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의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약속, 어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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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정부가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이 조지아주의 현대차·LG엔솔 공장 건설 현장을 습격한 일에 대해 사과 한마디 하지 않더니 한국 정부의 3,500억 달러(약 480조 원) 대미 투자 약속을 ‘직접투자’로 시행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에 따라 한미 관세 협상은 계속 지연되고 있다.
7월 30일 한국과 미국은 관세 협상 ‘타결’을 발표하면서, 미국이 한국에 부과하는 관세를 25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낮추는 대신에 한국은 대미 투자 3,500억 달러를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협상 타결 발표 때에도, 또 그 후 진행된 세부 협상에서도 한미 간에 이견은 계속됐다. 특히 대미 투자의 구성, 투자 방식, 이익 배분 등이 동상이몽이었다. 한국 정부는 “3,500억 달러 대부분이 보증과 대출 성격이고, 현금은 극히 일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미국 측은 전액을 “현금으로 출자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미국 상무부장관 하워드 러트닉은 “한국이 일본 모델을 수용하지 않으면 25퍼센트 관세를 내야 한다”며 공개적으로 압박했다. 미국 정부가 9월 4일에 발표한 대일 관세 협상 관련 행정명령은, 대일본 관세를 15퍼센트로 낮추는 대신에 “일본 정부가 미국에 5,500억 달러를 투자하는 데 합의했다. 이 투자는 미국 정부가 (투자처를) 선정할 것”이라고 규정했다.

미국 정부가 한국에게도 “일본 모델”을 제시하며 막대한 현금 투자를 요구하자 한국 정부는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미국 요구를 수용할 시 금융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로이터〉), “만약 내가 거기[미국 측의 요구]에 동의했다면 내가 탄핵됐을 것”(〈타임〉)이라고 말했다.
3,500억 달러는 올해 예산(673조 원)의 70퍼센트, 외환보유액(약 4,100억 달러)의 85퍼센트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한국은행은 대미 투자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면 산업 공동화, 고용 위축, 인재 유출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래서 차라리 대미 관세 25퍼센트를 두들겨 맞고 수출 기업들에 보조금을 주는 게 더 이득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한국 정부는 대미 투자의 조건으로 일본과 같은 ‘무제한 통화 스와프’를 요구하고 있다. 통화 스와프는 자국 화폐를 상대국에 맡긴 뒤 미리 정해 둔 환율로 상대국 통화를 빌려오는 외환 거래 방식이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 유로존과 영국, 일본, 스위스, 캐나다와만 무제한 통화 스와프를 맺고 있어서 한국이 추가될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투자 지속
그러나 이재명 정부는 미국과의 협력, 대미 투자를 중단할 생각이 없다. 〈타임〉은 이재명 대통령과의 인터뷰 기사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세계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 유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대미 관세 협상을 담당하는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장관도 이렇게 해명했다. “밀고 당기는 과정이라고 봐 주면 좋겠다.” “3,500억 달러를 미국이 다 가져가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구조는 아니다.”
김정관 장관은 미일 합의에 대해서도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이 “미국과 협상해서 고지를 먼저 선점하겠다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미국 정부의 투자 요구를 일본 정부가 거부할 수 있고, 일본 기업들을 우대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정부도 “일본 모델”과 유사한 합의를 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이 체결한 것이 양해각서(MOU)라서 이를 실현하는 데 노력하는 것 정도이지 법적 구속력은 없다고도 덧붙였다.
김 장관은 한미 관세 협상을 파기하고 25퍼센트 관세를 맞자는 ‘협상 회의론’을 반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관세 협상은 앞으로 미국과의 관계는 물론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다.” 당장 트럼프 정부와의 관계뿐 아니라 앞으로 “한국의 위상”을 위해 관세 협상과 대미 투자를 진행하겠다고 한다.
한국의 대기업들도 대규모 대미 투자를 지속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예컨대 현대차는 한미 관세 협상, 조지아 현대차 공장 습격과 노동자 집단 구금 사건이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미국 내 투자 규모를 기존의 11조 6,000억 원에서 15조 3,000억 원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HD현대중공업도 한화오션에 이어 미국 조선소 인수를 준비 중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미국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전략으로 미국 해군 시장에 진출해 2035년까지 해마다 22억 달러(약 3조 원) 매출을 목표로 잡았다고 한다.
이처럼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트럼프 정부의 강요에 곤혹스러워하면서도, 대미 투자를 늘리고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 지배계급은 단지 트럼프 정부와의 관계나 미국 시장 점유율 문제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협력해야 세계 시장에서도 우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미국의 압박 강화로 커지는 부담을 노동계급에 전가하려고 할 것이다. 이미 미국의 관세로 타격을 입고 있는 철강 산업을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는 ‘K스틸법’이 발의됨과 동시에, 철강 노동자들은 구조조정(노동조건과 고용 형태의 악화를 수반할 것임) 압박을 받고 있다. 대미 25퍼센트 관세가 지속되면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도 압박을 받을 것이다.
애국이 아니라 계급투쟁
한국의 상당수 언론들은 “패전국에나 할 요구”라며 미국 비판 보도를 쏟아냈다. 한국 대기업들의 신문 〈한국경제〉도 사설에서 이렇게 비판했다. “동맹국 미국이 어쩌다 이렇게 돈만 밝히는 나라가 돼 가는지 보수·진보를 떠나 혀를 차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이렇게 보수 측에서조차 불만이 제기되자 최근 한국 좌파 일부는 대미 투자 철회론을 제기하며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예컨대 진보당은 미 대사관 앞 1인 시위와 정당연설회를 통해 “대미 투자 철회 선언으로 약탈적 협상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재연 진보당 대표는 조지아주에서 발생한 한국 노동자 구금 사태를 언급하며 “미국은 한국을 동등한 파트너로 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수출 시장 다변화와 주권 수호로 맞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진보연대, 민주노총, 전농 등이 주도하는 ‘트럼프 저지행동(준)’은 ‘트럼프 사과, 대미 투자 전면 재검토’를 요구했다.
민주노총도 대미 투자 철회 서명 운동과 기자회견, 선전전, 집회 등을 진행하고 있다.

이들은 미국이 관세협상에서 ‘약탈적 요구’를 할 수 있는 이유가 한미 전쟁동맹이라는 ‘종속’ 때문이라며, 이참에 미국의 약탈적 대미 투자 요구와 종속적인 한미동맹 모두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위계적으로 이뤄진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강대국들이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경제적·군사적 힘을 사용하는 것은 일상사다. 가령 미국은 미국 중심의 경제 질서를 유지하려고 유럽, 일본 같은 전통적 동맹국들에게도 압박을 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국가들이 미국의 종속국인 것은 아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미국, 중국, 일본, 유럽 같은 강대국의 대열에는 끼지 못하지만, 경제 규모와 군사력, 기술력이 만만찮은 중간 규모 강국이다.
오늘날 한국 지배계급은 트럼프 정부의 압박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미국 제국주의에 협력하고 있다. 이런 협력이 장기적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여 세계 곳곳에서 한국 기업들이 사업을 벌이기에도 유리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재명 정부도 미국과의 군사훈련, 대미 관세협상, 국방비 증액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물론 트럼프 정부의 압박은 한국 기업들이 그동안 구축해 놓은 국제적 분업 구조의 일부를 재편해야 하는 부담을 지우고 있다. 하지만 한국 지배계급은 그런 부담을 노동계급에 전가하며 국가경쟁력을 높이려 한다.
이런 때 좌파가 “주권 수호”나 “국익”을 내세워 이재명 정부를 응원하고 정부와 협력한다면 고통 전가에 맞서 노동계급의 조건을 방어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런 모순 속에서는 노동운동의 정치적 독립성이 훼손되고 저항이 무뎌지기 쉽다.
한국 좌파들은 트럼프 정부의 압박을 한국 노동계급에 전가하는 한국 정부와 기업들에 반대해야 한다. 그래야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억압 강화와 한반도 전쟁 위험 고조도 막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