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최 ‘여성과 생명’ 세미나:
가톨릭 낙태 반대 운동에 대한 내부 비판이 제기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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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가 ‘여성과 생명’을 주제로 정기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세미나의 핵심 주제는 낙태죄, 여성 친화적 교회를 위한 과제들이었다. 토론회에는 약 100명가량 참가했고 대부분 여성 신도들이었다.
이날 진행을 맡은 이동익 신부(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총무)는 행사 개최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낙태죄 폐지 반대 100만 명 서명 운동을 펼치는 동안 교회 안팎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다. 교회 안에서도 일부 여성들은 낙태 금지로 여성에게만 부담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자리가 마련된 것은 낙태죄 폐지 반대 운동에 대해 가톨릭 내부에서도 문제의식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낙태권 옹호 운동(본지도 그 일부다)이 ‘태아 생명권’ 논리를 적극 반박하며 가톨릭 교회의 낙태죄 폐지 반대 캠페인에 맞서고 가톨릭 내 진보파에게도 낙태권 지지 목소리를 촉구해 온 것이 이런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내부 성찰
첫 번째 발표를 맡은 김세서리아 교수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낙태 담론에 대한 성찰’을 주제로 발표했다. 김 교수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여성소위원회 위원이다.
김 교수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낙태죄 폐지 반대 주장에 여러 의미 있는 비판들을 제기했다. 김 교수는 “교회의 낙태 담론이 의도치 않게 산출할 수 있는 배제와 억압의 문제는 반드시 꼼꼼히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가톨릭 교회가 ‘태아의 발’ 사진, 초음파 사진 등을 이용해 태아 생명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실제로 태아는 어머니의 몸과 분리된 채 살아가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또한 가톨릭 교회의 ‘생명권’ 논리는 정작 그 ‘권리’가 어떤 사회 구조 속에 놓여 있는지는 보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태아의 생명권에 치중하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낙태 반대 운동은 낙태죄, 낙태죄 폐지 등의 문제를 낳는 사회구조와 사회 과정 등의 문제를 간과하였다는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다.”
김 교수는 여성의 몸과 관련된 결정권이 여성에게 있는 사회적·제도적 장치들이 충분히 마련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런 사회 구조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저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고 주장하는 게 오히려 여성들을 고통에 빠뜨릴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논의는 … 중요한 명제이다. 하지만 ‘모든’이 배제와 소외를 낳고 나아가 폭력성을 지니는 개념일 수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할 때, 그것은 현실적 차별과 억압을 낳는다.”
마지막으로 김 교수는 “가톨릭 교회의 낙태 담론에서 가장 심각하게 재고돼야 할 사안은 교회가 낙태를 죄로 규명하면서 국가와 법을 소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한국 천주교의 ‘낙태죄 폐지 반대’ 운동은 낙태 여성으로 하여금 법 제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공격의 방향을 내면으로 돌리고 양심의 가책으로 구성된 내적 세계를 만들어내게 만들며, 종교, 혹은 도덕의 이름으로 그 자신을 공격하게 만든다.”
김 교수는 앞으로 가톨릭 교회가 단지 태아가 생명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의할 것이 아니라 더 복잡한 현실들을 인정하고 고민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비록 김 교수가 명확하게 ‘낙태죄 폐지’나 ‘낙태권 지지’를 주장하진 않았지만, 낙태죄 폐지 반대 서명운동을 이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소속 위원이 이런 비판을 제기한 것은 상당히 의미 있다.
‘성체 모독’ 사건
두번째 발제자인 박은미 이화여대 교수(주교회의 여성소위원회 총무,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대표)는 오늘날 여성 차별의 현실을 짚어가면서 천주교 여신도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밝혔다.
특히, 박은미 교수는 한 워마드 회원의 ‘성체 모독’ 사건을 언급하면서 가톨릭 교회 대응의 아쉬움을 지적했다. “여러 종단 가운데 왜 유독 가톨릭을 표적으로 삼았는지, 가톨릭이 가장 공경하는 대상을 모독하여 상처를 입히고 싶어 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반성해 보는 것은 어떤가.” (관련 노동자연대 성명: ‘워마드 한 회원의 성체 모욕 사건: 마녀사냥 하지 말고 먼저 여성 차별에 대한 반감의 심정을 이해해야’)
‘성체 모독’ 사건이 벌어진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는 박은미 교수의 지적은 옳다. 가톨릭 교회는 낙태죄 폐지 반대 서명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고, 낙태죄 폐지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그 중에는 적지 않은 가톨릭 신자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의 분노를 자아냈다. ‘성체 훼손’은 이런 극단적 반감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또한 박은미 교수는 올해 바티칸 등에서 벌어진 사제들의 성추문도 비판했다. 한국에서도 올해 초 수원교구의 한 신부가 여성 신자에게 성폭행 시도를 한 혐의가 폭로됐다.
박은미 교수는 “한국 교회의 미투에 대한 대응은 전체적으로 미온적”이라고 쓴소리를 했다. ‘미투’에 대응하고자 ‘특별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누가 참가하고 있는지 어떤 활동을 하는지 ‘깜깜이’라는 것이다.
끝으로 박은미 교수는 가톨릭 교회가 여성 차별 문제를 더 많이 다루고 민감해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보수적 반론
발제가 끝난 후, 토론자 네 명의 발표도 이어졌다. 김수정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는 두 발제자의 주장에 대체로 공감을 표했지만 나머지 토론자들은 주로 김세서리아 교수의 주장을 반박했다. 특히 토론자로 나선 신부들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인간”이라며 낙태가 ‘살인’이라는 관점을 고수했다.
정재우 신부(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는 태아의 독립성 주장을 반박한 김세서리아 교수의 주장에 대해 “태아는 사실상 어머니의 처분에 맡겨진 객체로서 간주되는 것”이라며 비판했다.
그러나 태아가 모체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김세서리아 교수의 지적이 옳다. 따라서 태아는 독립적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볼 수 없고, “태아의 권리”라는 말도 성립할 수 없다. 태아의 “생명권”을 강조하는 것은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삶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무시하며 여성을 출산 도구로나 여기는 얘기다.
낙태죄 폐지 반대가 여성들을 사법적으로 압박하는 것이라고 비판한 김세서리아 교수의 지적에 대한 반론도 있었다. 정재우 신부와 수원교수의 유재성 신부는 죄는 반대해도 죄인에게는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번 낙태죄 폐지 반대 운동이 낙태한 여성을 법의 처벌에 내모는 뜻으로 들렸을 수 있고, 그래서 자비의 메시지가 가려졌다면” 오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가 낙태죄 폐지 반대 서명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그 서명을 헌법재판소에 제출해 압박해 놓고, 법의 처벌로 내몰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어떤 의미로든 낙태를 ‘죄’로 취급해, 낙태하는 여성들에게 죄책감을 심어준다는 점에서도 문제다. 이는 마치 보수 개신교가 동성애를 ‘죄’라고 규정하면서, “우리는 죄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동성애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게 위선적으로 들린다.
가톨릭 교회가 낙태를 죄로 규정함으로써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못 주면서 그들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와 고통을 안기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패널 토론자들의 보수적인 논평에도 불구하고, 일부 청중들은 김세서리아 교수와 박은미 교수가 제기한 비판적 문제제기를 신선하게 느낀 듯했다.
한 여성 신도는 청중 발언에서 “세서리아 교수의 주장에 공감한다. 낙태죄 폐지 반대 서명운동을 받을 때 가톨릭 신자니까 무조건 해야 한다는 것에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 들은 주장이 굉장히 신선했고 감동이 왔다”고 했다.
가톨릭 교회의 낙태죄 유지 입장은 가톨릭 여성 신도들의 삶과도 맞지 않는다. 유재성 신부는 발표에서 자신이 대학 강의를 할 때, “[수업에 참가한] 자매님들의 절반 가까이가 낙태를 경험한 사실이 있다고 고백”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종교와 관계 없이 여성들은 낙태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곤 한다.
또한 가톨릭 역사에서 언제나 낙태가 금지됐던 것도 아니고, 가톨릭 신자들이 모두 낙태죄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국민의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인 아일랜드에서 올해 낙태죄가 폐지된 것은 한 예다.
이날 토론에서 제기된 낙태죄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들이 가톨릭 내에서 더 커지길 바란다. 가톨릭 내 진보 인사들이 낙태죄로 인한 여성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적극 나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