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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내란 청산과 극우 팔레스타인·중동 이재명 정부 이주민·난민 긴 글

개발도상국을 휩쓴 ‘Z세대’ 항쟁 물결

지난 9월 인도네시아의 시위대 ⓒ출처 Arah Juang

8월 말 인도네시아에서 대규모 항쟁이 분출해 프라보워 수비안토 연정을 위협했다. 그에 꼬리를 물듯 9월 초 네팔에서는 항쟁으로 정부가 붕괴했고, 필리핀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분출했다.

언론들은 이 반란들을 ‘아시아의 봄’, ‘Z세대 반란’이라고 묶여 묘사한다.

이런 규정에는 문제가 있다. 같은 아시아라고 하지만, 인도네시아와 네팔의 지리적 거리는 영국과 이란 사이보다 멀다. 그리고 영국과 이란이 그렇듯 인도네시아와 네팔은 같은 경제권도, 문화권도 아니며, 정치 지형도 서로 상당히 다르다.

이번 반란 물결은 아시아뿐 아니라 아프리카(케냐·모로코·마다가스카르 등)와 남아메리카(페루 등)까지 세 대륙에 걸쳐 있다.

‘Z세대 반란’이라는 규정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보면 이 반란들을 ‘기성 세대’에 반발하는 청년(‘Z세대’)들이 SNS에서 선동돼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치부하게 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윤석열 퇴진 운동에 청년들이 대거 참가했다고 해서 청년들의 저항이 그 집단 고유의 불만에서만 비롯하는 것이 아님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올여름 항쟁들은 민중 항쟁이었다. 그런데 청년들의 참여가 두드러진 이유 하나는 그 나라 인구에서 청년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은 인구 절반이 30세 미만이고, 대부분 도시에 거주한다. 케냐는 청년층 비율이 75퍼센트에 이른다.

그 청년들의 처지는 놀랄 만큼 유사하다. 그들은 더는 양질의 일자리를 주지 않는 경제, 더는 그들의 동의를 애써 구하지 않는 민주주의의 후퇴에서, 그들에겐 책임이 전혀 없는 위기의 대가를 치르고 산다.

거리로 나온 청년들의 처지는 놀랄 만큼 유사하다. 지난 9월 필리핀 ⓒ출처 Wikimedia Commons

21세기 초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자국 경제를 수출용 원자재 생산 중심으로 재편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계급이 대거 형성됐고, 도시로의 유입도 크게 늘었다. 21세기 첫 20년 동안 전 세계 임금 노동자는 1.5배로(12억 명→18억 명) 늘었다. 새로 도시로 유입된 인구는 14억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양질의 일자리는 별로 생기지 않아, 저질 일자리에 종사하거나 아예 실업 상태인 노동계급이 양산된다.

특히, 서구의 경기 침체와 중국 경제 성장 둔화의 타격으로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경제 위기에 빠졌다. 각국 정부가 위기에 긴축과 복지 삭감으로 대응하며 서민 전체의 생활고가 심각해졌다.

이는 2019년 세계적 반란 물결의 핵심 배경이기도 했다.(관련 기사 본지 310호 ‘세계적 투쟁의 새 물결’)

서민 생활고는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전 세계 식량 가격(이후 생활 물가 전반)이 급등하며 더 심각해졌다.

게다가 코로나19 팬데믹과 뒤이은 세계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개발도상국 경제들이 큰 충격을 받고, 심지어 산업 부문이 재편되기도 했다. 트럼프의 관세 폭탄이 가하는 충격은 이런 파장을 더한층 키울 것이다.

충격파

이런 충격파의 결과 하나는 실업률 폭등이었다. 이에 많은 청년들은 그간 배우고 익힌 기술로 얻을 수 있는 일자리 자체가 사라지고 불안정한 일자리로 연명해야 하는 처지에 직면했다.

인도네시아 청년 아판 쿠르니아완은 그런 청년의 전형이었다. 8월 28일 시위 진압 경찰이 아판을 차로 깔아뭉개 죽일 때(그의 죽음은 항쟁 폭발의 계기가 됐다) 그는 오토바이 택시에 태울 승객을 찾던 중이었다.

생전에 아판은 수마트라에서 자카르타로 가족과 함께 상경해 비좁은 집을 임대해 살았다. 생계를 부지하기 위해 아판은 학업을 중도 포기했고, 그의 아버지와 함께 일용직·플랫폼 노동에 종사하며 하루 최대 18시간씩 일했다.

그들의 처지가 특이했던 것은 아니다. 인도네시아 전체 노동 인구의 56퍼센트가 그런 불안정 노동에 종사한다.

아프리카의 경우 불안정 노동 비율은 전체 노동 인구의 85퍼센트에 이른다.

케냐도 그런 나라의 하나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케냐 경제는 세계 원자재 시장 불안정과 갈마들며 2013년부터 위기에 빠졌다. 실업률이 계속 높아졌는데, 특히 코로나19를 거치며 케냐 실업률은 사상 최대로 치솟았다.

정부는 인프라 투자를 통한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지만, 약속했던 투자는 이뤄지지 않았다. 할당된 재정 상당 부분이 부패로 증발했다. 재정 위기에 처한 정부가 복지 삭감으로 대응하자 서민 생활고가 더한층 심해졌다.

지난해 케냐 정부는 국제통화기금 IMF에 긴급 대출을 신청했다. 그러나 그 대출에는 생필품에 대한 증세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대출 협상은 올해 5월 최종 결렬됐지만, 정부는 곧장 빵·식용유 등 생필품에 16~25퍼센트의 세금을 부과하는 ‘재정 건전화’ 법안을 의회에 상정했다.

대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시위대가 정부 청사를 습격했고, 국회의사당이 불탔다. 올해 반란 물결의 첫 타자였다.

불평등과 부패

케냐와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 항쟁은 대개 불안정한 처지의 미조직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분노를 폭발하는 형태로 등장했다. 소요와, 권력자들의 집과 재산에 대한 방화 등이 벌어지는 것은 케냐뿐 아니라 네팔 등에서도 보인 모습이다.

분노가 그토록 폭발적인 형태를 띤 데에는 막대한 불평등과 권력층의 부패도 영향이 있었다.

케냐 인구의 39퍼센트가 극빈층인 반면 상위 1퍼센트가 전체 부의 42퍼센트를 차지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가장 부유한 4명의 재산이 하위 1억 명의 재산을 합한 것보다 많다. 네팔에서는 권력층의 자녀 ‘네포 키즈’들이 부를 과시하는 행태가 커다란 분노를 샀다.

권력층의 부와 대중의 고난 사이의 격차는, 사리사욕 채우기에 여념 없는 권력층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국회의원들이 최저임금의 열 배에 이르는 고액의 주택 수당을 지급받고 있다는 것이 폭로되며 시위가 시작됐다.

필리핀에서도 올여름 홍수와 태풍이 곳곳을 강타한 후, 정부가 약속했던 재난 방지 대책이 뇌물과 정경유착으로 점철된 빈껍데기에 불과했음이 폭로되며 시위가 시작됐다. 이 시위는 기성 정치를 장악하고 신자유주의적 긴축 정책을 펴 온 권력층 전반에 대한 항의로 확대됐다.

필리핀은 국제투명성기구(TI)가 매긴 부패 청정도 순위(CPI, 2024년)에서 180개국 중 114위로 중하위권이다. 케냐는 121위, 네팔은 107위, 인도네시아와 모로코는 99위다.

부패가 만연한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고통받게 만든다. 그리하여 권력층의 통치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저항이 분출하는 계기가 된다.

예컨대 모로코에서는 의료 서비스를 받으려면 ‘뒷돈’을 내야 하기 십상이다(이해할 만하게도 환자들은 대개 그 돈을 낸다). 그 배경에는 국가의 의료 투자가 턱없이 부족해 시설이 부족하고 의료 노동자들의 저임금에 시달리는 현실이 놓여 있다. 상당수 의료 노동자들은 그런 돈을 받아 소득을 벌충한다.

그래서 대개 반부패 요구는 경제적 요구와 결합돼 제기되곤 한다. 모로코 항쟁에서 등장한 “민중은 원한다: 부패 종식!” 구호는 부패가 만연한 사회 전체를 뜯어 고쳐야 한다는 열망의 표현이었다.

순식간에 정부를 무너뜨린 네팔의 항쟁

패턴

현재 벌어지는 항쟁들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또 다른 패턴은, 거리 시위가 강력하게 분출하면서 민주주의 확대 요구가 제기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민주주의 확대는 보통선거권이나 표현의 자유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런 권리는 항쟁이 일어난 거의 모든 나라에서 어느 정도 보장돼 있다.

그보다는, 각국 정부들이 여러 해 동안 권위주의적 조처를 취하고 민주적 권리를 공격해 온 것의 반영이다. 그들은 위기가 심화하면서 동의에 기반한 통치가 어려워지자 강압에 더 기대 온 것이다.(관련 기사 본지 555호 ‘헤게모니의 위기 ─ 트럼프, 동의, 강압’)

이번에 인도네시아에서 항쟁에 직면한 수비안토 정부는, 통치 안정성을 강화하기 위해 군부에 더 많은 권한을 주고 군부의 정치 참여 기회를 늘려 왔다.

이는 사반세기 전 항쟁으로 타도된 군부 독재 수하트로 정권의 철권 통치에 대한 기억과 결합되며 대중의 큰 분노를 자아냈다. 프라보워 수비안토가 수하르토의 사위로 그 아래서 군 사령관을 지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번 항쟁에 직면해서도 수비안토 정부는 군대를 투입해 시위를 억눌렀다.

강도 높은 탄압은 지금까지 분출한 반란들이 금세 정체돼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는 패턴을 보이는 한 이유다. 그러나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변화를 이루기 위해 운동을 지속·전진시키는 것보다 사회 상층부 인물 몇몇을 교체하는 것을 가장 중시하는 개혁주의 전략은 항쟁에 잠재된 정치적 지평을 제약한다.

필리핀에서 그런 전략은 온건 개혁 정당인(한때 마오주의 정당이었다) 시민행동당을 통해 제기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SNS 인플루언서들과 자유주의 세력이 ‘17+8 사회 대개혁’ 요구를 중심으로 운동의 지도력을 장악하는 식으로 제기되고 있다.

여기서 2024년 방글라데시의 사례를 살펴볼 만하다. 당시 실업과 부패, 특권층의 횡포에 항의해 반란에 나선 방글라데시 민중은 독재자 하시나를 타도하는 놀라운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그 항쟁을 지도한 학생들에게는 중요한 정치적 약점이 있었다. 바로 야당 방글라데시국민당(BNP)과 군부와의 거래를 믿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시나의 잔당 아와미연맹을 숙정하는 과제, 또 권력층이 지배하는 정치 체제에 맞서는 과제를 자유주의 경제학자 유누스가 이끄는 임시정부에 내맡겼다. 운동은 동원 해제됐다.

이를 기회 삼아 군부가 사태에 개입했다. 그들은 BNP와 협력해 항쟁의 충격파를 되돌렸다.

2026년 치러질 선거에서 BNP의 집권이 유력하다. 하지만 BNP는 집권 시 반대파 활동가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억압적 통치를 한 역사가 있다. 지난해 항쟁에서 유명해진 학생 운동가들이 반부패 신당 창당을 준비하고 있지만, 당장 집권에 도전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어떤 정치를 추구할지도 미지수다.

지난해 방글라데시 항쟁은 독재자를 몰아냈지만 군부의 권력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출처 Rayhan9d / Wikicommons

많은 개발도상국 나라들에서 노동계급은 폭발성이 있고, 경제에서 차지하는 구실과 그에 기반한 잠재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형성된 지 얼마 되지 않고 정치적 경험이 적다.

그런 노동자들이 소박한 개혁(그나마도 위기 시기에 쉽게 되돌려질)을 얻어낸 이후 기성 질서 자체에 도전하는 방향으로 투쟁을 발전시킬 수 있으려면, 노동계급 자기 행동과 운동의 전진·급진화를 중심에 두고 노동자들과 의미 있는 연계를 맺는 혁명적 좌파가 그 투쟁 속에서 건설돼야 한다.

그런 좌파들은, 한때 대중의 기대를 모았으나 잘못된 전략 때문에 그들 자신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며 대중의 분노를 산 네팔 마오주의자들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기도 해야 한다.

기회는 있다. 이번 항쟁들의 계기가 된 사회적 위기와 노동계급의 고난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그들이 저항할 기반 자체가 분쇄되지도 않았다. 그 노동자들이 다시 저항에 나설 때 더 전진하게 하려면 좌파는 지금부터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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