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전쟁과 혁명의 그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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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드 정권의 몰락이 중동에 미칠 파장은 무엇인가?
아사드 정권 붕괴의 후폭풍은 오래갈 것이다.
물론, 즉각적인 승자와 패자도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튀르키예, 이란, 걸프 국가, 이스라엘 등 역내 강국 간 세력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튀르키예 지배계급은 상당한 득을 얻을 듯하다. 시리아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자국의 수많은 시리아 난민을 시리아로 돌려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튀르키예 기업들은 시리아 도시 재건으로 이익을 볼 수도 있다.
시리아 내 쿠르드인 세력을 제압하려는 튀르키예 지도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은 자신이 통제하는 무장 조직 시리아국민군(SNA) 등을 동원해 쿠르드족이 이끄는 시리아민주군(SDF)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사드 몰락 후 시리아 북동부의 쿠르드인 자치정부는 시리아 혁명 깃발을 게양했지만 튀르키예가 지원하는 세력과 전투를 벌이는 등, 긴장이 여전히 높다.
한편, 현 상황은 이란 지배자들에게 손실이다. 이란 지배자들은 시리아를 자국 영향권의 핵심적 일부로 여겨 왔다.
러시아 또한 입지가 약화됐다. 한편, 미국 대통령 취임을 앞둔 트럼프는 시리아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역내 강국, 글로벌 열강 간 세력 균형의 변화가 유일한 결과는 아니다. 시리아인들이 아사드 정권의 감옥에 갇힌 일가친척을 구출하러 달려가고 독재자 동상을 무너뜨리는 광경은 중동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집트의 주류 언론들은 테러·혼돈·내전의 온상을 피하려면 시리아와 같은 변화를 꿈도 꾸지 말라는 메시지를 연일 내놓고 있다. 아사드 정권의 몰락을 실내에서 축하하던 시리아 난민 십여 명이 이집트 보안 당국에 의해 체포되기도 했다. 이집트에는 시리아 난민이 200만 명 가까이 있다.
독재자의 몰락의 여파를 두려워하는 정권은 이집트 정권만이 아니다. 요르단 정권도 불안정성이 커졌다. 최대 야당 세력인 무슬림형제단의 영향력이 커지고, 심지어 왕정에 맞선 쿠데타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시리아의 새 정권을 장악한 세력이 이슬람주의자들이라는 것도 한 요소다. 중동의 이슬람주의 운동이 지난 수년간 심각한 패배를 겪어 왔기 때문이다.
아사드의 몰락은 친팔레스타인·반제국주의 세력의 패배인가?
이란이 주도하는 ‘저항의 축’을 지지하는 것은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는 데서 항상 불충분한 전략이었다.
그 전략은 모순되는 요소들을 결합시켰다. 예컨대 그 전략은 레바논의 저항 세력인 헤즈볼라를 중동 정치 질서의 일부로 만들었다.
헤즈볼라는 2011년 시리아 혁명 때 아사드 정권을 지원했다. 이는 시리아 민중에게 고통을 줬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심각한 정치적 타격이 됐다.
아사드의 몰락은 대중 운동이 아닌 독재자에게 의지하는 것의 문제점을 보여 준다. 징집병들은 아사드를 저버렸고 아사드 정권은 아무런 지지 기반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아사드 정권의 실태를 헤즈볼라, 하마스, 성장하고 있는 서안지구 내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들의 격렬한 저항과 비교해 보라.
상황을 군사적 차원에서만 전망해서도 안 된다. 아사드의 몰락은 팔레스타인 해방의 획기적인 전망을 제시했던 혁명 물결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바로 2010년 말에 시작된 아랍 혁명이다.
그 혁명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가능케 하는 조건을 위협했다. 예컨대 이집트 혁명은 가자지구 봉쇄에 불가결한 협조를 제공하던 이집트 군사 독재를 무너뜨렸다.
한편, 시리아의 새 정권이 이스라엘에 우호적일지는 결정돼 있지 않다. 물론, 현재 새 정권은 충돌을 피하려 한다. 그러나 아사드 몰락 직후 이스라엘이 감행한 공격은 식민 정착자 국가인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한 평화는 불가능할 것임을 계속 상기시킨다. 아사드의 몰락으로 시리아 내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더 자유롭게 투쟁을 조직할 여지가 생겨났다는 것도 한 요소다.
시리아 내 팔레스타인인들은 시리아 혁명 때 아사드 정권에 반기를 들었다가 무자비한 보복을 당했다. 당시 시리아 내 최대 팔레스타인 난민촌인 야르무크 난민촌이 아사드 정권의 군대에 의해 초토화돼 많은 팔레스타인인이 목숨을 잃었다.
하마스가 아사드 정권의 붕괴를 신속하게 환영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13년 전 시리아 혁명 때에도 하마스 지도부는 혁명 지지 입장을 표했다. 그 때문에 시리아 정권에게서 받던 상당한 지원이 끊기는 것을 감수하면서 말이다.
아랍 혁명이란 무엇이고 왜 성공하지 못했는가?
2011년의 이집트 혁명은 당시 중동 전역을 휩쓴 민중 봉기의 물결의 일부였다. 그 물결은 튀니지에서 시작돼 이집트를 거쳐 시리아, 예멘, 바레인, 리비아로 번졌다.
초기에는 수많은 사람이 거리 시위와 파업에 참여해 ‘빵, 자유, 정의’를 요구했다. 대규모 시위와 광장 점거는 아랍 혁명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됐다. 그러나 혁명 과정에서 결정적 구실을 한 것은 파업이었다.
튀니지에서는 광역 수준의 총파업을 계기로 도시 청년 실업자들의 반란이 혁명으로 확대됐다.
이집트 독재자 무바라크는 운수·보건·공무원·철도·통신 부문 등의 파업 물결 속에서 타도됐다.
2011년 시리아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드 정권에 맞섰다. 정부군이 물러난 곳에서 시위대가 정부 기능의 일부를 장악한 ‘지역 조정 위원회’가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리아에서는 중대한 파업 물결이 일지 않은 탓에 아사드 정권이 수도에서 장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사드의 반혁명은 시리아인들에게 재앙이었다. 수많은 시리아인이 내전으로 난민이 되거나 사망했고, 오랜 세월 탄압과 고초를 견뎌야 했다.
다른 곳에서도 혁명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집트처럼 반혁명이 몰아친 곳도 있다.
그 과정은 상이했지만 공통된 요소도 있었다.
대중적 저항은 독재자를 타도하거나 일정한 개혁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활동가들은 많은 경우 옛 정권의 기구들을 해체하기보다는 유지하려 했다. 이것은 서방 국가들이 제안하는 ‘민주주의 이행’ 모델을 따른 것이었다.
이것은 거리와 일터에서 제기된 사회적 요구들을 위한 과감한 변화를 기피하고 기존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지속하는 것으로도 이어졌다. 이는 거리로 나온 노동자·빈민의 동력을 약화시켰다.
이집트 혁명으로 등장한 무슬림형제단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따른 것이 그런 사례다. 또, 무슬림형제단 정부는 독재 정권이 이스라엘과 맺은 평화 조약을 파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무슬림형제단 정부가 나머지 국가 기관들과 정면 충돌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기존 국가를 고스란히 존치하려는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노선은 결국 반혁명에 무기를 넘겨 줬을 뿐이다.
현재 시리아 대중 저항의 가능성은?
시리아의 새 정권은 아직 지지 기반을 구축하지 못했다.
많은 시리아인은 정권을 잡은 하이아트 타흐리르 알샴(HTS)을 아사드 정권을 무너뜨린 세력으로서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HTS의 권위주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성격과 종파 간 분열에 일조한 전력에 우려하는 시리아인들도 있다.
그렇기에 사회적 투쟁이 관건이 될 것이다. 빈곤한 대다수 시리아인들이 스스로를 조직화할 기회를 잡고, 재건 과정에서 부의 재분배를 새 정권에 강제할 수 있을 것인가?
대중적 조직화가 부활할 공산이 큰 여러 쟁점들이 있다. 아사드 정권에 의해 실종·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정의를 되찾는 문제, 사회적 요구를 둘러싼 투쟁, 이스라엘의 침략에 맞선 저항과 팔레스타인과의 연대가 바로 그런 쟁점들이다. 쿠르드인의 자결권 지지와 모든 형태의 차별에 맞선 투쟁도 그런 쟁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