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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내란 청산과 극우 팔레스타인·중동 이재명 정부 이주민·난민 긴 글

낙제에 가까운 내란 특검 성적표:
쿠데타 숙정보다 ‘국정 안정’ 추구한 결과

12월 14일이면 ‘내란 특검’이 마무리된다.

대선 직후인 6월 출범한 특검은 쿠데타 2인자인 김용현 재구속을 시작으로 윤석열과 이상민(행안부 장관, 이하 모두 당시 직책), 조태용(국정원장)을 구속 기소했다.

특검은 한덕수(국무총리), 박성재(법무부 장관), 추경호(국힘 원내대표), 김용대(드론작전사령관), 황교안 구속을 시도했지만, 악명 높은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 3인방의 벽을 넘지 못했다. 3인의 영장전담판사는 대법원장 조희대가 올해 초 이례적으로 한꺼번에 수원지방법원에서 서울중앙지법으로 불러들인 판사들이다.

쿠데타 기도 당시 핵심적인 구실을 한 장성들 중 일부가 구속돼 있고, 일부는 불구속 기소됐다. 추가 기소를 하지 못해 조건부 보석으로 석방한 자들도 있다.

특검 활동 종료와 함께 추가 기소가 이뤄지겠지만, 지금까지 구속된 자들의 수만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김건희의 부패 범죄에 관한 언론의 선정적 보도들이 착시 효과를 일으켰을 뿐, 정작 친위 군사 쿠데타에 관여한 자들은 제대로 밝혀 내지도 처벌하지도 못한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만든 ‘헌법존중TF’는 물론이고 민주당이 추진하는 ‘2차 특검’이 이보다 나은 성과를 내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1차 특검과 법원의 결정들이 일종의 가이드라인 구실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비상계엄 1년을 맞아 ‘나치’를 거론하는 등 강경 처벌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대선을 전후로 강조해 온 ‘국정 안정’ 기조가 지금까지의 결과에 이미 큰 영향을 끼쳤다. 대선 직후 “처벌은 최소화해야 한다”던 최측근 정성호를 법무부 장관에 임명한 것이 그런 결과를 예고했다.

대통령도, 여당도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취임 이후 내내 줄타기를 해 온 것이다.

내란 처벌 대상 최소화는 민주주의 회복에 브레이크 구실을 하고 있다 ⓒ이미진

일부 민주당 의원들이 좀 더 과감한 조처를 주장하지만 이미 방향은 처벌 대상 최소화로, 즉 국힘과 조희대 사법부가 추구해 온 방향으로 수렴되고 있다.

지금대로라면 친위 군사 쿠데타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려 한 자들에 대한 처벌은 윤석열과 김용현 등을 포함한 극소수로 제한될 수 있다. 이들에 더해 김건희 등 각별히 대중의 분노를 산 부패한 자들에 대한 처벌을 부각해 대중의 불만을 달래려 할 듯하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최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내란 특검은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며 김건희 부패 수사를 더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는 경중을 구별하지 못하는 태도로, 역설이게도 윤석열의 ‘계몽령’ 주장을 정당화하는 효과를 낸다. 무속인에게서 보석과 가방을 받고 인사청탁을 한 것이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장악하고 수천 명을 ‘수거’하려 한 것보다 큰 범죄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의 정치 시스템을 안정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쿠데타 부역자들을 뿌리뽑고 그렇게 함으로써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그렇게 안정시키려는 시스템이 친위 군사 쿠데타를 가능하게 한 시스템이라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대중 항쟁이 벌어진 뒤 극소수의 책임자에게만 화살을 집중시켜 제거함으로써 기존 시스템을 지키는 식의 대응은 국제적으로 반복돼 왔다.

차우셰스쿠를 타도한 항쟁은 왜 뜻을 이루지 못했는가

1989년 12월 루마니아의 부패한 독재자 차우셰스쿠에 맞선 혁명이 일어났다. 차우셰스쿠는 그전까지 하던 것처럼 군대를 동원해 잔인하게 저항을 짓밟으려 했다.

그러나 12월 21일 차우셰스쿠 자신이 개최한 친정부 시위는 몇 분 만에 반정부 시위로 변했다. 방송을 보던 사람들 수십만 명이 집회에 참가했고 집회 생방송은 급히 차단됐다.

밤새 시위를 이어 가던 이들은 집권당의 중앙위원회 건물을 장악하고, 보안 경찰들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차우셰스쿠는 옥상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도망갔다. 대통령궁에서는 황금으로 만든 변기와 수도꼭지 등이 발견돼 거대한 분노를 샀다.

군부는 처음에는 차우셰스쿠를 지지하다가 시위대가 보안 경찰과 충돌하자 중립을 내세우더니 결국 혁명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군대는 지난 이틀 동안 온갖 위험을 감수하며 싸웠던 사람들로부터 통제권을 인수하기 시작했다.”(크리스 하먼, 《1989년 동유럽 혁명과 국가자본주의 체제 붕괴》)

곧이어 공식적으로 통제를 담당하게 된 ‘구국위원회’는 장군들, 옛 독재자의 동료였다가 사이가 틀어진 사람들, 그리고 학생과 거리 시위대에서 선출된 소수의 대표들로 구성됐다.

구국위원회는 차우셰스쿠 부부가 반혁명 세력의 초점 구실을 하지 못하도록 12월 25일에 그들을 재판한 후 처형했다. 그러나 동시에 차우셰스쿠 권력을 무너뜨렸고 반혁명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인 자발적 대중 활동을 약화시키는 조처도 취했다.

차우셰스쿠를 처형한 날에는 군대 외에는 무기를 보유할 수 없도록 하는 조처를 발표했고 2주 뒤에는 부큐레슈티 도심 집회를 금지했다.

대중 운동이 이런 조처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결과, ‘시스템’은 급속히 안정됐다. 차우셰스쿠와 관계가 벌어지기 전에 옛 집권당에서 지도적 구실을 했던 자들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1년 전 윤석열과 쿠데타 세력을 몰아낸 운동이 이런 결과를 맞이하도록 내버려 둬선 안 된다. 쿠데타 세력을 숙정하고 노동계급 등 대중의 민주적 권리를 지키려면, 어정쩡한 절충 시도를 비판하는 아래로부터의 행동이 활성화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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