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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극우 팔레스타인·중동 이재명 정부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긴 글

헤게모니의 위기 ─ 트럼프, 동의, 강압

안토니오 그람시는 지배계급이 자신의 영향력을 어떻게 유지하는지를 이론화했다.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 기자 토머스 포스터는, 그람시의 사상이 트럼프의 권위주의로의 전환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됨을 밝힌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파시즘의 병법서에서 전술을 그대로 가져다 쓰며 오른쪽으로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다.

최근 트럼프는 수도 워싱턴 DC에 주방위군을 투입하고 행정명령으로 그곳의 경찰력을 장악했다. 트럼프는 워싱턴 DC가 “무법천지”라고 했지만, 워싱턴 DC의 강력 범죄율은 지난 30년을 통틀어 최저다.

트럼프 정부하에서 권위주의의 징후는 차고 넘친다. 트럼프 정부는 대대적인 연방정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공무원을 더 쉽게 해고하려고 고용 안정 제도를 해체하고 불충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해고했다.

트럼프 정부는 대대적으로 이민자를 잡아들였다. 이민 통제 관리들이 사람들을 납치해 타국의 수용 시설로 추방했다. 이 대규모 추방 정책은 미국 시민권자도 대상으로 삼기에 어느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트럼프는 미국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위기 즉 지배계급의 권위의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출처 백악관

트럼프 정부는 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판사들을 대놓고 비난하고, 적법한 절차 없이 시위대를 체포하고, 트럼프의 뜻에 복종하지 않는 대학 당국과 문화 기관과 언론을 겁박했다.

트럼프가 벌이는 일들은 미국이 겪고 있는 더 광범한 위기, 즉 헤게모니 위기의 증상이다. 그런데 “헤게모니 위기”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헤게모니 위기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사회의 한 부분이 나머지 부분들에 어떻게 권위와 지도력과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보이려고 헤게모니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헤게모니 위기라는 것은 지배계급의 권위의 위기인 것이다.

그람시는 선출된 기성 대표자들이 그들이 대표한다는 사람들에게서 더는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할 때 헤게모니 위기가 발생한다고 했다. 그람시의 표현을 빌리면, “대표하는 자와 대표되는 자들”의 갈등이다.

이런 갈등은 정부 전반에 대한 대중의 신뢰도가 역대 최저에 가까운 데서도 드러난다. 평범한 사람들은 기성 정치인들이 대중의 이익을 더는 진심으로 위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그러면서 노동계급 사람들과 정치인들 사이의 균열이 깊어지고 있다.

“대표하는 자와 대표되는 자들”의 갈등은 2024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주류 보수 후보들이 외면받은 데서도 드러난다. 어느 누구도 트럼프의 입지를 위협하지 못했으며, 트럼프의 극우 정치가 공화당의 대세가 됐다.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민주당 후보 카멀라 해리스가 내세우는 진절머리 나는 자유주의를 거부했다. 그 결과 휘발성이 큰 상황이 펼쳐졌다.

그람시가 지적하듯 그런 상황에서는 “폭력적 해법이 제시되고, 알려지지 않았던 세력들이 활동할” 기회가 열린다. 그리고 “신의(神意)를 지닌 듯한 카리스마적 인물이 이를 대표한다.” 그리고 트럼프가 정확히 그런 인물이다.

그렇다면 헤게모니 위기를 낳는 요인은 무엇인가?

한 요인은 지배계급이 “광범위한 대중의 동의를 얻거나 그 동의를 우격다짐으로 끌어낸 몇몇 중대한 정치적 과업들”을 이루는 데에 실패한 것이다. 그런 실패의 사례는 미국 정치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일례로 ‘아메리칸 드림’ 신화가 있다. 안정된 일자리를 누리고 주택을 소유하고 생활 수준이 높아질 것이라는 약속 말이다. 이 약속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짧은 기간 동안 주로 백인 노동계급 사람들에게 실현되는 듯 보였다.

당시 폭발적인 번영 덕에 미국 지배계급은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위기가 거듭되며 ‘아메리칸 드림’은 쭉정이가 되더니 결국 악몽으로 변했다. 특히 근래 들어 미국 노동계급 사람들은 생계비 인상으로 타격을 입었다. 정부 지원이 사라졌고, 푸드뱅크 수요가 치솟고, 끼니를 걱정하는 인구가 급증했으며, 노숙인 수가 역대 가장 많다.

치솟는 주거 비용과 주택담보대출 이자, 막대한 의료비·건강보험료는 미국인들이 감당해야 하는 끔찍한 구조적인 비용 중 일부다.

또다른 사례로 미국 예외주의가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정치인들은 미국이 세계의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고 있고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하려 해 왔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력은 중국의 부상으로 도전받고 있으며, 미국 외교가는 “대등한 경쟁자” 중국이 향후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두려움에 떨며 수근대고 있다.

동시에 미국은 군사력의 한계도 처참하게 드러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길고 지리한 전쟁 끝에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철수했다. 미국은 지금도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한 제국주의 대리전의 수렁에 빠져 있고, 미국 내 많은 사람들은 그 전쟁으로 지나친 비용을 치르고 있다고 여긴다.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하는 트럼프 워싱턴 DC에 투입된 주방위군 ⓒ출처 U.S. Air National Guard

기성 선출 대표자들은 죽어가는 기존 질서의 한계선 내에서 그런 위기를 해결하려 애쓰고 있다. 그람시의 표현처럼, 그들은 “타성을 거스르는 데에, 미라가 돼 가는 경향을 거스르는 데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주류 정치인들은 대안과 시간 모두 바닥나고 있다. 노동계급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무언가를 제공하는 데에 실패할수록 헤게모니 위기는 더한층 심각해진다.

그런 위기에 맞서 지배계급은 “온갖 현혹을 동원할” 수 있다고 그람시는 주장한다.

이런 관점을 통해 미국 등지에서 인종차별이 부상하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약화되는 지지를 되살리려고 지배계급은 누군가가 우리의 존재를 위협한다는 관념을 만들어 내곤 하고, 그럼으로써 노동계급 사람들을 자신의 지배로 결집시키려 한다.

트럼프가 그런 목적으로 가장 과격하게 휘두르는 것은 이민자·난민 마녀사냥이다. 과거에는 이민 문제가 백인들의 삶을 유린하지 않았다며 거짓 향수를 조장하는 것이다. 트럼프가 ‘아메리칸 드림’의 시대인 1950년대에 대한 향수를 부추기는 것도 그 일환이다.

강제와 동의

트럼프의 권위주의는 또 다른 역학을 반영한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하에서 “헤게모니의 ‘정상적’ 작동은 … 강제와 동의의 결합을 특징으로 한다”고 그람시는 지적했다. 둘은 “서로 균형을 이룬다. 강제가 동의를 지나치게 압도하는 일 없이 말이다.”

강제는 경찰·군대 같은 기구를 통해 행사된다. 그런 기구들은 기존 질서를 수호하고 그에 대한 반대를 분쇄한다.

반면, 의회 같은 기구들은 동의, 즉 노동계급의 “승인”을 이끌어낸다.

민주주의 제도, 일상적 관례, 습관으로 굳어진 사상을 통해 지배계급은 권위를 얻게 된다. 예컨대 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치를 누리고 있다거나, 경제 성장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는 믿음 같은 것들이 그 사례다.

이로써 기업주와 부유층은 그들과 노동계급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는 관념에 노동계급을 종속시킬 수 있다. 그러나 헤게모니 위기가 오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도덕적·지적·문화적 지도력이 약화되기 시작한다.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가 무너지는 것이다.

기존의 영향력 네트워크가 쇠락하기 시작한다. 미국의 경우, 다수의 사람들이 매스미디어의 정당성을 더는 인정하지 않게 되면서 매스미디어에 대한 신뢰가 지난 50년을 통틀어 가장 낮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기존 질서의 급격한 붕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흔히, 지배계급이 통치 방법을 두고 새로운 합의를 도출하려 아등바등하는 과도기가 존재한다.

그람시는 이렇게 썼다. “지배계급이 동의를 잃었다면, 즉 더는 ‘지도’하지 못하고 ‘지배’하기만 하게 돼 강제만을 행사하게 됐다면, 그런 상황은 대다수 대중이 전통적 이데올로기에서 멀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위기는 정확히, 낡은 것이 죽어가지만 새것이 태어날 수 없는 상태다. 그런 간극에서 매우 다양한 병적 증상들이 나타난다.” 그런 국면이 수십 년 동안 이어질 수도 있는데, 우리가 바로 그런 시기를 살고 있다.

트럼프 정부하에서 그람시가 말한 “병적 증상”들은 차고 넘친다. 강제와 동의의 균형이 흔들리고 있다. 미국 지배계급은 노동계급 사람들에게서 동의를 뽑아내는 능력이 약해지면서 강제에 더 의존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람시는 지배계급이 헤게모니 위기에 대응해 “인물과 정책을 바꿔 … 손아귀에서 새어나가는 통제력을 다시 붙들려” 한다고 지적했다.

그런 방책의 하나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내세우는 것이다. “보수·진보 어느 집단도 승리를 쟁취할 힘이 없을 때, 그래서 심지어 보수 집단조차 그들 위에 군림할 주인이 필요한” 때 그런 일이 벌어진다.

트럼프가 바로 그런 배역을 맡은 것이다. 트럼프는 주류 정치의 실패로 열린 공백을 메우기 위해 권위주의적이고 파시즘적인 전술을 점점 더 많이 채택하고 있다.

그런 위험천만한 궤적 속에서 파시즘으로의 전환은 필연적이지는 않아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지배계급은 위기에 직면하면 극단적으로 반동적인 사상에 기대를 걸 수 있다. 절박함에 떠밀려 이전에는 받아들일 수 없던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런 시기가 극우에게만 기회를 열어 주는 것은 아니다. 저항을 위한 기회도 열어 준다. 그것은 때로 개혁주의적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민주당 뉴욕 시장 후보 경선에서 조란 맘다니가 선출된 것이 그런 사례다.

그러나 진정한 반격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때도 있다. 트럼프가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들을 파견해 전개한 무도한 이민자 단속에 맞서 최근 로스앤젤레스에서 전투적 시위가 분출한 것이 그 사례다.

우리는 국가 탄압이 극심해질 때마다 저항으로 맞서야 한다. 혁명가들은 스스로 기회를 붙잡고 분노를 사회 상층부로 돌리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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