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가 낳는 불평등과 국경 통제로 고통받는 기후 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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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위기로 대규모 이주와 난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유엔난민기구 자료를 보면, 지난 10년간 사람들이 기상 관련 사건 때문에 이주한 횟수가 연평균 2150만 회다. 분쟁이나 폭력 때문에 발생한 것보다 두 배 이상 많다.
또 2019년 자연재해로 이재민이 약 2485만 명 발생했는데, 지진이나 화산 폭발 같은 지구 물리학적 사건으로 인한 경우는 4퍼센트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폭풍·홍수·화재·가뭄처럼 기후 변화 때문에 갈수록 빈발하고 파괴적이 되고 있는 기상 현상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기후 난민이 앞으로 얼마나 늘어날지에 대한 추정치는 다양하다. 가장 널리 인용되는 연구 결과는 그 수가 2050년에 약 2억 명에 달할 것이라고 추산한다. 물론 추정치일 뿐이지만, 기후 관련 이주와 난민이 늘고 점점 정치적 이슈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분명하다.
저지대 섬에 사는 사람들이 해수면 상승으로 겪는 곤경은 대표적인 사례다. 남태평양의 키리바시는 자국민에게 분양할 24제곱킬로미터 이상의 토지를 이웃 국가인 피지에서 매입해 이주를 독려하고 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작은 섬에 사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에 따르면, 세계 육지 면적의 2퍼센트를 차지하는 저고도 해안 지대에 인구의 10퍼센트가 거주한다.
2013년 역사상 가장 강력한 태풍으로 기록된 하이옌이 필리핀의 해안 저지대에 위치한 상업 중심지 타클로반을 강타했다. 이로 인해 6293명이 사망했고, 집 110만 채가 파괴돼 400만 명이 이재민이 됐다.
온실가스 배출에 책임이 작은 저소득 국가들은 사회안전망이 취약해 기후 위기의 피해를 더 크게 입는다. 예컨대 1991년 방글라데시를 강타한 사이클론 고리키는 적어도 13만 8000명의 사망자를 냈다. 반면 이듬해 허리케인 앤드류가 미국의 플로리다와 루이지애나를 강타했는데, 더 강한 태풍이었는데도 사망자는 65명으로 훨씬 적었다.
그러나 고소득 국가 내에서도 기후 위기의 피해는 계급에 따라 다르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언스를 휩쓸었을 때 2000여 명이 사망했는데, 다수가 흑인이었다. 또, 흑인과 백인을 가리지 않고 가난할수록 사망률이 높았다.
당시 대통령 조지 부시 2세는 해당 지역이 폭풍 해일에 취약하다는 경고를 무시했고, 심지어 이라크 전쟁 비용을 충당하려고 홍수 방지 예산을 삭감했다. 그러고는 참사 후 구호물품이 오지 않아 생존자들이 상점을 침탈하자, 이들을 폭도라고 매도하며 인종차별을 부추겼다.
미국이 침략한 아프가니스탄은 지난 50년 동안 가뭄이 심해져 왔다.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또한 34개 주 모두 지난 30년간 적어도 한 번 이상의 재난을 겪었다. 이런 곳에서 소련의 침공과 뒤이어 미국이 20년간 벌인 전쟁은 기후 변화 탓에 가뜩이나 취약해진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조건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 결과, 2021년 1분기에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거의 절반인 1960만 명이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았다. 2020년 기준 아프가니스탄 난민은 570만 명에 이른다.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했던 한국 정부도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관타나모
각국 지배자들은 지금도 난민 유입을 억제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한국 정부의 난민 인정률은 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미군은 중남미에서 오는 이주민을 막으려고 부대를 창설해 관타나모 해군기지에 주둔시키고 있다. 2015년 펜타곤은 이 부대의 훈련에 대해 “일련의 허리케인으로 폐허가 된 카리브해의 여러 섬에서 주민이 집단 이주하는 상황을 예상한 것”이라고 밝혔다. 훈련 참가자들에 따르면, 바다에서 난민선을 막아 난민들을 본국으로 송환할 때까지 (고문으로 악명 높은) 관타나모 해군기지에 억류하는 작전 훈련이었다.
이처럼 기후 변화로 인한 재난은 전체 체제와 지배자들의 정책 등과 상호작용하는 속에서 악화되고 불평등하게 나타난다. 또, 기후 변화 그 자체도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다. 따라서 기후 위기를 전체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
만약 일각의 주장처럼, 이런 맥락을 보지 않은 채 기후 변화를 분쟁·집단 이주와 단순 직결시키면 이는 기후 난민을 막기 위한 국경 통제를 정당화하는 효과를 낼 수도 있다. 기후 변화가 낳는 자원 부족과 재난에 대응해 평범한 사람들끼리 서로 싸울 수밖에 없다면, 기후 난민은 사회에 불안정을 낳는 ‘안보 위협’으로 비춰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지배계급 사람들이 기후 위기와 더 넓은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쟁점들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재난의 발생과 그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따라서 기후 위기에 맞선 운동은 이주·난민 등 인종차별 쟁점과 결합될 필요가 있다.
기후 위기와 인종차별
이는 쉬운 일만은 아니다. 예컨대 ‘멸종반란 영국’의 일부 창립자들은 기후 위기가 다른 어떤 문제보다 중요하고 가능한 한 광범하게 조직해야 한다는 생각에, 보수적인 사람들에게도 멸종반란 운동이 호소력이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논란이 될 수 있는 인종과 사회정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멸종반란 운동 안에서 제한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각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주민과 난민의 유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기후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며 인종차별적 주장에 타협하기도 한다.
물론 멸종반란 운동에 참가하는 다수는 인종과 사회정의 문제를 다루는 데 호의적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이런 쟁점으로 멸종반란 조직이 분열되기도 했다.
기후 불평등 심화는 기후 위기를 둘러싼 진정한 분단선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준다. 화석연료 체제에 기반해 이윤을 뽑아내는 자본가와 각국의 지배계급은 이 체제를 수호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는 반면,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기후 위기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보고 있다.
개발도상국이나 저개발국 출신이 다수인 이주민과 난민의 본국에 있는 가족들은 그런 피해에 더 쉽게 노출될 수 있다. 그 자신도 거주국에서 더 취약한 처지에 놓여 있다. 이들은 기후 위기 문제에 관심이 높을 수 있는 집단이다.
또한 자본주의는 이전 어느 때보다 많은 이주를 낳았다. 이주민과 난민은 대다수가 각국에서 노동계급의 중요한 일부이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에서 생산을 담당하고 있어 이윤 체제를 마비시킬 결정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힘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면 지배계급에 맞서는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지배계급은 이주민과 내국인 사이를 이간질하고 인종차별을 조장해 노동계급과 피억압 집단들이 단결해 힘을 발휘하는 것을 어렵게 하려 한다.
기후 위기로 인한 이주민과 난민을 환영하는 것은 이런 이간질에 맞선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난민 협약
기후 난민이 한국에 온다면 난민법의 매우 협소한 난민 규정이 쟁점이 될 수 있다.
한국의 난민법은 국제난민협약의 규정을 따르고 있다. 이 협약은 냉전을 배경으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만들어졌고, 정치적 박해를 받는 사람만 난민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전쟁 난민이나 기후 난민은 법적인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국적을 가진 나라 안에서 떠도는 난민(국내실향민)도 마찬가지다.
난민 규정을 확장해 기후 난민도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주의 원인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설령 난민의 정의를 확장해도 이를 입증해 난민 지위를 얻기는 어려울 수 있다. 또 부유한 국가들과 유엔난민기구 역시 부담을 피하려고 난민 정의 확장을 꺼린다.
따라서 이민 통제를 완전히 중단하는 것이 진정한 대안이다.
국경은 자본주의가 부상하고 국민국가가 확립되면서 등장한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거나 국적에 따라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등 지배 계급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국경을 통제해 왔다.
이에 맞서 자유로운 왕래와 거주를 보장하고 누구나 원하는 곳에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