 때 박영선은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였다. 그때 박영선은 집회 무대에 올라와서 유가족 앞에서 운동의 주요 요구(기소권)를 포기하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후 특별법이 누더기가 되는 과정을 주도했다.

김영춘은 문재인 정부의 해수부 장관을 지냈는데, 당시 해수부는 미수습자 가족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희생자 유골 수색을 대충, 빨리 끝내버렸다. 결국 2017년 11월 해수부의 세월호 희생자 유골 은폐 사건이 터졌다. 김영춘은 이런 사태의 최종 책임자였다. 그러나 그를 비롯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세월호 변호사,” “거지갑,” “거리의 변호사”라고 불리던 박주민 민주당 의원은 LH 부패 사건으로 대중의 분노가 높은 상황에서 전월세 상한제 시행 전, 자기 소유의 서울 도심 아파트의 월세를 인상해 논란을 낳기도 했다.

이런 인물들이 민주당의 대표 얼굴로 선거에 나온다는 것 자체가 문재인 정부의 지난 4년을 예시적으로 보여 주는 일이다. 그 4년은 세월호 문제 해결을 비롯해 여러 개혁 염원이 배신당하는 시간이었다. 문재인 정부에 기대를 걸어서는 세월호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세월호 참사의 주 책임자들인 우파 정치인들과 관료뿐 아니라 현재의 집권 세력이자 약속을 외면하는 문재인 정부에도 반대해야 한다.

“우리는 세월호 세대입니다” 2017년 4월 세월호 참사 3주기 집회 ⓒ박충범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의미

참사에 대처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무능·무책임·무관심은 양상은 조금씩 다를지언정 선진국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벌어지자 미국, 영국 등 가장 발전한 선진국에서도 시장 경제 활성화(기업의 이윤 획득 지속)를 앞세운 정부 정책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다. 현재 전 세계 코로나19 사망자 수는 290만 명을 넘었다.

기업에 대한 안전 규제를 강화하고 대중 안전이나 공공의료, 방역 체계에 투자할 책임과 능력은 국가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주의 하에서 국가와 자본은 공생과 상호의존 관계를 맺고 있다. 이 때문에 공황·화재 등 대형 사고·감염병 유행 등 위기의 순간에 국가는 자본가 계급의 사정부터 걱정한다. 또, 국가는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사회 질서에 대중이 쉽게 항의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억압한다.

세월호 참사를 진정으로 기억하고 추모하는 방법은 기업의 이윤 몰이, 국가와의 부패한 유착, 그것을 뒷받침하는 정부 정책들에 반대하는 투쟁, 즉 사회 전체를 바꾸기 위한 투쟁과 세월호 참사 항의를 연결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윤보다 생명이 먼저’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인류가 이룩한 최선의 사회체제라고 교육받지만, 반복되는 참사와 감염병 위기는 사실 그런 가르침을 산산조각 내고 있다. 우리의 투쟁이 반자본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 나아갈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