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연설로 본 이재명 대통령의 모순:
한반도 평화공존을 말하지만 무게는 한미일 협력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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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현지 시각) 이재명 대통령은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한반도 평화공존을 위한 노력을 강조하며 각국의 지지를 당부했다. 한반도 문제를 놓고 그는 END, 즉 “교류(E), 관계 정상화(N), 비핵화(D)”를 중심으로 북한과 대화를 하겠다고 말했다.
실망스럽게도 그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았다. 트럼프 정부를 의식해 침묵한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북핵 문제의 단계적 해결을 주장했었다. 유엔 연설에 앞서 공개된 BBC 인터뷰에서 그는 미국 측과 북한 측이 북한의 핵무기 생산 동결에 합의한다면 동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일단 핵 동결을 일차 목표로 하고, 장기적으로 축소-폐기로 가자는 얘기였다.

그러자 여러 보수 언론들이 핵 동결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꼴이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문재인 정부의 통일부 장관이었던 김연철 인제대 교수도 북한의 핵무장을 인정하고 협상하는 것은 “지혜로운 대응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를 의식해 이재명은 유엔 연설에서 비핵화라는 목표를 다시 강조한 듯하다. 유엔총회 연설 전날 뉴욕에서 만난 한미일 외교장관들도 공동성명에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와 대북 제재 강화를 강조했다.
그렇지만 지금 북한 측은 비핵화를 위한 대화 제안에는 응하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30년 넘게 미국은 북한을 압박하며 핵 포기를 독촉하면서도, 평화협정 체결이나 전쟁연습 중단 등 북한의 상응하는 요구는 외면해 왔다. 남한도 미국과 계속 보조를 맞췄다. 그래서 북핵 협상은 늘 지지부진하다가 새로운 위기가 발생하며 중단되기 일쑤였다.
이제 북한은 핵무기를 갖고 있고 중국·러시아와 더 밀착하고 있다. 그런 북한이 미국의 확실한 ‘현찰’ 제시 없이는 협상에 열의 있게 나서지는 않을 것 같다.
대화를 바라는 입장에서 9월 24일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북한의 비핵화를 강조한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비핵화를 다시 강조해 버리면 BBC 인터뷰에서 동결로 일을 시작하자고 하는 대통령의 얘기는 뭉개지는 겁니다.”
정 전 장관은 “미국 눈치를 보는” 외교·안보 참모들이 대통령 주변에 너무 많아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지적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외교·안보 참모들을 그대로 놔두면 아마 남북 관계고, 한미 관계고, 대중 관계고 아무것도 못 할 겁니다.” 대통령을 둘러싼 “동맹파”들을 “자주파”로 갈아치워야 한다는 것이다.
좌파 측에서도 이에 공감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인적 교체가 이뤄지면 이재명 정부가 외교·안보 정책에서 모순된 행보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 주변의 참모들만을 탓할 수는 없다. 대통령으로서 이재명 스스로 국정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외교·안보 정책에서 이전 정부들의 미·일 제국주의 협력 노선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한국 자본주의는 미국 제국주의에의 협력 구조 속에서 성장해 왔고, 한국 국가는 그 구조의 능동적인 일부다. 친자본주의적인 이재명 정부는 그 역사와 구조를 거스를 의지와 능력이 없다.
이재명 대통령은 한미동맹 유지에 힘을 쏟으며 한일 관계에서도 위안부 합의,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을 “국가 간 약속”이라며 뒤집지 않겠다고 직접 말했다.
대북 정책에서도 “페이스 메이커”를 자처하며 이재명 대통령은 미국 측과 긴밀하게 공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이 남한과 절대 대화하려 하지 않아서, 이재명 대통령이 페이스 메이커 역할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애당초 그런 기조에 부응하는 인사들이 정부에 발탁됐다. 동맹파든, 자주파든 이재명 정부의 외교·안보 핵심 인사들은 전술적 이견이 있어도 모두 한미동맹을 우선시하는 자들이다.
대북 정책을 놓고 이재명 정부 안팎에서 설왕설래가 나오는 것은 그만큼 전보다 한반도 정세가 어려워졌음을 반영한다. 대화 재개의 조건을 마련하기가 더 힘든 것이다.
그 정세는 결정적으로 제국주의 강대국들인 미국과 중국의 쟁투가 좌우하고 있다. 그들에게 한반도는 훨씬 큰 장기판의 일부일 뿐이다.
그런 가운데 남·북한 정부들은 각기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관계를 강화하는 중이다. 22일 한미일 외교장관들은 연합훈련을 정기적으로 시행하고 남중국해 등의 해양 안보 문제에 체계적으로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반면 28일 베이징에서 열린 북·중 외교장관 회담에서 중국과 북한은 미국의 일방주의를 비판하며 지역과 국제 문제에서 조율을 강화하기로 약속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바람대로 북·미 대화가 재개돼도, 한반도 정세가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과 중국은 계속 쟁투를 벌일 것이고, 그 제국주의적 경쟁이 한반도를 지속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가 가장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문제는 APEC 회의를 계기로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나느냐는 문제보다 이재명 정부의 줄타기와 군비 증강 움직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