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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론으로 본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전쟁

〔편집팀〕 이 기사는 최일붕 노동자연대 운영위원이 2026년 4월 16일에 열린 공개 토론회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의 전쟁,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휴전·협상·재봉쇄 국면을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론의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전쟁과 협상 국면은 미국이 압도적 힘으로 중동을 뜻대로 재편해 가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흔들리는 패권을 유지하려는 무리한 시도였고, 트럼프가 휴전과 협박, 협상과 봉쇄를 오락가락하는 모습 자체가 미국 제국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먼저 전쟁의 성격을 간단히 정리한 뒤,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론을 바탕으로 지금 협상의 본질과 전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정치적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쟁의 근본 원인과 특징

2026년 2월 미국·이스라엘의 이란·레바논 공격은 근본적으로 세계 자본주의의 혼돈과 불안정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전쟁은 단순한 군사 충돌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정권 교체 시도에서 출발해 에너지, 금융, 공급망 전반을 전장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봉쇄와 재개방, 재봉쇄 위협은 세계 경제 전체에 충격을 주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두 차원이 연결된 결과입니다. 하나는 세계 체제 차원의 긴장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 차원의 긴장입니다. 세계적 차원은 중국의 부상으로 미국 패권이 도전받는 상황이고, 지역 차원은 중동에서 이스라엘, 이란, 걸프 국가들, 튀르키예 사이의 경쟁이 격화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이 전쟁은 단지 특정 국가 지도자들의 오판이나 충동으로 벌어진 것이 아닙니다. 세계 차원의 세력 균형 변화와 지역 차원의 패권 경쟁이 서로 맞물리면서 폭발한 것입니다.

미국의 국가안보전략과 국가방위전략이 발표됐을 때 흔히들 중동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번 전쟁으로 입증됐습니다. 미국의 전략은 중동에서 손을 떼겠다는 뜻이 아니라, 군수산업을 강화하고 전략적 재배치를 통해 개입 방식을 새로 설계하겠다는 뜻입니다. 중동은 여전히 에너지와 물류, 지정학이 교차하는 핵심 지역입니다. 미국은 이 지역의 안보를 관리하려 함으로써 자기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려 합니다.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도 이런 맥락 속에서 봐야 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단독으로 벌인 군사적 모험이라기보다, 미국의 후원 아래 이란의 역내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계산 속에서 이뤄진 공격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스라엘은 미국의 단순한 대리인이 아니라 자체적 이해관계를 가진 지역 강국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미국이 통제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전쟁을 더 밀어붙이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란은 외부 제재와 내부의 부패, 비효율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노동자 파업을 비롯해 아래로부터의 저항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전쟁은 이런 내부 모순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내부 억압을 강화하는 명분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제국주의적 개입은 피억압 민중의 해방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제국주의는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질서 재편만을 추구합니다. 1991년 이라크 사례가 보여 주듯, 외부 개입에 기대를 거는 것은 치명적인 환상입니다. 진정한 해방은 언제나 아래로부터의 독립적 집단행동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전쟁이 드러낸 미국 제국주의의 한계

이번 전쟁의 가장 큰 특징은 미국의 전쟁 목표와 실제 결과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했다는 점입니다. 미국은 이란 정권을 단숨에 무너뜨리고, 호르무즈를 다시 자기 통제 아래 두며, 이란의 지역적 영향력과 핵 야심을 한꺼번에 꺾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트럼프가 ‘석기 시대’로 돌아가는 ‘문명 파괴’를 위협하다가도 갑자기 휴전을 선언하고, 다시 봉쇄를 들고 나온 것은 미국이 강해서라기보다 뜻대로 사태를 끝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란의 석유 수출 능력을 완전히 파괴하거나 호르무즈 해협을 장기적으로 마비시키는 방향으로 전쟁을 끝까지 밀어붙일 경우, 그 여파가 중동 전체의 불안정으로 이어질 뿐 아니라 세계 경제 전체를 강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르무즈는 해상 석유뿐 아니라 액화천연가스, 비료 생산에 필수적인 요소와 황, 암모니아와 질소, 반도체 생산과 의료 장비에 중요한 헬륨까지 통과하는 병목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상대를 압도할 힘을 갖고 있었지만, 그 힘을 끝까지 밀어붙였을 때 자신이 감당해야 할 대가도 너무 컸던 것입니다.

이란 정권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초기 공격으로 최고지도자와 군 지휘부, 공군과 해군에 큰 타격을 입었음에도 붕괴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걸프 지역 미군 기지와 서방 동맹국들의 에너지 기반 시설을 타격하며 반격했습니다. 이것은 미국식 ‘참수 타격’이 자동으로 정권을 붕괴시키지 못한다는 점, 그리고 약화된 상대도 제국주의 강대국에 상당한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 문제는 핵심 고리였습니다. 휴전 뒤에도 해협은 안정적으로 정상화되지 않았고,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이란 항만을 드나들거나 이란에 통행료를 지불한 선박을 차단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는 단지 이란만을 겨눈 조처가 아니라, 이란산 원유를 주로 수입하는 중국까지 압박하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호르무즈는 지역 분쟁 지점이 아니라 미국, 이란, 중국의 이해가 충돌하는 세계적 병목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구실도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은 단순한 미국의 대리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자체적 이해관계를 가진 지역 강국입니다. 그래서 미국이 원치 않는 수준까지 전쟁을 밀어붙이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은 역내 동맹국의 전쟁 추진에 휘말리면서도, 그 동맹 관계 자체를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이 전쟁의 비용은 고스란히 세계 민중과 노동계급에 전가되고 있습니다. 브렌트유 가격 급등, 현물 인도 가격의 급상승, 전략비축유 방출과 우회 수송 확대 같은 비상 조처는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 공급 충격을 낳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유가와 원자재 가격 상승, 물가 불안, 생활비 위기는 제국주의 전쟁의 고통이 어떻게 아래로 떠넘겨지는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전쟁은 언제나 위로부터 결정되지만, 그 대가는 아래 사람들이 치릅니다.

협상의 전망: 평화인가, 제국주의적 재정비인가?

지금의 국면을 진정한 종전을 향한 안정적 협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짧은 휴전, 결렬된 회담, 재봉쇄 위협이 교차하는 불안정한 교착에 더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평화냐 전쟁이냐’의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협상과 군사적 강압이 뒤엉킨 채 다음 충돌을 준비하는 국면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은 호르무즈 해협을 사실상 자기 뜻대로 열어 두고, 이란의 핵·미사일 능력을 제한하며, 가능하다면 중국으로 향하는 이란의 원유 수출까지 죄려 할 것입니다. 이란은 제재 완화, 정권 안전 보장, 역내 영향력의 일부 유지 없이는 물러서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전망은 포괄적 평화협정보다 부분적 거래, 제한적 휴전, 봉쇄와 반봉쇄가 반복되는 장기 교착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중요한 것은, 이 협상을 대등한 평화 협상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미국은 군사력과 제재, 해상 통제력을 배경으로 중동의 지정학적 질서와 에너지 수송로를 다시 통제하려 합니다. 이란은 호르무즈와 역내 동맹망을 협상 카드로 삼아 체제 생존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호르무즈를 통해 대량의 원유를 들여오는 중국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협상은 미국과 이란의 양자 협상인 동시에, 미국 패권의 약화와 중국 부상이라는 더 큰 세계적 경쟁이 중동에서 집중돼 나타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전망은 모순적입니다. 미국은 약해졌지만 덜 위험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처 입은 패권국일수록 더 무모하고 파괴적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국면은 미국 제국주의의 후퇴를 자동으로 뜻하지도 않고, 협상 자체가 평화를 보장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미국이 여전히 치명적이지만 더는 쉽게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 모순이 앞으로도 전쟁과 위기를 되풀이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부하린과 레닌의 제국주의론으로 바라본 협상

이러한 세계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론, 특히 부하린과 레닌의 분석틀이 강력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먼저 부하린의 관점에서 보겠습니다. 부하린에게 제국주의는 단순한 영토 확장 정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제국주의를 자본의 국제화와 자본의 국가화가 통합된 체제로 파악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본은 이윤을 찾아 국경을 넘어 움직입니다. 세계적으로 얽히고 연결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만큼 자본은 자국 국가의 보호와 강제력에도 더 의존하게 됩니다. 즉, 자본은 국제화되지만, 동시에 더 강하게 국가화되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국가는 단지 중립적 행정기구가 아닙니다. 국가는 국내 대자본을 조직하고 통합하는 집합적 자본가 구실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경쟁은 기업 대 기업의 경쟁을 넘어, 국가로 조직된 자본블록 대 국가로 조직된 자본블록의 경쟁으로 재편됩니다.

이 틀로 보면 지금의 협상은 단순한 외교적 줄다리기가 아닙니다. 국가로 조직된 자본블록들 사이의 치열한 샅바싸움입니다. 미국은 단지 전투를 멈추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은 중동의 안보·에너지 질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재편하려 합니다. 반면 이란은 군사적 압박 속에서도 호르무즈 해협과 역내 동맹망을 지렛대로 삼아 정권 생존과 지배계급의 이익을 방어하려 합니다.

부하린의 강점은 여기에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세계경제가 하나로 통합될수록 오히려 국민국가들 사이의 경쟁과 충돌은 더 격화된다고 봤습니다. 세계적 연계가 자동으로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규모의 충돌을 준비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합의와 평화는 언제나 다음 분쟁과 전쟁을 위한 숨고르기와 번갈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지금의 협상 국면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합니다. 해협 문제, 제재 문제, 핵 문제, 레바논 전선이 서로 얽혀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들은 따로따로 흩어진 쟁점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경제적·지정학적 연쇄 속에 들어 있는 연결된 문제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휴전은 평화의 정착을 향하기보다, 다음 충돌을 준비하는 불안정한 관리 국면으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한편 레닌의 관점은 이 협상을 더 넓은 세계 체제의 위계 속에서 보여 줍니다. 레닌에게 제국주의는 몇몇 나라의 공격적인 외교 노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독점 단계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는 세계적 체제입니다.

생산과 자본의 집중이 심화하면서 독점 자본이 경제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경쟁의 승패는 단지 누가 더 싼 상품을 파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원료 공급원을 확보하느냐, 누가 시장 접근을 차단하느냐, 누가 국가 권력을 더 강하게 동원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게 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미국이 호르무즈 해협 개방, 이란의 핵·미사일 제한, 제재 체제 유지를 한꺼번에 밀어붙이는 것은 단지 안보 현안을 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독점 자본과 국가 권력이 결합한 제국주의 질서를 군사력과 제재를 배경으로 재조정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협상은 힘의 비대칭 위에서 진행되는 질서 재편 과정이지, 대등한 평화 협상이 아닙니다.

또, 레닌의 불균등 발전 개념은 왜 이런 합의가 근본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각국의 성장 속도와 힘의 균형이 끊임없이 변합니다. 그래서 어떤 국제 질서도 오래 고정될 수 없습니다. 기존의 합의는 새로운 세력관계의 압력 아래 흔들리고, 분할·재분할 경쟁은 거듭 충돌을 낳습니다.

오늘날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적용할 때, 제국주의를 옛 식민지 쟁탈전의 모습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현대 제국주의는 훨씬 복합적인 형태로 작동합니다. 군사기지망, 금융 제재, 해상 통제, 공급망 재편, 기술 봉쇄 같은 형태로도 작동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휴전은 전쟁의 반대말이라기보다, 군사적 충돌과 경제적 강제가 결합된 경쟁의 다른 국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부하린과 레닌의 이론을 종합하면 결론은 더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왜 이런 협상이 근본적으로 불안정한지, 왜 휴전이 곧 새로운 대결의 전주곡이 되기 쉬운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그 불안정이 단지 외교적 실패나 오판의 산물이 아니라, 자본과 국가의 유착과 상호의존, 그리고 세계적 불균등 발전 속 강대국간 경쟁이라는 체제의 본성에서 나온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지금 벌어지는 협상은 평화의 시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국주의 국가들과 지역 지배자들이 다음 국면을 준비하며 힘을 재조정하는 불안정한 관리 국면이라고 봐야 합니다.

요약하겠습니다. 이란 전쟁과 현재의 협상 국면은 미국 제국주의의 전능함이 아니라 그 한계가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입니다. 미국은 압도적 우위를 갖고 있었지만, 자기 뜻대로 중동 질서를 일방적으로 재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휴전과 협상을 평화의 진전으로 착각하거나 희망적 관측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정전 협정이 성사되더라도 그것은 정의로운 평화라기보다, 에너지 통로와 제재 체제, 지역 패권을 둘러싼 강압적 거래의 결과물일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국가 지도자들의 외교 수사가 아닙니다. 누가 에너지 통로를 통제하는지, 누가 제재의 조건을 정하는지, 그 막대한 비용을 누가 치르는지에 대한 냉철한 현실 인식입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단지 전쟁이 계속되느냐 멈추느냐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전쟁과 휴전의 전 과정을 규정하는 제국주의 질서 자체입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단순한 평화 호소가 아니라 정치적 개입입니다. 전쟁의 대가를 노동계급과 민중에게 떠넘기는 제국주의 질서에 반대하며 독립적인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발전시키는 정치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개입은 어떤 원칙 위에서 가능할까요?

정치적 개입, 어떻게 해야 할까?

정치적 개입의 출발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전쟁을 볼 때 제국주의와 피압박 국가 사이의 불균등한 관계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렇다고 해서 이란 정권 자체를 정치적으로 지지해서는 안 되며, 아래로부터의 노동계급 저항과 국제적 반전 운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제국주의와 국가 주권 문제부터 보겠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세계를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로 봅니다. 노동계급은 서울에도 있고, 테헤란에도 있고, 뉴욕에도 있습니다. 노동계급은 어느 한 나라에만 존재하는 계급이 아닙니다.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에나 존재하는 국제적 계급입니다. 자본가 계급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자본가 계급은 거대한 다국적기업들과 금융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적으로 조직돼 있습니다.

이처럼 세계가 경제적으로 하나로 통합돼 가는 동시에, 세계는 여전히 국민국가들로 분할돼 있습니다. 지구 곳곳의 영토마다 각자의 정부와 법률이 있고, 깃발과 애국가가 있고, 국경수비대와 철조망이 있으며, 이민 통제와 노동법이 존재합니다. 자본은 국제적으로 활동하지만 그 자본이 활동하는 정치적 틀은 여전히 국가별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국가들은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불균등하게 발전해 왔습니다. 먼저 유럽과 미국에서 발전했고, 이후 세계 곳곳으로 확산됐습니다. 초기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새로 획득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제국 건설과 식민지 개척에 활용했습니다.

오늘날 공식적인 식민지는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강대국들의 지배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약소국이 강대국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은행 대출이 끊기고, 원조가 중단되고, 관세 장벽이 세워지고, 외교 협력이 차단되거나 각종 제재가 가해집니다. 이런 수단으로도 부족할 때에는 강대국들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동원해 뜻을 관철시키려 합니다.

강대국들은 약소국에 자기 의지를 강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도 갖고 있습니다. 경제 권력은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유럽연합 등을 통해 행사되고, 유엔과 나토는 외교적·군사적 압력을 가하는 도구 노릇을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제국주의 체제의 한 모습입니다.

이 질서에 맞서 약소국들과 피압박 민족, 피압박 국민은 거듭 저항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투쟁들이 곧바로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투쟁인 것은 아닙니다. 대체로 그것은 민족해방 투쟁, 곧 그 나라 사람들 스스로 자기 삶과 사회를 통제할 수 있게 되기 위한 투쟁으로 나타납니다. 오늘날에는 이미 국가를 세운 나라가 강대국의 개입을 막기 위해 벌이는 투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물론 노동자들도 이런 투쟁에 참가합니다. 그러나 민족 자주화 투쟁을 이끄는 세력은 대개 노동자가 아닙니다. 흔히 중간계급과 지배계급 일부의 지지를 받는 친자본주의적 정치세력입니다. 이를테면 시아파 성직자층이 지배하고 상인 계층의 지지를 받아 온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그런 사례입니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요?

많은 사람들은 양비론의 유혹을 받습니다. 전쟁도 반대하고 독재도 반대한다는 식입니다. 제국주의 열강의 행동은 비판하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작은 국민국가를 지키려는 세력을 왜 지지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더구나 그 국가의 지도자가 권위주의적이고 국가 기구가 매우 억압적이라면 더욱 그렇게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양비론에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양쪽은 결코 동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이란의 관계를 보십시오. 한편에는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지닌 제국주의 강대국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경제 규모도 군사력도 훨씬 열세인 중진국이 있습니다. 이것은 대등한 강대국 간 충돌이 아닙니다. 강력한 억압자와 훨씬 약한 피압박 국가 사이의 충돌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피압박 국가의 정권이 비민주적이고 압제적일지라도, 제국주의적 침략과 충돌하는 경우에는 압박받는 쪽이 제국주의 강대국을 물리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미국 같은 제국주의 강대국이 승리하면 제국주의 체제 전체가 강화되고, 동시에 그 강대국 지배계급이 자국 노동계급을 지배하는 힘도 강화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피압박 국가가 제국주의 강대국을 패퇴시키면, 제국주의 체제 전체와 강대국 지배계급의 위세는 약화됩니다.

1970년대 베트남이 미국을 패퇴시켰을 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계 좌파가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정치적으로 적지 않은 차이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그 승리를 지지한 것이 옳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민족해방 투쟁을 이끄는 세력과의 정치적 차이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 이란 정권이 미국·이스라엘의 침략 직전에 시위대를 대규모로 학살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란 정권의 압제적 본질을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시위대 대부분이 팔라비 지지자였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 우익 반동 세력은 일부였을 뿐입니다. 대다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물가와 실업으로 생계가 무너진 도시 빈곤층과 노동자 대중, 미래 없는 경제와 강한 사회 통제에 반발한 청년층, 2022년 마흐사 아미니 의문사 사건 이후 축적된 분노 속에서 히잡 강요를 비롯한 여성 억압 철폐를 요구한 여성들, 그리고 쿠르드족·발루치족 등 차별받는 소수민족 집단이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생존권 보장,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 여성의 권리, 부패 척결과 정의였습니다. 연간 50퍼센트를 넘는 물가상승 속에서 “빵을 달라,” “복지를 늘려라”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투표를 통한 정권 교체를 원했고, 여성의 복장 선택권과 사생활에 대한 국가 개입 중단을 요구했으며, 권력층의 부패와 자원 독점에 맞섰습니다.

그러므로 이란 시위는 단순한 불만 표출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경제적 궁핍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해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해방의 요구로 번져 간 운동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란 정권을 정치적으로 지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 국가 편에 설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민중의 편에 서야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입장은 이중의 과제를 결합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란 정권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침략을 물리치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그 정권이 시위대를 유혈 탄압하고 각종 압제를 자행해 온 사실을 결코 변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제국주의에 맞서 피억압 민중과 연대하면서도, 그 내부에서 노동계급의 독자적 저항과 사회주의적 대안이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계급투쟁과 반제국주의 투쟁을 결합하는 접근법입니다. 다시 말해, 민족해방 투쟁이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발전하도록 지지하고 연대하는 관점입니다.

결론

끝으로 두 가지 핵심 논점을 제시하겠습니다.

첫째, 1979년 이란 노동계급의 패배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의 대패배와 그 후유증이 남긴 정치·사회적 위기를 이슬람주의 운동이 활용한 데 있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스탈린주의 주류 좌파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 정치 대신 국가 주권 중심 정치를 채택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노동계급의 독립적 정치가 약화된 자리를 다른 반체제 세력이 차지했던 것입니다. 이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 그것이 이슬람주의 프로젝트의 잔해 속에서 우리가 건져 내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입니다.

둘째, 세계 자본주의의 혼돈과 불안정은 서방 주요 경제들 내부에서도 혁명의 잠재력이 있는 균열의 가능성을 키우고 있습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중동을 폐허로 만드는 폭격기의 발진 기지를 마비시킬 대중적 반전 운동입니다. 특히, 이스라엘행 무기·물자 수송을 거부한 이탈리아·그리스·모로코 노동자들의 행동에서 영감을 받은 노동자 행동입니다. 그래서 반전·반인종차별·반군사주의 운동의 중심에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선 노동자적 저항을 놓는 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전 운동을 단순한 평화 호소로 축소하지 않는 것입니다. 효과적인 반전 운동은 전쟁을 낳는 체제 자체에 도전해야 합니다. 그것은 제국주의와 군사주의, 인종차별과 착취를 떠받치는 자본주의 질서에 맞서는 운동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반전 운동은 일시적 도덕적 항의를 넘어 실제 정치적 힘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 내부의 반전 운동은 단지 “우리 정부의 개입 반대”를 외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무기 생산과 수송, 군사기지 운영, 외교적 공모, 언론의 전쟁 선동에 맞선 더 실질적이고 조직된 저항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노동계급이 이 과정에서 핵심적 구실을 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노동계급은 단지 전쟁의 피해자가 아니라, 전쟁 기계를 멈출 잠재력을 지닌 사회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중동에서 전쟁과 학살, 독재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연대의 형태는 분명합니다.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지역 지배자들의 압제에도 반대하며, 노동계급의 독자적 저항과 국제적 연대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이 전쟁에 맞서는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이자 실천의 방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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