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계 역사학자 도니 글럭스틴 에든버러대학 교수 강연:
시온주의, 기원부터 현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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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9월 19일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이하 ‘팔연사’)이 주최한 포럼에서 도니 글럭스틴이 한 강연과 청중 질의에 대한 답변을 글로 옮긴 것이다. 도니 글럭스틴은 유대계 영국인 역사학자이자 반전·반파시즘 활동가이고 최근 《급진적 유대인 전통》(국내 미번역)을 공저했다.
강연을 기사로 싣게 허락해 준 ‘팔연사’에 감사드린다. 강연 영상을 ‘팔연사’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대비되는 두 가지 사실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한편으로는 가자로부터 인종학살이 생중계되고, 서안지구에서 정착자들의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 유대인 국가를 표방하는 이스라엘 국가에 의해 자행되는 일들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유럽에서 수백 년 동안 박해받았고, 그것은 홀로코스트의 참상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홀로코스트로 유대인 600만 명이 살해됐다. 그 밖에도 성소수자, 로마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렇다면 이 두 사실을 어떻게 동시에 이해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네 가지 측면을 살펴보려 한다. 1) 유럽에서의 시온주의의 역사 2) 이스라엘 건국 과정과 나크바 3) 이스라엘과 제국주의의 관계 4) 오늘날의 상황.
주변적이었던 시온주의는 어떻게 득세하게 됐나?
20세기 초부터 살펴보자. 당시 세계에는 유대인이 1,600만 명 있었고, 그중 1100만 명이 유럽에 살았다. 유럽 유대인의 절반이 러시아 제국에 살았지만, 그들은 러시아 전체 인구의 4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도시에 살았으며, 새롭게 형성되는 노동계급의 일부가 됐다.
당시 러시아는 산업화 중이었고 차르의 지배 체제 전반이 심각한 사회적 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지배계급은 주민들을 이간질해 각개격파하는 식으로 통치해야 했다.
1881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자 유대인들이 원흉으로 지목됐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을 겨냥한 폭동, 즉 포그롬이 잇따라 일어났다. 그래서 러시아 유대인들은 노동자로서 착취당하는 동시에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박해받았다. 이는 커다란 분노와 저항을 낳을 잠재력이 있었다.
1897년 한 해에 세 가지 상이한 흐름이 형성됐다.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였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비유대인들과 함께 체제를 전복하려 했다.
또 다른 흐름은 유대인 노동자 조직인 분트였다. 여기서는 유대인들이 자신만의 조직을 만들었지만 역시 비유대인들과 함께 체제를 전복하려 했다.
세 번째 흐름은 시온주의다. 시온주의는 유대인들이 박해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온주의는 제국주의의 시대에 등장했고 당시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의 민족주의를 모방했다.
일반적으로 민족주의 운동은 자신들이 대표하는 영토와 국민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시온주의에는 영토가 없었고, 지지자도 극소수였다. 노동자 대부분은 마르크스주의나 분트를 지지했다.
그래서 시온주의의 주창자인 테오도르 헤르츨은 팔레스타인 땅을 확보하기 위해 제국주의 지배자들에게 호소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술탄에게 접근하고, 포그롬을 자행하던 차르에게도 접근했다. 그러다 독일 황제 카이저와 교황을 거쳐 결국에는 영국 제국주의의 지원을 구했다.
그러나 시온주의는 매우 취약했다. 이를 잘 보여 주는 수치가 있다. 포그롬 때문에 유럽을 떠난 유대인이 400만 명이었는데, 그중 시온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라 팔레스타인으로 간 사람은 27명 중 1명 꼴에 불과했다.
마르크스주의와 분트주의가 시온주의보다 훨씬 인기 있었다. 그래서 좌파 시온주의가 생겨났고, 이것이 1970년대까지 시온주의를 지배했다. 시온주의자들은 제국주의의 도움을 구하는 동시에 급진적인 모습을 보여야 했던 것이다. 당시 유대인 대다수가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다.
시온주의는 이처럼 인기가 없었지만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마르크스주의와 분트주의의 토대는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연대였다. 유대인은 전체 인구의 소수였기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싸워야만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집권한 뒤 벌어진 일 때문에 이런 연대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유대인 난민들에게 문을 닫았다. 유대인 난민들이 급진적 선동가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1941년 이후 홀로코스트가 벌어졌을 때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연합국은 유대인들을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독일과의 전쟁에 쓰이는 어떠한 자원도 유대인을 구하는 데 돌리려 하지 않고 유대인 600만 명이 죽는 것을 그저 지켜봤다. 오늘날 가자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듯이 말이다.
그 결과, 그전까지 소수의 신념에 불과했던 시온주의가 유대인 압도 다수의 신념이 됐다.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과 나크바
이 대목에서 두 번째 측면인 이스라엘 건국 과정과 나크바를 살펴보겠다.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온 소수의 유대인들은 그곳에 도착해서 무엇을 했을까? 그들은 대부분 유럽의 도시에서 살다 왔다. 재단사를 하거나 직조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맞닥뜨린 사회는 농업이 주된 사회였다. 그들은 농사 경험이 없었다. 또한 그들은 유럽의 생활수준에 익숙했다.
아랍 농민(펠라힌)은 작은 농지를 소유하고 있거나 남의 농장에서 시간제로 일하기도 했다. 일자리를 제공하는 자들은 가장 저렴한 노동력을 고용하려 했고, 가장 저렴한 노동력은 아랍인의 노동력이었다.
대규모로 유입된 유대인 이주민들은 이들과 경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만의 경제를 별도로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 분리(아파르트헤이트) 체제와 비슷했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키부츠다. 키부츠는 사회주의 시온주의자들이 이끌었다. 매우 좌파적으로 보이고 사유재산도 없었다. 여러 면에서 매우 진보적인 외양을 띠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의 정착자들이 만든 것이고 아주 단순한 구호를 내걸었다. “아랍인 노동은 안 된다.” 그들은 시장에서 아랍인 상점들을 부수고, 아랍인을 고용하지 않았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했다. 영국은 오스만제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을 빼앗았다. 영국의 정책은 밸푸어 선언에 잘 집약돼 있다. 그 선언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민족적 고향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영국의 정책은 다른 모든 곳에서 써먹던 낡은 정책과 똑같았다. 이간질을 통한 각개격파였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인과 아랍인을 서로 싸우게 했다.
처음에 아랍인 다수는 유대인 난민을 받아들였다. 아랍인들은 이미 수세기 동안 유대인과 함께 살아 왔다. 물론 그 수는 매우 적었지만, 그 유대인들은 아랍인들과 아무 문제 없이 공존해 왔다.
그러나 정착자들이 인종 분리 체제를 만들고, 요충지를 장악하고, 키부츠를 건설하는 등의 행태를 보이자 상황은 달라졌다. 시온주의가 진정으로 사회주의적이었다면 가난한 유대인과 가난한 아랍인들의 공동의 적인 지주들, 영국 제국주의자들에 맞서 연대했을 것이다.
이렇듯 팔레스타인에 온 유대인들이 난민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그들은 도착한 뒤 식민 정착자가 됐다. 그러면서 아랍인들의 저항이 시작됐다.
시온주의자들은 무장 조직을 결성했다. 그 무장 조직인 하가나의 창립자 한 명은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에서 차르 각료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망명한 아나키스트 여성이었다.
1936년 아랍인들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맞서 대규모 파업을 벌였다. 그리고 영국과 시온주의자들이 힘을 합쳐 그 파업을 분쇄했다. 시온주의자들은 영국과 협력해 아랍인들을 진압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영국 제국주의가 기진맥진해지자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에도 맞서기 시작했다.
영국은 여전히 아랍인과 유대인을 서로 견제시키려 했고, 그래서 유대인 입국자 수를 제한하고 있었다.
유명한 사건이 하나 있다. 무장 조직 슈테른의 일원인 메나헴 베긴이 킹 데이비드 호텔을 폭파한 것이다. 슈테른은 무솔리니와 그의 방식을 본받으려 했다.
이제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이른바 ‘독립 전쟁’을 살펴보겠다. 사실 그것은 독립 전쟁이 아니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아랍인 70만 명과 유대인 50만 명이 있었다.
시온주의자들이 나크바를 자행할 수 있었던 배경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제국주의와 맺은 관계다. 그들은 사실상 소련으로부터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무기를 공급받았다. 체코산 무기가 시온주의자들의 주요 무기 공급원이었다. 이것은 서방뿐 아니라 냉전의 다른 진영인 소련도 중동을 통제하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크바가 벌어질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아랍 지배자들이 아랍인 동포를 돕기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지키는 데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그들의 대응은 미약했다. 그래서 나크바가 벌어진 것이다.
상황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스라엘은 정착자 식민주의, 아파르트헤이트, 인종청소를 통해 1948년에 수립됐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똑같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아랍인 노동, 즉 식민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노동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인 대부분이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났고 세계 최대의 난민 집단이 됐다.
제국주의의 지원, 끝없는 전쟁과 우경화
이 대목에서 세 번째 측면을 살펴보겠다. 이스라엘이 수립된 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다.
막 건국된 이스라엘은 여전히 취약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오늘날과 같은 아류제국주의가 아직 아니었다. 힘을 키우려면 제국주의에 이로운 역할을 수행해야 했고, 제국주의의 지원에 의존해야 했다.
예를 들어 1952년 이스라엘은 독일과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을 통해 독일은 “이제 홀로코스트는 과거 지사가 됐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옛 나치들이 독일 정부에 남아 있을 수 있게 하는 가림막 구실을 이스라엘이 한 것이다.
오늘날 독일은 이스라엘에 무기를 두 번째로 많이 공급하는 국가다.
1956년 이스라엘은 영국과 프랑스와 함께 이집트를 침공해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려 했다. 그 시도는 실패했다.
그러나 1967년 이른바 ‘6일 전쟁’이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이 전쟁에서 여러 아랍 국가의 군대가 완패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아류제국주의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가자와 서안지구로 영토를 확대하고 중동에서 지배력을 행사했다.
오늘날 세계 최대의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이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후원국이 됐다. 그 이유 하나는 명백하다. 석유가 풍부한 중동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서다.
이는 이스라엘 정치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억압해야만 존속할 수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대중은 자국의 군사력과 일체감을 느낀다. 이것은 이스라엘 정치의 우경화를 낳았다. 1970년대부터 노동당식 시온주의가 줄곧 쇠퇴하고, 테러리스트인 메나헴 베긴이 이끄는 리쿠드당이 집권했다.
그리고 상시적인 전쟁의 시대가 시작됐다. 1973년에는 욤키푸르 전쟁이 있었다. 1979년 이란의 샤 정권이 몰락한 뒤 이스라엘은 제국주의의 핵심 중동 기지로서 더욱 중요해졌다. 그 뒤 1982년에 레바논 전쟁이 일어났다(그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2008년부터는 가자를 공격했고 그 공격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쟁이 상시적으로 이어지는 동안 이스라엘 바깥에서 인구가 유입되면서 이스라엘 인구는 증가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인종차별적인 사회다. 예를 들어 그 사회의 최상층에는 백인 유럽인들이 있다. 그 아래에는 미즈라히 유대인이라고 불리는 아랍 나라 출신 유대인들이 하층 계급으로 있다. 그 아래에는 에티오피아 출신 흑인 유대인인 팔라샤가 있다. 그리고 맨 밑바닥에는 팔레스타인인 100만 명이 있다.
이스라엘은 유대 문화를 대표하지 않는다. 새로운 제국주의 문화를 대표한다. 이를 보여 주는 사례가 언어 문제다. 예를 들어 홀로코스트로 죽은 유대인 대부분은 이디시어라는 언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디시어나 아랍어, 에티오피아계 언어를 사용할 수 없게 했다. 이스라엘에 온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사용해야 했다.
이처럼 군국주의가 심해지고 우경화가 삼화됐지만 팔레스타인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스라엘 대중은 갈수록 제국주의와 인종학살을 지지하고, 이란 공격을 지지하는 등 온갖 끔찍한 일들을 지지한다. 벤그비르와 스모트리치를 지지하는 가장 우익적인 부분은 사실 이스라엘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착취받는 사람들이다.
팔레스타인 해방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이제 팔레스타인 운동을 간단히 살펴보겠다. 이 운동에는 어떤 선택지가 있을까?
팔레스타인인들은 억압받고 있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프리카민족회의(ANC)와 달리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지렛대가 거의 없다. 이스라엘 노동계급 사이에서 희망을 찾을 수도 없다. 이스라엘 노동계급은 인종학살을 지지한다. 아랍 지배자들의 지원을 받을 수도 없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권력에만 관심이 있다. 이른바 ‘국제 사회’, 즉 세계 지배계급들이 ‘두 국가 방안’을 실현해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운동은 아래로부터의 투쟁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 아랍 노동계급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 그들의 투쟁 속에서 우리는 2010~2011년 아랍 혁명 때 라파 국경이 개방되는 광경을 목도했다.
희망은 세계 노동계급의 다수에게 있다. 여론 조사를 보면 시온주의와 이스라엘에 반대하고 가자와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여론이 일관되게 나타난다.
우리가 자국 정부들을 압박하지 않는다면 그 정부들은 말로라도 팔레스타인에 지지를 표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일의 혁명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유명한 말을 하나 인용하겠다. 제1차세계대전 때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 등을 상대로 싸우고 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적은 국내에 있다.”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려면 자국의 지배계급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팔레스타인 운동이 성공할 수 있고,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인종학살과 인종청소, 인종 분리 체제에 맞서 연대가 승리할 수 있다.
토론 정리
많은 질문에 감사를 표한다.
첫 번째 질문은 마르크스주의와 분트주의가 어떻게 싸웠느냐는 것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은 도망칠 것을 설파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분트주의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분트에는 ‘도이카이트(Doikayt)’라는 훌륭한 말이 있었다. 이것을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바로 여기에 있음’이라는 뜻이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인종차별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맞서 싸우라는 것이다. 당신이 소수자라면 혼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다수와 함께해야 한다. 다시 말해 주변의 노동계급과 함께해야 한다.
나중에 분트에서 나타난 문제들은 뒤에서 살펴보겠다. 그러나 처음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분트주의자들이 같은 혁명 조직에 속해 차르 체제를 전복하려 했다.
또 다른 질문은 우익 시온주의와 좌파 시온주의의 차이에 관한 것이었다. 그 차이는 매우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나크바를 자행한 것도 노동당식 시온주의였다. 1956년 수에즈 전쟁과 1967년 전쟁을 벌인 것도 노동당식 시온주의였다.
우익이 집권한 뒤의 차이라면 아마 팔레스타인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의 차이 정도일 것이다. 전면적 인종학살을 통해 처리할 것인가? 아니면 아랍인들을 억압하고 계속 쫓아내면서도 비교적 온건한 방식으로 실행 가능한 해법을 찾을 것인가?
민족주의에 관한 질문도 중요하다. 모든 민족주의는 지배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의 공통된 무언가가 계급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의 우익 민족주의는 억압하기 위해 단결하자는 것이다.
반면 피억압 민족의 경우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에 맞서는 것이다. 앞서 지적됐듯이 이것이 팔레스타인 운동의 정치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노동계급의 투쟁으로만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에는 한계가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승리하려면 아랍 노동계급과 세계 노동계급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 질문이 나왔던 레닌과 분트 문제로 다시 돌아가겠다. 이것은 흥미로운 문제다. 20세기 초에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분트주의자들은 함께 활동했다. 그러나 1903년에 그들은 갈라섰다. 분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노동계급 정체성보다 유대인 정체성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이라는 유대인 해방의 위대한 순간에 분트는 혁명의 바깥에 있게 됐다. 러시아 혁명은 역사상 처음으로 유대인들에게 완전한 평등을 부여했다.
분트는 분열됐다. 분트주의자 대부분이 분트를 떠나 공산당과 러시아 혁명에 합류했다. 이것이 민족주의, 심지어 가장 진보적인 민족주의조차 갖는 한계를 보여 준다.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언어 문제에 관한 질문도 답해 보겠다. 우선 오늘날 전 세계 유대인의 55퍼센트가 이스라엘에 산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유감스럽게도 이스라엘은 지금도 유대인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언어 문제를 보면 이스라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히브리어는 기독교의 라틴어처럼 죽은 언어였다. 죽은 언어였던 히브리어를 1890년대에 되살린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원래 살던 곳에서 사용하던 언어를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억눌린 것은 이디시어만이 아니다. 이스라엘로 온 아랍계 유대인들의 아랍어와 그들의 문화도 억눌렸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이 수세기 동안 향유해 온 옛 문화들의 시신 위에서 새로운 제국주의 문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유대인인가’라는 질문도 중요한 질문이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동화된 유대인이라는 범주가 있다. 그런가 하면 종교적 유대인도 있고, 비종교적 유대인도 있다. 좌파 유대인도 있고 우파 유대인도 있다. 그리고 오늘날 이 상이한 정체성들 사이에서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이스라엘 유대인의 차이에 관해 언급하고 싶다.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들은 빼앗은 땅 위의 빼앗은 집에서 살면서 인종학살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밖에 사는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훨씬 더 잘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흥미로운 통계가 몇 가지 있다. 미국은 이스라엘 다음으로 세계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은 곳이다. 여론 조사를 보면 미국 유대인이 일반 미국인보다 이스라엘에 반대할 가능성이 네 배나 높다. 세대별 차이도 크다. 젊은 층일수록 팔레스타인인을 지지하는 비중이 더 크다.
한편, 독일에서는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비판하다 유대인 혐오라는 죄목으로] 기소되거나 제재를 받을 가능성이 비유대인보다 125배나 높다.
그래서 “주적은 국내에 있다”는 말은 비유대인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유대인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운동을 건설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유대인인가 아닌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느 편이냐다.
이 기사와 함께 “시온주의의 유대인 역사 왜곡”을 읽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