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마르크스주의자 인터뷰:
“종단·종파를 넘어선 연대가 이스라엘의 전략을 좌절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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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이스라엘과 레바논 사이의 휴전이 발효됐다. 레바논 마르크스주의자 시문 아사프에게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휴전, 시리아 상황, 앞으로의 전망에 관해 자세히 들어 봤다. 이 인터뷰는 시리아에서 아사드 정권이 무너지기 전인 12월 3일에 한 것이다.
휴전 합의 후 레바논 사람들의 정서와 반응은 어떻습니까?
여러 측면에서 얘기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은 레바논 내 종단·종파 간 분열을 부추기는 전쟁 전략을 취했습니다. 네타냐후는 TV 연설에서 그러한 전략을 분명하게 제시한 바 있습니다. 레바논이 헤즈볼라의 무장을 해제시키지 않으면 레바논 전체를 공격하겠다고 한 것이죠.
이스라엘은 시아파 피란민을 지원하는 연대 운동을 겨냥했습니다. 종래의 교전 지대나 헤즈볼라 지지 지역이 아닌 곳도 무지막지하게 폭격했습니다. 그중에는 시아파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레바논 북단의 여러 기독교인 마을도 있습니다. 드루즈인과 수니파 지역도 공격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공격한 곳 중에는 자흘라라는 소도시도 있습니다. 주민의 98퍼센트가 기독교인인 그곳은 [1975~1990년] 레바논 내전 당시 반(反)팔레스타인, 반(反)무슬림 무장 조직의 아성이었던 곳입니다. 그런 만큼 자흘라에 대한 공격은 하나의 시험대였습니다. 자흘라 시민들이 시아파 피란민을 돌려보내어 이스라엘의 작전을 더 수월하게 하느냐가 관건이었죠.
일부는 시아파 피란민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다수는 피란민을 돌려보내지 않고 이스라엘의 폭격을 감수했습니다. 시아파 피란민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 만큼 평범한 사람들 사이의 연대가 강력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20년간 이어진 계급투쟁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종단·종파별 권력 안배 체제에 맞서서 2019년에 일어난, ‘10월 혁명’으로 알려진 대중 항쟁이 중요했습니다.
휴전 후 레바논 사람들은 환호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전쟁을 종단·종파 간 전쟁으로 비트려는 이스라엘의 시도에 맞서 단결을 성취한 것에 환호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주요 전략 하나가 실패한 것입니다.
2006년 전쟁 때도 그런 상황이 전개된 바 있죠. 당시 레바논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사미둔이라는 조직의 결성을 주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무장 저항을 지원했습니다. 피란민들을 도움으로써요.
현재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사미둔이라는 조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수많은 단체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시아파 피란민을 돕는 ‘작은 사미둔’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2006년에 우리가 했던 일이 지금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반화된 것입니다.
휴전 직후 레바논인들 정서의 두 번째 측면은 대중 운동과 무장 저항의 결합과 관련 있습니다.
[헤즈볼라 지도자] 나스랄라 사망 직후 레바논 국가 관료와 정치 엘리트 사이에서는 ‘헤즈볼라 이후’니 ‘저항의 종언’이니 하는 역겨운 주장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이스라엘의 전략이 먹힌 것 아닐까 하고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대중 운동이 일어나 무장 저항에 매우 실질적인 도움을 줬습니다. 무장 저항 지도부의 정치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말이죠.
휴전이 새벽 4시에 발효되고 2~3시간 후 수많은 사람들이 도로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폐허가 된 레바논 남부로 몰려갔습니다. 그 인파가 이스라엘의 탱크를 뒤덮고 탱크에 탄 이스라엘 군인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광경을 담은 영상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온 덕분에 헤즈볼라는 레바논 남부에 갇혀 있던 대원들을 무사히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특히 많은 부상자를 데려갈 수 있었습니다. 몰려온 인파가 헤즈볼라 대원들을 구출한 것이죠. 그에 관한 많은 일화가 있습니다. 인파 덕분에 헤즈볼라는 국경 지대에 배치했던 중무기도 일부 회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대충 위장막을 덮고 사람들 틈에서 그것을 옮긴 것이죠.
대중 운동과 무장 저항의 결합은 레바논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2000년 레바논 남부에서 1982년부터 이어진 이스라엘의 점령을 끝장낸 이래로 계속된 그 관계는 2006년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를 다시 침공했을 때도 핵심적 구실을 했습니다.
이번 휴전은 저항이 무사히 후퇴할 틈을 주는 한편, 외부의 적에 맞선 단결의 정서를 확인시켜 줬습니다.
휴전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뜻하지만 헤즈볼라 또한 ‘가자지구에서 인종 학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겠다’는 기존 입장에서 후퇴했습니다. 헤즈볼라가 입은 타격은 어떠했고 그런 후퇴는 얼마나 불가피했나요?
이스라엘의 공격은 제 생애에서 목격한 것 중 가장 가혹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이스라엘에 의한 전쟁을 네 차례 겪었는데, 매번이 이전보다 가혹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공격은 그 어느 때보다 가혹했습니다.
공격이 하도 맹렬해서 무장 저항이 살아남기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후퇴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후퇴할 것이냐가 중요한 문제가 됐죠.
그래서, ‘살아남은 것이 승리’라거나 ‘여전히 저항이 살아 있다’거나 ‘우리는 팔레스타인을 돕기 위해 힘닿는 데까지 노력했다’는 긍지도 있지만 ‘우리 능력의 한계에 도달했고 패배로 접어들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략이 실패한 것인 동시에 헤즈볼라의 전략 또한 한계에 부딪힌 것이죠. 이중의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항의 진로가 무엇이고, 서방의 무제한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에 맞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관한 물음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용기와 희생에도 불구하고 무장 저항을 중심에 놓는 전략은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진로를 찾으려면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혁명가들에게 게릴라전은 대중 운동에 따라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반면 헤즈볼라와 같은 단체들은 게릴라전을 중심에 놓고 대중 운동이 그것을 지지해야 한다고 여기죠. 그러면서 카타르나 이란, 시리아 정권이나 이러저러한 인사들과 동맹을 맺습니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성취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런 전략은 아랍 세계의 대중 혁명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실 헤즈볼라가 재앙적 타격을 입은 때는 이번 전쟁이 아니라 2019년이었습니다. 당시 헤즈볼라는 대중 항쟁으로 붕괴될 위험에 처한 레바논 국가를 구원하러 나섰습니다. 그러면서 헤즈볼라는 스스로를 난처한 지경에 빠뜨리고, 종파적 체제에서 득을 보는 최악의 기업주들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당시 나스랄라는 파업이야말로 레바논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비난하면서, 레바논 군대가 파업과 시위를 진압하지 않으면 헤즈볼라가 직접 진압에 나서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현재 나스랄라는 팔레스타인을 위해 궁극의 희생을 한 성자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2006년 이래 나스랄라가 취한 행보 — 2011년 시리아 혁명 때 시리아 정권을 편들고, 2019년 대중 항쟁을 진압하는 데 일조하고, 2020년 베이루트에서 일어난 질산암모늄 폭발 참사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덮는 데 일조하는 등 — 는 아무것도 아니게 됐습니다. 이것이 현 상황의 한 요소입니다.
또 다른 요소는 레바논 남부의 재건입니다.
사실 저는 레바논에서 비교적 유복한 집단에서 자랐습니다. 베이루트 동부의 상층 중간계급 출신이죠. 그런 저도 전쟁 때문에 세 번이나 집을 다시 지었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모든 레바논 가정이 똑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부서지면 다시 짓고 부서지면 다시 지어 왔죠.
사람들이 합심해 레바논 남부를 재건하는 것도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돈은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재외 레바논인들로부터 충분한 재건 자금이 유입되기 마련이고 주택 가격도 저렴합니다.
그리고 재건이 시작되면 레바논 남부로 전선이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현재 헤즈볼라는 그렇게 전망하고 있습니다.
휴전 체결 후에도 상황은 불안정합니다. 휴전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은 매일같이 휴전 합의를 어기고 있고, 그 합의를 오히려 레바논 남부에서 전쟁을 지속할 명분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지난 며칠 사이 이스라엘은 시아파의 인프라와 주택, 병원들을 파괴했습니다.
어제[12월 2일] 헤즈볼라는 경고 차원으로 로켓을 몇 발 쐈습니다. 이스라엘은 14차례의 공중 공격으로 대응했습니다.
전쟁이 재개될 공산이 큽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내부에서 비롯하는 면이 큽니다. 레바논의 시아파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방송되자 이스라엘 내에서는 분노가 크게 일었습니다. 팔레스타인 북부에 거주하던 이스라엘인들은 아직 돌아가지 못했거든요. 이스라엘 우익은 이를 패배로 여겼습니다.
게다가 미국이 이스라엘에 약속한 휴전 조건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휴전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이스라엘 너는 레바논 남부를 파괴해서 완충지대를 만드는 전략을 계속 추구해도 좋다.’
그래서 휴전은 갈수록 일시적인 것처럼 보이고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함께 레바논 남부를 초토화시키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가자지구를 초토화시키고 있죠. 하마스의 용맹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것을 거의 완수했습니다. 그리고 레바논 남부에서도 그러고 싶어 합니다.
따라서 저항 세력의 무장 해제는 레바논 남부가 서안지구나 가자지구처럼 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레바논 사람들은 압니다.
사실 휴전 협정에 무슨 내용을 포함시키든 강제할 방법이 없으면 그 협정은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2006년 전쟁을 끝낸 유엔 안보리 결의 1701호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습니다. 이번 합의도 종이 쪼가리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문제는 저항이 어떻게 전열을 가다듬느냐입니다.
최근 시리아 상황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에 미칠 영향은 무엇일까요?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강조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사드 정권을 무너뜨리고 있는 하이아트 타흐리르 알샴(HTS)에 관해 ‘튀르키예가 지원하는 세력’이니, ‘카타르가 지원하는 세력’이니, ‘미국이 지원하는 세력’이니 어쩌고저쩌고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하는 것은 HTS가 그저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HTS는 시리아 혁명이 남긴 유산입니다. 더 정확히는 혁명의 유산이 아니라 혁명 패배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겠죠.
HTS는 시리아 혁명의 완수되지 않은 목표를 나타냅니다. 비록 매우 왜곡된 방식으로, 매우 부분적으로 나타내고, 그래서 튀르키예가 그들의 승리를 바라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튀르키예는 HTS의 승리를 통해 터키 내의 수많은 시리아 난민을 치워 버리기를 바랍니다.
지금 시리아에서 벌어지는 일은 여러 당사자들의 이해관계와 조건들이 맞아 떨어지면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1982년 헤즈볼라가 처음 등장했을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처음에 헤즈볼라는, 시리아가 지원하는 시아파 조직들에 맞선 대중 운동의 모습으로 등장했습니다. 당시 헤즈볼라는 왜 시리아를 적으로 삼았을까요? 시리아도 레바논인들을 억압하는 세력의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시리아는 1976년 레바논 내전에 개입해 좌파와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의 승리를 저지하고 레바논 우익을 지원했습니다.
당시 헤즈볼라가 시리아와 맞서는 것을 보며 일각에서는 ‘시아파 내에서 친서방 조직이 등장했다’고 관측했습니다. 그러나 헤즈볼라는 미국이 후원하는 조직이 아니었고 나중에 그렇게 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현실은 정반대였죠.
저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습니다. 알카에다에서 유래한 조직[HTS]이 과연 정말로 미국 제국주의와 이스라엘의 식민 지배에 동맹하는 세력이 될까요? 시아파 이슬람주의자들과 수니파 이슬람주의자들은 누가 이스라엘에 맞선 진정한 이슬람 저항 세력인지를 놓고 경쟁을 벌입니다.
따라서 HTS의 승리가 ‘저항의 축’을 제거하려는 서방의 음모라는 주장은 터무니없습니다.
제 동료들은 동의하지 않지만 제 개인적인 예상으로는, HTS는 결국 이란의 지원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미국이 시리아를 통제하기를 바라고 여러 세력들 사이에서 시리아를 둘러싼 쟁탈전을 벌일 것이기 때입니다. 요컨대 제국주의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HTS는 서방 제국주의에 맞서는 처지로 내몰리게 될 것입니다.
미국이 소련에 맞서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을 지원했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친서방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이라는 둥 어쩌고저쩌고 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관측은 전혀 맞지 않았죠.
HTS와 같은 이슬람주의 조직이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해 시리아를 장악하는 것은 서방의 승리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서방에게 골칫거리입니다.
상황이 매우 복잡하고 바로 그 복잡성이 서방 제국주의에 위험을 제기합니다. 딴에는 현지 세력을 이용해서 득을 보려 해도, 그런 복잡한 상황에서는 누가 누구를 이용하는지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실 서방과 맞서는 듯한 언사를 제외하면 이번 전쟁 동안 아사드 정권은 예컨대 골란 고원[이스라엘과 분쟁을 벌이고 있다]에서 단 한 발의 총알도 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전선은 1973년 이래로 조용했습니다.
저는 레바논 내전 당시 겪은 일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당시 레바논 정부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공산당을 분쇄하기 위해 시리아군의 개입을 허용했습니다. 운동이 패배에 직면하면서 저는 1976년 크리스마스 바로 다음 날 피란을 가야 했습니다.
이후 ‘저항의 축’에 관한 온갖 언사가 있지만, 시리아 정권은 레바논 좌파를 분쇄하는 구실을 기꺼이 수행했습니다.
이번 전쟁 내내 아사드 정권은 미국의 핵심 중동 우방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우호적으로 지냈습니다. 그 때문에 헤즈볼라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의 정보가 아사드 정권을 통해서 적들에게 유출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파다합니다. 물론 그것은 그저 음모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리아에 대한 레바논 내의 인식을 반영합니다.
상황은 불확실하고 복잡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미국 등 서방이 무엇을 하든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든지간에 우리는 ‘모든 강대국은 시리아에서 손을 떼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앞서 아랍 대중 혁명을 추구하는 전략의 필요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격변의 가능성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1948년[팔레스타인인 인종 청소와 이스라엘 건국]이 아랍 세계에서 거대한 혁명의 물결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번 전쟁 또한 격변을 낳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은 가장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멘과 레바논이죠. 그 다음은 이집트 대중과,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는 요르단일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영상을 보셨을지 모르겠지만, 이집트 깃발과 이스라엘 깃발을 단 이스라엘 군함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광경을 보며 이집트인들은 수치심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직 혁명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분노가 켜켜이 쌓이고 있습니다.
레바논에서는 좌파가 재건될 비옥한 토양이 형성됐습니다. 노동계급의 단결을 그저 이론이 아닌 현실에서 보고 있습니다.
일례로 건설 노조는 저렴한 가격으로 주택을 수리해 주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건설 노조가 나선다는 것은 기독교인이나 수니파, 드루즈인을 불문한 건설 노동자들이 나선다는 것입니다.
종단·종파 간 분열로 얼룩진 레바논 역사에 비춰 보면 이것은 커다란 승리입니다. 제가 스무살을 갓 넘긴 시절, 1982년 레바논 상황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좌파를 궤멸시키고 PLO를 패퇴시키고, 역겨운 종파 대립이 난무했습니다. 저는 레바논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그후 10년 동안 레바논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의 정서는 ‘우리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해 싸웠다’는 긍지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상황은 실로 재앙이지만 더 큰 정치적 승리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결국에는 거기에서 진정한 승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제 레바논에는 혁명과 반혁명, 전쟁, 전략의 실패를 경험한 새로운 세대가 있습니다. 저는 생애 처음으로 제 발밑에 탄탄한 지반이 있다고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