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
팔레스타인과 아랍 민중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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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4년 4월 7일 노동자연대가 주최한 포럼 ‘마르크스주의와 팔레스타인’에서 한 발제를 글로 옮긴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6개월 넘게 지속되고 있는 전쟁과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진정한 해법과 이를 위한 전략이 무엇이냐는 문제를 시급하게 제기한다.
‘두 국가 방안’은 사기다
미국과 서방 지도자들, ‘국제 사회’는 ‘두 국가 방안’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 방안은 사기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진정한 국가를 허용할 생각이 없다.
설사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진정한 국가를 허용한다고 하더라도, 역사적 팔레스타인 땅 일부만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떼어 주는 것으로는 정의가 회복될 수 없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인들은 마땅히 이스라엘의 존재에 계속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그런 발판을 내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두 국가 방안’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지극히 제한적인 자치를 허용한 뒤, 그 지도자들에게 팔레스타인인들을 단속하는 일을 일부 맡기는 것을 뜻할 뿐이다.
이것이 1993년 오슬로 협정으로 탄생한 팔레스타인 당국(PA)의 실제 기능이다. 팔레스타인 당국은 점령지에서 사회 유지 업무를 일부 분담하고, 이스라엘군과 협력하며 보안 경찰 구실을 하청받아 수행해 왔다. 그러는 동안 이스라엘은 시온주의자 정착촌을 계속 늘리고 팔레스타인인들의 땅을 계속 빼앗아 왔다.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과 그 직후에 벌어진 일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허용하려는 팔레스타인 자치의 한계선을 뚜렷이 보여 줬다. 그 선거에서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당국을 이끌던 파타를 상대로 압승을 거뒀다. 그러자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함께 파타의 쿠데타를 지원해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 했다. 하마스가 저항을 포기하지 않은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봉쇄된 가자지구의 운명도 팔레스타인 국가와 이스라엘 국가가 나란히 존재할 수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 줬다. 가자지구에서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당국보다는 좀 더 나아가 독자적 군대를 운용하고, 독자적인 외교 활동도 한다. 그러나 가자지구도 실질적 의미에서 국가라고 할 수 없다.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가자지구를 에워싸 모든 통행과 물자와 전기, 식량 공급 등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가자지구는 이스라엘과의 상시적 전쟁에 시달리며 외부의 원조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리고 하마스는 원조를 통한 주변 국가들의 길들이기 압력에 노출돼 왔다.
물론 하마스는 지금까지 저항을 포기하지 않아 왔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그들이 돌파구를 열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단일한 비종교적 민주주의 국가의 필요성과 그것의 함의
‘두 국가 방안’의 파산은 이스라엘을 존치시키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이스라엘 국가를 해체하고 ‘요르단강부터 지중해까지’ 단일하고 비종교적인 민주주의 국가를 세울 때에만 해결될 수 있다.
그런 국가를 세울 때에만 이스라엘 내에서 차별받는 팔레스타인인들과, 점령과 봉쇄에 시달리는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 팔레스타인 바깥에서 잃어버린 고향을 되찾기를 바라는 팔레스타인 난민 모두를 위한 정의를 되찾을 수 있다.
그런 국가를 세울 때에만 역사적 팔레스타인 땅에 사는 아랍인과 유대인, 무슬림, 그리스도인을 불문한 모든 사람이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그런 국가만이 역사적 팔레스타인의 다양성을 온전히 반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변화가 이스라엘 내부에서 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선주민을 상대로 한 강탈에 기초한 식민 정착자 국가이고, 노동계급을 포함한 사회의 모든 집단이 그 강탈에서 득을 본다. 물론 이스라엘 내에도 도덕적·정치적으로 원칙 있는 입장을 취하며 시온주의를 거부하는 용기 있는 소수가 있지만,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지적하듯이 법칙의 존재를 증명하는 예외일 뿐이다.
또, 단일한 비종교적 민주주의 국가라는 목표를 이스라엘 국가를 개혁하는 방식으로 성취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1990년대 초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흑인 노동자들의 강력한 저항에 밀려 기존 국가를 개혁하는 방식으로 아파르트헤이트(인종 분리) 체제를 종식시킨 바 있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을 지원하던 미국은 그 정권이 무너지면 남아공이 소련의 영향권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우려해 왔다. 그러나 동유럽이 붕괴하자 미국은 흑인 노동자들의 저항을 달랠 정치 개혁을 더 쉽게 인정할 수 있게 됐다.
반면, 이스라엘은 미국이 아프리카보다 더 중시하는 중동을 지배하는 데서 가장 핵심적인 요새다. 게다가 지금은 미국 제국주의의 위기가 갈수록 첨예해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미국의 중동 통제력은 점점 약화돼 왔다. 그런 만큼 이스라엘이 미국에게 갖는 중요성은 더 커졌다. 이것은 이스라엘 극우가 더 자신감을 얻고 날뛰는 주요 요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단일한 비종교적 민주주의 국가라는 목표는 이스라엘 국가를 강제로 해체시킬 때에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오늘날까지 유지돼 온 것은 이스라엘이 중동 제국주의의 ‘경비견’ 구실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국가를 해체시킨다는 것은 중동 지역의 제국주의 질서에 도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미국은 중동을 지배하기 위해 이스라엘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 아랍의 여러 정권과의 동맹에도 의존한다.
이 아랍 정권들은 종종 말로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의를 지지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팔레스타인인들을 계속 예속시키고 미국의 중동 지배를 유지하는 데서 다들 일정한 구실을 하고 있다.
아랍 국가들의 맏형을 자처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국 등의 걸프 국가들을 보라. 이 국가들은 과거부터 중동에서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데서 중요한 기둥 구실을 해 왔다.
이들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연료인 석유가 달러로 거래되는 것을 보장해 미국의 달러 패권을 뒷받침하고, 그렇게 들어온 달러를 통해 거액의 돈을 굴리는 국제 금융 시스템의 큰손이 됐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면 어디든 투자한다. 예컨대 아랍에미리트는 무려 1조 달러가 넘는 해외 자산을 굴리며 여러 기업에 투자하는데, 그중에는 가자지구를 공격하는 데 쓰이는 무기들을 제작하는 보잉도 포함돼 있다.
얼마 전까지도 이 걸프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문제는 없는 셈 치고 아예 이스라엘과 관계를 좁혀 왔다.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은 그런 시도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의도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집트 군사 정권은 미국의 주도로 이스라엘과 협정을 맺고 천문학적인 액수의 군사·경제 원조를 미국과 서구에게서 받고 있다. 가자지구 봉쇄도 이집트의 협력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요르단 정권도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 그 외에 이라크 전쟁, 시리아 내전 등을 피해 온 난민들을 수용하고 그들의 저항을 관리하고, 자국 영토 내에 미군 기지를 내주는 대가로 매년 미국에게서 막대한 지원을 받는다.
많은 수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살고 있는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등지의 정권들은 모두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체계적으로 억압하고 그들의 저항을 탄압해 왔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의 해방은 중동에서 제국주의와 얽혀 있는 아랍 정권들과도 대결해야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독립을 어렵게 하는 요인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위해 중동에서의 제국주의와 대결할 힘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선 팔레스타인인들 자신의 투쟁은 그 대결에서 필수적 요소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의 온갖 만행과 학살, 책략에도 불구하고 75년 넘게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저항하며 투쟁 의지를 입증해 왔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 앞에는 그들의 힘만으로는 독립을 쟁취하기 어렵게 하는 장애물들이 있다.
현재 팔레스타인인의 많은 수는 난민이고, 역사적 팔레스타인의 땅에 사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수(740만 명)는 이스라엘 유대인보다 조금 많은 수준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스라엘 경제에서 철저하게 배제돼 왔다.
이는 30여년 전 식민 정착자들의 인종 분리 체제를 해체하는 개혁을 쟁취한 남아공 흑인들의 처지와 대조된다. 당시 남아공 흑인의 수는 백인 정착자의 대여섯 배에 달했다. 그리고 남아공 경제는 주되게 흑인 노동자를 착취해서 자본을 축적했다. 그래서 흑인 노동자들의 파업은 개혁을 강제하는 데 필요한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반면, 이스라엘은 군수, 하이테크 부문 같은 경제의 핵심 부문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배제해 왔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의 파업은 이스라엘 경제와 국가를 마비시킬 수 없다. 2021년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벌어진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의 파업은 건설 부문과 교통 부문 일부에 타격을 가하는 데 그쳤다.
또,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미국의 지배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새다. 미국의 막대한 지원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이 가하는 타격을 상당히 완화시켜 왔다.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들의 전략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을 주도했던 파타는 독립 국가를 세우기 위해 아랍 국가들의 협력을 끌어들이려 했다.
때마침 1950~1960년대 아랍 세계에서는 서구의 지배에 맞선 아랍 민족주의의 물결이 일었다.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영국과 프랑스를 격퇴한 나세르가 그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아랍 민족주의 물결 속에서 식민 지배를 패퇴시키고 등장한 정권들의 주된 관심사는 자국 경제의 국가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정권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자국을 넘나들며 벌이는 저항이 이스라엘의 침공을 촉발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그 정권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제한하려 했다.
파타의 전략은 이런 아랍 민족주의 정권들에 대한 실망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그들의 전략은 게릴라 투쟁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들은 중동 전역에서 이스라엘을 겨냥한 게릴라 공격을 벌이는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아랍 정권들이 그들을 도우러 나설 수밖에 없게 하는 압력이 형성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파타와 파타가 주도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게릴라전은 몇 차례 상징적 승리를 거뒀다. 덕분에 파타와 PLO는 한동안 대중적 지지를 누렸다. 그 승리는 1967년 전쟁에서 이집트가 이스라엘에 참패해 실망한 아랍의 대중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파타의 전략은 여전히 아랍 정권들을 중심에 놓는 전략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파타의 전략은 아랍 정권들을 압박해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만큼, 팔레스타인인들을 아랍 정권에 맞서는 방향으로 이끌 수는 없었다.
이는 요르단에서 문제를 낳았다. 파타와 PLO는 요르단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팔레스타인인 난민에게서 커다란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이 난민들은 자신을 천대하고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요르단 정권에 분노했다.
한편, 요르단 정권은 ‘국가 안의 국가’라고까지 불리는 파타와 PLO의 위세를 위협으로 여겼다. 그러나 파타는 한사코 요르단 정권과의 충돌을 피하려 했다.
파타는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순간이 닥치고 나서야 요르단 정권에 맞선 투쟁을 선언했지만 이미 때를 놓친 뒤였다. 요르단 국왕의 군대는 수많은 팔레스타인인을 학살했고, 팔레스타인 전사들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이라크와 시리아 등의 아랍 국가들은 이를 수수방관했다.
그 후 파타는 아랍 정권들과 협력을 강화하며 이스라엘과의 협상을 통해 양보를 얻어내는 노선으로 기울었다. 이는 아랍 민족주의 정권들이 1967년 전쟁에서 참패한 뒤 제국주의 질서와 타협하며 그 질서의 일부가 되는 길을 걸었던 것과 궤를 같이한다. 그에 따라 이집트는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해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미국의 중동지역 하위 파트너가 됐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협상을 추구하는 노선으로 기운 파타는 결국 1993년 오슬로 협정을 체결해 ‘두 국가 방안’ 사기극에 공조하게 됐다.
하마스는 파타의 이런 노선을 거부하고 저항을 지속하면서 부상한 정당이다. 그러나 하마스의 노선은 많은 면에서 과거 파타의 노선을 계승하고 있다. 하마스의 무장 투쟁은 미국과 이스라엘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고 주변 아랍 정권들을 압박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전략에 따라 하마스는 주변 아랍 정권들과의 충돌을 한사코 피하려 해 왔다.
그리고 이는 과거 파타가 부딪힌 것과 비슷한 난점을 낳았다.
가령 지난해 현재 10월 7일 공격을 계기로 하마스는 요르단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요르단에서는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시위대와 정권이 충돌을 빚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4월 5일 하마스는 요르단 국왕에 감사를 표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이것은 국왕에 대한 정당한 분노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 지지자들의 행동을 제한하고, 요르단 정권의 기만극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이다.
제국주의와 아랍 정권들에 맞설 힘은 노동자·빈민 대중에게 있다
물론 하마스가 과거 파타의 한계를 답습한다고 해서 10월 7일 공격의 의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하마스의 전략과는 다른 측면에서 10월 7일 공격을 주목해야 한다. 바로 그 공격이 아랍 전역의 노동자·빈민의 행동을 촉구해 왔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제국주의와 그에 협조하는 아랍 정권들에 맞설 힘은 바로 이들, 아랍 노동자·빈민에서 나온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의는 아랍 전역에서 이들의 행동을 이끌어 낼 기폭제가 될 수 있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하는 착취 때문에 특별한 힘을 갖는다. 바로 그 자신을 착취하는 시스템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랍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중동·북아프리카 전반에는 노동계급을 중시하지 않는 전통이 있어 왔다. 예컨대 알제리의 저명한 혁명가 프란츠 파농도 그런 태도를 취했다.
여기에는 중동·북아프리카 같은 낙후한 지역은 노동계급이 소수이고, 그들을 전국적 투쟁에 별로 나서지 않는 특권적 집단으로 여기는 선입견이 깔려 있다.
그러나 레닌과 함께 러시아 혁명을 이끈 트로츠키는 노동계급이 소수인 나라에서도 노동계급이 다른 피억압 계급을 이끌고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 나라 지배자들도 노동계급이 생산하는 부에 의존하고, 노동계급은 파업과 같은 효과적인 집단 행동을 벌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을 그저 낙후하다고 하는 것도 지금의 현실과 맞지 않다. 그 지역의 많은 나라들에서 자본 축적의 중심이 형성되고 자본주의가 성장했다. 그 지역의 도시 인구 증가율은 수십 년 동안 세계 평균을 앞질러 왔다. 도시 인구의 증가는 노동계급의 증가를 수반했다.
물론 도시에는 노동자 외에도 수많은 빈민이 있다. 그러나 노동자와 빈민은 같은 지역에 모여 살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한 가족 안에 행상인, 하급 공무원, 생산직 노동자, 대졸 실업자가 같이 사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들은 모두 교육받았고 많은 수가 30대 미만으로 매우 젊다. 생산 과정의 핵심을 차지하는 노동계급은 자신의 힘을 입증할수록 빈민을 이끌 가능성도 커진다. 게다가 갈수록 그 중요성이 커진 운송과 같은 부문에서 노동자들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은 더 커졌다.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이런 발전은 매우 심대한 모순 속에서 진행돼 왔다. 부의 분배는 극도로 불평등하다. 그러나 그곳의 억압적 정치 체제는 이런 불만을 배출할 통로를 제한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가속된 경제의 시장 지향적 전환은 이런 불평등과 모순을 더 심화시켰다. 여기에 더해 그 지역에서 끊임없이 벌어진 전쟁과 충돌도 대중의 삶을 악화시키고 제국주의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키워 왔다.
이런 상황에서 근래 크게 악화된 생계 문제를 둘러싸고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고 이것이 독재 반대나 팔레스타인 해방과 같은 정치 투쟁과 만나면,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켜 실로 거대한 투쟁이 일어날 수 있다. 2011~13년 아랍 혁명, 특히 이집트 혁명에서 이런 과정을 실제로 목격할 수 있었다.
흔히 이집트 혁명은 페이스북과 트위터로 시작된 광장 점거로 독재자를 몰아낸 사건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집트 혁명은 2000년대에 벌어진 일련의 투쟁으로부터 그 에너지를 축적해 왔다. 이집트에서는 2000년 제2차 인티파다를 계기로 민주주의 권리를 요구하는 정치 운동들이 벌어져 왔다. 그리고 2006년 즈음 정권의 극심한 탄압으로 그 운동이 가라앉던 중, 그 운동이 조성한 토양 위에서 마할라 섬유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파업은 다시 민주주의 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2011년 이집트 혁명 초기 국면에 이런 과정은 훨씬 더 극명했다. 당시 타흐리르 광장에서 벌어진 점거 농성은 노동자 파업 물결을 자극했다. 많은 경우 파업 자체는 독재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기보다는 임금 인상 같은 생계 문제를 둘러싼 요구를 제기했다. 그러나 그 파업들은 섬유, 통신, 운송 등 이집트의 핵심 산업 부문을 멈춰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무바라크 정권에 치명타를 가했다. 이집트에 앞서 혁명이 일어난 튀니지나 2019년 알제리와 수단의 항쟁에서도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매 국면마다 결정적 구실을 했다.
독재자들을 타도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향해 한 발 나아가는 것일 뿐 아니라, 제국주의 질서를 뒤흔드는 것이기도 했다. 서방은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독재자들이 줄줄이 타도되는 것에 크게 당혹스러워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의는 아랍 혁명을 관통하는 쟁점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2011년 이집트 혁명을 일궈 낸 주역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제2차 인티파다를 보고 각성한 청년 활동가들이었다. 혁명 초기 국면에 이집트 시위대는 이스라엘 대사관을 습격하고, 봉쇄된 가자지구로 구호품 호송대를 보내 연대를 과시했다. 당시에 네타냐후는 아랍 혁명을 이스라엘의 최대 안보 위협으로 규정했다.
2012년 가자지구에서 이집트 무르시 정부의 중재로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에 휴전이 합의됐을 때, 그 방안은 하마스의 안에 더 가까운 것으로 평가됐다. 그럼에도 미국은 네타냐후를 압박해 그 합의안을 받아들이게 했다. 아랍 혁명이 제국주의 질서를 뒤흔들 잠재력을 힐끗 보여 준 또 다른 사례다.
아랍 혁명 패배의 교훈
그러나 아랍 혁명은 쓰라린 패배를 겪었다. 이집트에서는 엘시시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무슬림형제단원들을 학살했고, 리비아, 시리아, 예멘에서 혁명은 끔찍한 내전으로 귀결됐다. 그래서 중동에서 오신 분들 중에서는, 혁명을 너무 쉽게 이야기하지 말라는 반감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위해 이스라엘 국가를 해체하고 단일한 비종교적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그러한 혁명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2019년에 수단, 알제리, 이라크, 레바논 등지에서 일어난 항쟁들은 2011년 혁명을 낳은 해묵은 문제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더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우리는 비관할 것이 아니라 지난 혁명의 패배에서 도출한 교훈을 통해, 다가오는 혁명이 승리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앞서 얘기했듯이 2011년의 이집트 혁명은 노동자들의 생계 투쟁과 청년·빈민의 민주주의 투쟁이 결합되면서 분출했다. 그것은 “빵, 자유, 사회 정의”라는 당시 혁명의 구호로 잘 요약된다.
그러나 당시 무르시 정부는 그런 열망에 부응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런 열망을 두려워해 파업과 시위를 억압하기도 했다.
당시 무르시 정부는 군부를 잘 달래어서, 그들에게서 독재라는 요소를 제거하고 ‘정상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들이 맡아야 할 제자리를 찾아 주려 했다. 그래서 엘시시를 국방부 장관에 앉힌 것이다. 그러나 군부의 힘은 이집트 자본주의 시스템 전반에 얽혀 있었고, 거기서 따로 떼어 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무르시 정부는 결국 군부에 재기할 기회를 줬을 뿐이다.
무르시 정부는 팔레스타인의 대의도 진척시킬 수 없었다. 물론 이스라엘의 미사일이 쏟아지는 가자지구를 총리가 방문하기도 하고, 가자지구 국경을 잠깐 개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무르시 정부는 군부가 이스라엘과 체결한 평화 협정을 존중한다고 선언했다. 그래야만 미국 등 서방에 의해 계속 안정적으로 투자와 원조를 유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여러 좌파와 자유주의자들을 비롯한 세속 정치 세력들은 이와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권좌를 되찾으려는 군부와 협력해 국가기구에 진출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다. 그들은 그런 기대와 이슬람주의에 대한 적개심에 눈이 먼 나머지 군부가 대중의 불만을 이용해 반혁명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을 후원하는 범죄적 행동을 했다.
이런 경험은 이집트 같은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의 시스템 자체는 건드리지 않은 채 독재만을 제거하는 것이 극도로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단지 독재자를 쫓아내고 민주주의를 성취하는 것으로 자신의 과제를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노동자들이 기존 국가 기구가 아니라 저항 과정에서 발전시킨 자신의 민주적인 권력 기구로 국가를 대체하는 혁명으로 나아가야 하고, 오직 그런 혁명을 통해서만 민주주의나 민족 해방과 같은 해묵은 과제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런 혁명은 단지 그런 해묵은 과제를 해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 전반을 재편하는 혁명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트로츠키가 말한 연속혁명론의 핵심이다.
이집트에서 이런 이론에 근거한 전략을 추구한 혁명가들은 극소수였고 안타깝게도 사태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집트 혁명에서 그런 전략이 실행돼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의를 진전시켰다면 다른 아랍 혁명들의 판세도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이제 발제를 마무리하겠다.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한 정의는 오직 이스라엘 국가를 분쇄하고 단일한 비종교적 민주주의 국가로 대체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제를 성취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인들은 아랍 전역의 노동자·빈민의 혁명에서 힘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은 바로 그런 거대한 투쟁을 촉발할 기폭제 구실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