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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전쟁의 중동 확전과 저항

이스라엘이 전쟁을 팔레스타인 너머로 확대하고 있다. 9월 23일부터 레바논을 대대적으로 폭격하기 시작하더니, 베이루트 교외에 벙커버스터를 쏟아부어 헤즈볼라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를 살해했고, 예멘을 폭격했다. 그리고 이제는 레바논에서 지상전을 개시하고 있다. 이에 대응해 이란은 이스라엘에 제한적인 수준의 미사일 공격을 가했고, 네타냐후는 보복을 예고하고 있다.

나스랄라 살해를 승인한 직후 네타냐후는 유엔 총회에서 이렇게 으스댔다. “이란이든 중동이든 이스라엘의 긴 리치가 닿지 않는 곳은 없다.”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해 온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무력감을 느낄 수 있다. 세계의 이목이 온통 이스라엘의 확전과 이란의 개입 여부로 쏠리고 가자지구의 참상은 뒷전으로 밀려난 듯하기 때문이다.

가자지구에서 인종 학살이 계속되고 있다. 9월 29일에도 이스라엘은 피란민들의 숙소로 쓰이던 가자지구 북부의 한 학교를 폭격했다. 알자지라에 따르면 그 학교에는 300여 가족이 머물고 있었다.

한편, 언론들은 최근 이스라엘이 벌인 일련의 공격에서 드러난 이스라엘의 정보 능력과 군사적 능력을 주로 부각시키고 있다. 언론 보도들을 보면 이스라엘은 마치 지난해 10월 7일에 겪은 수모를 만회하고, 무적의 군대라는 위신을 되찾은 듯이 보인다.

이제 이스라엘군은 똑같은 방법으로 레바논에서도 파괴를 자행하고 있다. 폐허가 된 베이루트 남부 ⓒ출처 UNICEF

이스라엘의 확전은 가자에서 목표를 이루지 못해서다

그러나 이런 인상에 압도된 나머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후원하는 미국이 직면한 어려움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의 전선 확대는 가자 전쟁에서 직면한 어려움을 돌파하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가자지구에서는 여전히 인종학살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인종 학살이 지속되는 만큼 거기에 대한 저항도 완강하게 벌어져 왔다.

가자지구의 전황에 관해 이스라엘의 한 전직 장성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군대는 하마스와의 전술적 대치에서 모두 승리했지만 우리는 전쟁에서 지고 있다. 그것도 아주 크게 지고 있다. ⋯ 이스라엘군이 자리를 뜨면 15분만에 하마스가 그곳을 다시 장악한다.” 9월 중순 〈뉴욕 타임스〉 보도이다.

지난 1년간 전쟁을 겪으면서 하마스는 핵심 지도자 등 여러 간부를 잃었다. 군사적 능력 또한 일정한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점령에 저항하는 정치 조직으로서 하마스는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곧 승리다. 그리고 군사적 공격만으로 대중의 지지를 궤멸시키기 어렵다는 것은 식민 점령의 역사에서 숱하게 입증된 바다.

사실 전쟁을 거치면서 하마스는 정치적으로 더 강화됐다.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서 하마스에 대한 지지는 더 커졌고, 하마스는 새 세대로부터 조직원들을 충원하고 있다.

반면,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궤멸과 인질 구출이라는, 자신이 표방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오히려 하마스 없는 미래 가자지구, 미래 팔레스타인은 더욱 상상하기 어렵게 됐다. 그만큼 가자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가 현실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도 불분명하게 됐다.

그래서 바이든조차 네타냐후가 “완전한 승리”를 고집하는 것에 의구심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완전한 승리”가 무엇을 뜻하든지 간에, 바이든은 네타냐후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모험을 감행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모험이 미국의 중동 지배 질서를 더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음을 우려했다. 그래서 바이든은 네타냐후와 불협화음을 빚으며 거듭 휴전안을 제안해 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네타냐후는 전선을 확대해, 흔들리는 미국의 지지를 다잡고, 전쟁에 대한 국내의 지지도 다잡으려 하는 것이다.

인종 학살 전범 네타냐후 ⓒ출처 이스라엘 총리실

확전을 우려함에도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의 모순

물론 바이든은 확전 시도에 계속 우려를 표해 왔다. 전쟁이 확대되면 결국 아랍의 우방 정권들이 굉장히 심각한 불안정에 휩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군사적으로 헤즈볼라와 이란은 하마스보다 더 만만찮은 상대이다. 이스라엘이 이들과 전쟁에 휘말리면 미국은 더 중요한 경쟁자인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미국의 이율배반적 처신은 미국의 중동 패권이 약화됐음을 반영한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강력하게 통제할 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됐지만, 중동 통제를 이스라엘에 더 의지해야 하는 처지이다.

그래서 미국은 확전에 우려를 표해 왔지만, 그것이 이스라엘의 확전을 막는 보증이 전혀 되지 못한 것이다.

과거 레바논에서 겪은 패배를 설욕하려는 시온주의자들

이스라엘은 현재 레바논 남부에서 ‘제한적 지상전’을 통해 헤즈볼라를 몰아내려 하고 있다.

헤즈볼라는 개전 이래 팔레스타인을 지지하여 군사 행동을 벌인 두 세력의 하나다.(다른 하나는 예멘의 후티)

그래서 헤즈볼라는 미국의 조준경 속에 늘 있어 왔다. 물론 헤즈볼라는 예멘의 후티처럼 미국의 직접 타격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헤즈볼라의 공격을 추적하는 데 필요한 감시·정찰 자산을 이스라엘에 꾸준히 지원해 왔다.

개전 이래 계속돼 온 헤즈볼라의 공격으로 현재 이스라엘 북부로부터 이스라엘인 6만여 명이 대피해 있다. 네타냐후 정부는 이들의 귀환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레바논 남부에서 헤즈볼라를 몰아내겠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단지 이번 전쟁에서 헤즈볼라가 벌인 공격에 대한 대응 차원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사실 레바논의 역사 자체가 이스라엘의 개입과 침공, 점령으로 점철돼 있다. 이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식민 정착자 지배를 확립하고, 중동에서 서방 제국주의의 경비견 구실을 하는 과정과 밀접하게 엮여 있었다.

헤즈볼라는 거기에 맞선 저항 속에서 등장한 세력이었다. 레바논을 통제하려는 이스라엘의 일련의 시도에 맞선 저항은 헤즈볼라로 수렴됐고, 헤즈볼라는 여러 차례 그 시도를 패퇴시킨 바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그 패배를 설욕하고 헤즈볼라를 응징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게다가 레바논 남부를 통제하는 것은 시온주의자들의 오랜 숙원 과제이기도 하다. 시온주의자들은 레바논 남부를 그들이 목표로 하는 대이스라엘의 일부로 본다. 이것은 일찍이 1948년에 이스라엘 건국의 지도자이자 노동당식 시온주의의 지도자인 벤구리온이 주장한 것이기도 하다.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를 바라는 극우적 시온주의자들은 오늘날 이스라엘 정치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시온주의의 본질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다. 즉, 적대적인 아랍 세계에 둘러싸인 식민 정착자 지배 프로젝트로서 시온주의는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계속해서 아랍인들을 몰아내고 더 많은 땅을 차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가자 전쟁 초기부터 레바논 남부에서는 ‘가자지구 다음은 우리’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가자지구에서 전쟁이 시작된 이후 수많은 레바논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을 자신의 일로 여겼다.

이슬람주의에 대한 좌파들의 잘못된 접근법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전선을 확대하는 이유와 그에 대한 미국의 태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을 살펴봤다. 이제부터는 그 확대된 전선의 반대편에 있는 헤즈볼라를 어떻게 봐야 할지 살펴보려 한다.

레바논의 헤즈볼라는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주의 정당이고, 그래서 이슬람주의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문제를 먼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슬람이 특별히 후진적인 종교라는 잘못된 편견이 많고, 그와 관련해서 좌파 내에서도 이슬람주의 운동에 대한 편견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많은 좌파들이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를 정치적 좌우를 가르는 기준처럼 제시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들에 따르면, 이슬람주의는 흔히 우파로 뭉뚱그려저서 분류된다. 일례로 필자는 팔레스타인 저항을 주제로 한 한 토론회에서 발표자가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들의 정치 지형을 소개한다면서 세속주의를 표방하는 파타를 좌파로 분류하고, 이슬람주의인 하마스를 우파로 분류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것은 하마스와 파타가 각각 팔레스타인 독립 투쟁에서 하는 구실과 전혀 동떨어진 평가다. 파타는 이스라엘과 배신적으로 타협해 온 세력이고,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맞선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세력이니 말이다.

게다가 무슬림들이 글로벌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서 급진적 부분의 중요한 일부임을 고려하면, 이런 평가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또 다른 사례로, 어떤 좌파들은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내에서 하마스의 여성·성소수자 차별적 사상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건설적이지 않은 비판으로 불필요한 분열을 초래하는 것일 뿐이다. 운동을 키우려면, 그런 쟁점에 대한 입장과 상관없이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지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단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게다가 특별히 이슬람주의를 여성·성소수자 차별적이라고 하면서 문제제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또, 여성·성소수자 차별 문제가 운동의 구체적 필요 속에서 적절한 방식으로 제기되지 않는다면, 그런 문제제기는 정치적 경험 속에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이슬람주의 무슬림과의 단결을 어렵게 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이런 건설적이지 못한 접근들은 이슬람 종교 사상을 문제 삼아 선을 긋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언제나 상이한 세력에 의해 상이한 목적을 위해 상이하게 해석돼 왔다. 따라서 이슬람주의 운동을 분석하는 관점도 그 운동의 물질적 기반과 역사적 조건이 돼야 한다.

다양한 사람들을 단결시킨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의 집회 ⓒ조승진

헤즈볼라는 어떤 세력인가?

헤즈볼라를 이해하려면 두 가지 특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나는 레바논 사회 내 시아파의 처지다. 시아파는 현재 레바논에서 가장 거대한 종파이지만, 가장 가난하고 사회에서 가장 배제된 집단이다. 비교적 유복한 시아파 인사들도 차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종파별로 권력을 안배하는 레바논의 정치 체제에서 시아파는 가장 작은 몫을 할당받았기 때문이다.

헤즈볼라의 정치를 이해하는 또 다른 특성은 1982년부터 20년간 이어진 이스라엘의 점령에 맞선 저항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점령한 레바논 남부 인구의 압도 다수가 시아파여서, 점령에 맞선 저항도 시아파에 기반을 두고 시작됐다.

레바논 내전과 이스라엘의 침공 등으로 좌파가 궤멸된 상황에서 헤즈볼라는 점령에 맞선 저항이 결집하는 초점이 될 수 있었다. 헤즈볼라는 게릴라전으로 이스라엘을 곤경에 빠뜨렸다. 또, 헤즈볼라는 당시 내전과 전쟁으로 레바논 사회의 기반 시설이 붕괴된 상황에서 여러 복지 사업 등을 통해 기본적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를 통해 헤즈볼라는 대중적 지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지지는 비단 시아파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헤즈볼라는 시아파가 아니어도 저항 활동에 참가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 부대를 편성하기도 했고, 레바논 공산당 등 좌파가 주도하는 저항과 활동을 조율하기도 했다.

헤즈볼라는 게릴라전과 이런 광범한 대중 운동을 결합시킨 덕분에 이스라엘을 패퇴시킬 수 있었다.

이처럼 헤즈볼라는 레바논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주변화된 사람들을 대변하고 이스라엘에 맞선 저항을 이끌며 부상했다.

그러나 모순도 있었다. 그것은 레바논 내전 이후 시아파 내에서도 신흥 상층 계급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과 관련이 있다.

헤즈볼라는 점차 이들을 대표하고 레바논의 사회 체제 내에서 이들의 입지를 확보하는 방향을 추구했다. 이는 레바논의 기존 사회 체제에 타협하고 후퇴하는 것을 뜻했고, 이는 이스라엘에 맞선 저항 조직 역할과 충돌을 빚었다.

2000년 이스라엘 철군을 기뻐하는 레바논인들 ⓒ출처 moqawama.org.lb

헤즈볼라의 저항을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모순에도 불구하고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에 맞서는 저항 세력 역할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사실, 그런 조직의 전통과 기반은 쉽게 폐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최근 이스라엘의 효과적인 공격으로 헤즈볼라는 지휘 통제 체계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스라엘은 호출기 폭발 테러로 헤즈볼라의 통신 체계를 타격하고, 잇달아 주요 지도자들을 살해했다.

그러나 헤즈볼라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는 언론 보도는 과장이다. 헤즈볼라는 그저 소수 엘리트로만 이뤄진 무장 조직이 아니다. 헤즈볼라는 지방 조직들과 여러 직능 단체, 노동조합에도 대표들이 있는 대중 운동이다. 따라서 헤즈볼라는 조만간 저항 능력을 회복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공격은 현재 레바논에서 광범한 단결의 정서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고 헤즈볼라는 다시금 그 단결의 중심에 놓이게 됐다. 레바논에서 이스라엘의 침공에 맞선 저항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기 때문이다.

헤즈볼라를 중심으로 레바논에서 저항이 재개되므로 우리는 그들의 저항을 서슴없이 지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내 평화주의자들은 그저 확전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에서 멈추곤 한다. 그런 입장은 이미 확전이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운동을 무기력하게 할 뿐이다.

소위 국제 사회의 중재에 헛되이 기대를 걸어서도 안 된다.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사기를 잃지 않으려면 이스라엘의 침공을 분명하게 규탄해야 할 뿐 아니라 심지어 헤즈볼라의 저항을 지지하는 쪽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2006년 헤즈볼라 깃발을 들고 이스라엘의 패배를 기뻐하는 레바논 사람들 ⓒ출처 가이 스몰만

헤즈볼라 전략의 한계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위해서는 헤즈볼라의 정치를 넘어서는 정치가 필요하다.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의 침공을 거듭 물리친 역사가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이스라엘의 공격이 거듭되는 현실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는 것을 반영한다.

사실, 헤즈볼라는 지난해 10월 7일 전쟁이 시작된 이래 매우 제한적인 수준의 공격만을 이스라엘에 가했다. 이스라엘과의 전면전을 촉발하지 않는 수준으로 공격의 수위를 조절한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헤즈볼라는 이스라엘군과의 지상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런 자기제한적인 행동은 헤즈볼라가 레바논의 기존 사회 체제에 타협하고 레바논 국가의 중요한 일부가 되면서 생긴 제약에서 비롯한다. 즉, 헤즈볼라는 이스라엘과의 전면전이 레바논 자본주의에 미칠 파장을 우려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 헤즈볼라는 신흥 시아파 상층 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이 됐다. 그러면서 레바논의 기존 체제에 도전하기보다는 그 체제 내에서 이들의 입지를 확보하는 방향을 추구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헤즈볼라가 행한 타협과 후퇴는 이스라엘에 맞선 저항 조직 역할과 충돌을 빚었다.

예컨대, 헤즈볼라는 레바논의 종파별 권력 안배 시스템을 받아들이면서 레바논 내 팔레스타인 난민의 시민권을 인정하는 문제에서 회피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 헤즈볼라는 기존 레바논 정치 시스템 내의 친서방 세력과 동맹을 맺기도 했다. 헤즈볼라는 사우디와 연줄이 있는 친서방 백만장자 하리리의 세력과 베이루트에서 선거 동맹을 맺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헤즈볼라를 패퇴시켜서 레바논 남부를 자신이 장악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 자들과의 거래는 오히려 저항을 제약하고 대중적 지지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냈다.

헤즈볼라는 그런 자들이 추진하는 온갖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을 반대하지 않았다.

대중의 삶이 계속 악화되고, 레바논의 기존 정치 시스템에 도전하는 운동들이 벌어졌을 때, 헤즈볼라는 그 운동과 거리를 두거나, 정부를 대신해 그 운동을 탄압하기까지 했다.

후퇴는 레바논 내에서뿐 아니라 레바논 밖에서도 벌어졌다. 이것은 헤즈볼라가 이란과 시리아의 지원에 의존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런 의존 때문에 헤즈볼라는 두 국가의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길을 걸었다.

그것의 문제점이 가장 두드러졌던 사례는 바로 시리아 혁명이었다. 그 혁명이 촉발한 내전에서 헤즈볼라는 이란을 대리해 아사드 독재 정권을 보호하는 구실을 했다.

시리아 혁명은 2010년 말에 시작된 아랍 혁명 과정의 일부였다. 그 혁명은 잇달아 중동의 정권들을 무너뜨리거나 위협해, 중동 지배자들을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이는 팔레스타인 해방의 획기적인 전망을 여는 사건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식민 지배를 가능케 하는 미국의 지원과 친서방 아랍 정권들로 이루어진 제국주의적 네트워크에 치명타를 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랍 혁명은 결국 패배했고, 시리아 혁명의 패배는 아랍 혁명 과정이 패배로 접어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결국 헤즈볼라는 아랍 혁명의 거대한 가능성을 좌절시키는 데 기여한 것이다.

또 다른 최근 사례는 지난해 10월 7일 이후 헤즈볼라가 자기제한적인 공격만을 전개한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과의 전면전을 한사코 피하려는 이란의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이란 자본주의의 안위를 가장 우선하는 이란 정권

이란에 관해 말하자면, 이란은 ‘저항의 축’의 지도자를 자처하지만 자신들의 정권과 이란 자본주의를 지키는 데 전전긍긍하고 있다. 하마스 지도자 하니예가 이란의 수도에서 암살된 지 두 달이 지나는 동안, 이란은 자신의 동맹·대리 세력들에게 무기를 지원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아 왔다. 이스라엘이 나스랄라를 살해하고 레바논을 침공하고 나서야 이란은 제한적인 대응에 나섰다.

사실 이란은 오히려 이 국면을 이용해 미국과 핵 협상을 체결하는 것에 관심이 더 많다.

물론 이스라엘의 계속된 공격으로 결국 이란이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돼 전쟁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이스라엘의 패배를 바라야 할 것이다. 그것이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에 타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란의 행보는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에 일격을 가하기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이란 정권을 결코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란 정권의 우선 순위는 이란 국가에 있지, 반제국주의·반시온주의 저항의 이익에 있지 않다.

10월 4일 연설하는 이란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 ⓒ출처 ABNA24

팔레스타인 해방은 어떻게 가능한가?

앞서 얘기한 숱한 난점들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에 맞선 저항을 레바논에서 수행하는 조직이라는 역사적 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그 저항을 지지하고 승리하기를 바라야 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위해서는 헤즈볼라의 정치를 넘어서는 정치가 필요하다.

헤즈볼라의 군사적 행동은 대중 운동으로 성취된 것이다. 헤즈볼라의 한계는 그런 대중 운동이 레바논 국가와 다른 아랍 정권들에 맞서서도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보지 않는 데 있다.

이와 관련해 전쟁과 혁명의 상관관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전쟁은 무시무시한 일이지만 동시에 사회 격변을 자극하기도 한다.

중동의 역사는 이를 거듭 입증해 왔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이어진 제1차 중동 전쟁에서 아랍 정권들이 보인 지리멸렬한 대응은 이집트 나세르의 쿠데타와 아랍 민족주의의 물결로 이어졌다. 1956년 수에즈 위기가 촉발한 제2차 중동 전쟁은 이라크에서 왕정을 타도한 혁명으로 이어졌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스라엘의 확전은 서방에 협력하는 주변 아랍 국가들의 불안정을 더욱 키울 것이다. 전쟁이 커진다면 그 정권들은 더 첨예한 시험대에 오를 것이고, 이는 그 정권들에 맞선 아랍 노동자·빈민 대중의 반란을 자극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반란은 이스라엘의 식민 지배를 지탱하는 중동의 제국주의 네트워크를 무너뜨릴 수 있다.

이런 전망은 한낱 몽상이 아니다. 아랍 혁명은 이런 전망의 현실성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물론, 그 혁명의 패배가 보여 주듯이 그 과정은 자동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 과정이 성공하려면 지난 경험에서 교훈을 도출하고 중동에서 그런 가능성을 의식적으로 현실화하려 애쓰는 정치 세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아랍 세계에서 그런 반란을 고무할 수 있도록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우리가 속한 곳에서 굳건히 건설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