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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극우 이재명 정부 팔레스타인과 중동 전쟁 이주민·난민 긴 글

서평 《기독교 시온주의와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이 기독교 시온주의에 속지 않게 도와주는 책

《기독교 시온주의와 팔레스타인》 미트리 라헵 지음, 정병준 번역, 동연 발행, 2026. 260쪽. 19,000원

이 책의 저자 미트리 라헵(Mitri Raheb, 1962~)은 팔레스타인인 루터회 목사이자 교육·문화 활동가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그곳을 활동의 중심으로 삼아 왔으며, 그곳에 있는 다르 알칼리마대학교의 설립자이자 현재 총장이다. 팔레스타인인이 고향에서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교육·문화의 기반을 만드는 일이 그의 주된 활동이다. 다르 알칼리마대학교와 비영리 교육·문화·지역사회 기관들의 연합체를 통해 예술·문화 교육, 청소년 활동, 지역사회 프로그램을 발전시켜 왔다. 그의 이런 활동은 팔레스타인인을 외부의 구호를 기다리는 피해자로만 바라보는 시각을 넘어, 스스로 문화를 창조하고 미래를 결정하는 주체로 세우려는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처지를 정착민 식민주의와 서구 제국주의의 역사 속에서 분석하는 급진적인 기독교 지식인이다. 서구 개신교 신학을 깊이 공부하면서도, 그것을 점령 아래 살아가는 팔레스타인인의 경험에 비추어 비판해 왔다. 점령을 정당화하는 신학을 거부하고 세계 교회의 연대를 촉구하는 ‘카이로스 팔레스타인’의 창립 참여자이자 문서 작성자이며, 점령과 폭력에 맞서고 평등과 공존을 추구한 활동을 인정받아 이스라엘 언론인 기드온 레비와 함께 2015년 올로프 팔메상을 받았다.

그의 저술을 관통하는 질문은 “팔레스타인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왜 서구의 성서 해석과 정치적 상상 속에서 도외시되는가”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 책도 ‘이스라엘’, ‘약속의 땅’, ‘선민’ 같은 개념이 어떻게 현대 국가의 땅 지배와 팔레스타인인의 권리 박탈을 정당화하는 데 동원되는지 분석한다. 특히 미국 복음주의 우파뿐 아니라,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을 이스라엘 국가의 신학적 옹호로 연결한 서구 진보·자유주의 신학까지 비판한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카를 바르트, 월터 브루그만, 롤프 렌토르프, 1995년 이전의 위르겐 몰트만 같은 유명하고 존경받는 학자들도 ‘홀로코스트 이후 신학’ 비판의 대상으로 언급된다.

미트리 라헵의 《기독교 시온주의와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끝없이 되풀이되는 협상 실패의 역사로 보는 통념을 뒤집는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땅은 빼앗겼고, 주민들은 쫓겨났으며, 식민 지배의 물질적 기반은 커졌다. 책은 이 연속성을 정착민 식민주의라는 개념으로 옳게 설명한다. 그래서 이 책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무기가 된다. 그러나 무엇을 해체해야 하는지 밝히는 분석과, 누가 어떤 힘으로 그것을 해체할지 제시하는 전략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이 간극이 책의 한계다.

책의 출발점은 명료하다.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등한 두 민족이 같은 땅을 두고 다투는 분쟁이 아니다. 유럽에서 생겨난 시온주의 운동이 제국주의 열강의 지원을 받아 선주민의 땅에 배타적 국가를 세우고 그 주민을 몰아내 온 과정이다. 양측의 불신과 증오를 똑같이 문제 삼으면 땅을 빼앗은 자와 빼앗긴 자의 관계가 가려진다. 이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화해를 위해 서로 양보하라는 요구는 결국 피해자에게 강탈의 결과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압력이 된다.

저자는 팔레스타인에서 진행돼 온 식민화 과정을 ‘점령’으로 설명하는 것조차 부정확하다고 주장한다. 밸푸어 선언 이래 이어진 토지 수탈과 선주민 배제, 정착촌 확장을 이해하려면 ‘정착민 식민주의’라는 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강조점은 1967년 이후의 군사 점령을 넘어, 이스라엘의 국가 건설과 확장을 더 장기적인 식민화 과정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데 있다.

정착민 식민주의는 보통의 식민 지배와 다르다. 보통의 식민 지배는 피지배 주민을 계속 지배하면서 그들의 노동을 착취한다. 반면 정착민은 땅을 영구히 차지하고 그곳에 자신들의 사회를 세우려 한다. 그들에게 선주민은 이 계획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다. 추방, 토지 몰수, 거주지 파괴, 인구의 격리와 분할은 모두 이 목적에 부합한다. 저자가 강조하듯 식민화는 과거에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재생산되는 질서다. 이 관점에서 보면 1948년의 나크바와 그 뒤의 정착촌 건설은 하나로 이어진 과정이다. 1

이 책의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저자가 고향 베들레헴을 분석한 서론이다. 책에 실린 집필 당시(아마도 2023년 직전)의 수치를 보면, 베들레헴 주 토지의 86퍼센트가 이스라엘 군대나 정착촌의 배타적 통제 아래 있었다. 팔레스타인 측에 남은 땅은 14퍼센트뿐이었다. 저자는 정착촌이 비옥한 서쪽 산비탈을 차지하고, 팔레스타인 도시와 마을을 에워싸고, 주민들이 새 주거지를 짓지 못하게 막는 과정을 추적한다. 식민화는 다음 세대가 살아갈 공간을 없애는 일이다.

사해 연안에 대한 설명도 눈에 띈다. 이스라엘은 주택 부지를 빼앗는 데 그치지 않고 관광 수입, 광물 자원, 수자원까지 장악한다. 군사훈련 구역으로 지정된 베들레헴 동쪽 땅 밑에는 지하수가 있다. 장벽과 정착촌, 군사 구역은 선주민을 생산과 생활에 필요한 자원에서 떼어 놓는다. 저자가 팔레스타인의 공간을 구멍 난 치즈에 비유하는 이유다. 이스라엘이 자원과 연결망을 차지하고, 팔레스타인인은 서로 떨어진 구멍 속에 갇힌다. 이런 생생한 묘사 덕분에 이 책은 흔한 억압 고발보다 훨씬 강렬하다. 1

저자는 지배가 역사와 지명에도 새겨진다고 지적한다. 파괴된 마을의 이름을 지우고 정착촌 이름으로 덮어쓰면, 그곳에 주민이 살았다는 증거가 흐려진다. 정착민은 본래의 주인으로, 선주민은 뒤늦게 나타난 방해꾼으로 둔갑한다. 그러나 이 비판을 누구의 조상이 더 오래됐는가 하는 경쟁으로 바꿔서는 안 된다. 저자도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인을 고대의 특정 집단과 단순히 동일시하는 주장을 경계한다. 해방의 정당성은 혈통의 순수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 거주와 생계, 쫓겨난 사람들의 귀환, 동등한 권리에서 나온다. 1

시온주의의 역사를 보는 관점에서도 이 책과 마르크스주의 관점은 뚜렷이 만난다. 영국의 밸푸어 선언은 단순한 외교적 호의가 아니었다. 영국은 중동의 전략적 거점과 교통로를 확보하려 했고,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제국에 쓸모 있는 동맹을 자처했다. 팔레스타인 주민 다수는 자기 땅의 장래를 결정할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다. 저자가 강조하는 이 박탈은 국가 건설 뒤에 생긴 일탈이 아니다. 처음부터 식민 사업을 가능케 한 조건이었다. 2

여기에 노동과 시장의 분리라는 물질적 내용을 보태야 한다. 팔레스타인 마르크스주의자 이갈 글리크슈타인(토니 클리프)은 히스타드루트가 아랍인 고용을 막고 아랍산 상품을 배척하던 경험을 회고한다. 집단농장이나 노동조합이라는 외양은 선주민 배제와 얼마든지 양립했다. 따라서 초기 노동 시온주의는 평화, 후대 우파 시온주의는 폭력이라는 식의 이분법은 틀렸다. 클리프의 증언과 함께 라헵의 분석을 읽으면, 정착민 식민주의의 뿌리가 특정 지도자(가령 네타냐후)의 악의나 최근 극우 세력의 부상보다 훨씬 깊은 사회적 원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3

일란 파페는 1948년 국가 건설의 핵심은 인종 청소였다고 강조한다. 4 라헵도 대규모 추방, 마을 파괴, 추방자의 재산을 몰수하는 제도를 하나로 연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주민들이 우연히 떠났다는 설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주민을 내쫓아 만든 인구 구성을 유지하려면 귀환을 막아야 한다. 그래서 난민 문제는 과거의 비극을 보상하는 부차적 의제일 수 없다. 귀환권을 부정하는 질서가 유지되는 한, 국가 건설 당시의 강탈은 현재의 지배 관계로 계속된다. 1

1967년 이후 이스라엘은 더 많은 땅을 차지했지만 그곳의 팔레스타인인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고, 이 모순은 계속 쌓여 왔다. 책은 영토 장악과 인구 통제 사이의 이 긴장을 잘 포착한다. 2026년 8월에는 정착민들의 공격과 함께 팔레스타인 가옥 포위, 전기·수도 차단, 사유지를 ‘분쟁 토지’로 재분류하는 조처가 진행됐다. 주민을 공격하는 정착민과 토지의 지위를 바꾸는 국가 기구는 같은 강탈 과정에서 손발을 맞춘다. 가자지구의 파괴도 이런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의 관계 속에서 분석해야 한다. 이 사건들은 라헵이 포착한 체제가 얼마나 파괴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 보여 준다. 5 6

책의 맺음말은 이스라엘을 제국의 일부이자 대리 세력으로 규정한다. 서방은 군사 장비와 정치적 보호를 제공하고, 이스라엘은 서방의 이익에 부응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2020년 아브라함 협정을 분석하면서도 아랍 군주국들의 거래, 이란 압박, 전략적 수로, 팔레스타인인의 고립을 짚는다. 이런 대목은 외교적 승인이나 지배자들의 태도 변화만으로는 팔레스타인의 탈식민화를 이룰 수 없다는 결론의 토대가 된다. 1

그런데 라헵은 서방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제국주의의 이해관계와 친이스라엘 로비의 압력 가운데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 끝내 명확히 정리하지 못한다. 로비가 정치인의 경력과 발언을 옥죈다는 설명은 여러 대목에서 강하게 나온다. 그렇다면 왜 로비의 요구가 국가 정책으로 그토록 효과적으로 관철되는가? 책은 이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정착민 국가라는 역사를 공유한다는 점도 두 나라의 현재 동맹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런 역사적 친연성이 오늘날 군사 지원과 외교적 비호로 재생산되게 만드는 구체적 이해관계를 밝혀야 한다.

롭 퍼거슨의 「시온주의 로비, 좌파와 극우」는 분명한 기준을 제시한다. 로비의 영향력은 미국 지배계급이 이스라엘을 중동 패권의 자산으로 여기는 관계 속에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랍 대중의 반란에 흔들릴 수 있는 친미 정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미국에 쓸모가 있다. 팔레스타인인 강탈에 의존하는 정착민 사회라는 특성이 서방과의 결속을 떠받치기 때문이다. 로비가 제국주의를 조종한다는 식으로 인과관계를 뒤집으면 미국 등 서방 지배자들의 책임이 흐려진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등 떠밀려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무고한 피해자가 아니다. 7

물론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해관계가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의 확장과 전쟁이 친미 아랍 정권의 안정을 위협하면 전술적 마찰이 생긴다. 그러나 이런 마찰을 후원 관계가 곧 무너질 징후로 봐서는 안 된다. 라헵이 열거하는 위선과 이중 잣대도 이 관계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서방은 자신이 내건 원칙을 몰라서 잘못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위해 그 원칙을 골라서 적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맞서는 운동도 지배자들을 계몽하려 하기보다 그들이 치를 대가를 키우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책은 이스라엘 비판을 반유대주의로 몰아 팔레스타인인의 입을 막는 행태도 비판한다. 정당한 비판이다. 동시에, 유대인을 하나의 정치 집단으로 뭉뚱그리거나 유대인의 은밀한 권력이 세계를 움직인다고 보는 설명은 반제국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책이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유대인들의 활동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일관된 반인종차별은 팔레스타인 해방의 일부다. 국가 체제(이스라엘)와 정치 운동(시온주의)을 비판하는 것과 출신을 이유로 사람들을 적대하는 것을 분명히 구분해야 운동의 목표와 동맹도 분명해진다. 1 7

오슬로 협정에 대한 책의 비판은 특히 날카롭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이스라엘을 인정했지만 그 대가로 독립도 주권도 얻지 못했다. 얻은 것은 극도로 제한된 ‘자치’뿐이었고, 영토와 국경, 정착촌과 난민 같은 핵심 문제는 뒤로 미뤄졌다. 협상은 식민화를 멈추지 못했고, 오히려 식민화에 시간을 벌어 줬다. 책은 팔레스타인 당국(‘자치정부’)이 식민 국가의 하청 기구가 됐다고까지 지적한다. 이 올바른 비판은 오슬로가 선의로 출발했으나 극단주의자들 때문에 좌초했다는 익숙한 설명을 반박한다. 1 2 8

그러나 PLO 지도부가 왜 이런 거래를 받아들였는지는 더 파고들어야 한다. 책은 국제적 고립과 세력 약화를 이유로 들지만, PLO 지도부의 계급적 이해관계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반면 필 마플릿의 「팔레스타인의 공포와 저항의 역사」는 팔레스타인 민족 내부의 차이를 드러낸다. 난민이 된 자본가와 빈농·노동자의 처지는 같지 않았다. 파타 지도부는 주변 아랍 국가의 지배자들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들이 통치할 국가를 추구했다. 이렇게 보면 오슬로는 단순한 오판이 아니다. 해방 투쟁의 지도부가 제한된 통치 기구의 운영자로 편입될 수 있었던 사회적(계급적) 기반이 거기서 드러난다. 9

책의 국제 원조 비판도 이와 이어진다. 국제 원조는 주민의 절박한 필요를 덜어 줄 수는 있어도 토지와 물, 이동에 대한 통제권을 돌려주지는 않는다. ‘좋은 통치’를 가르치고 시장경제에 편입시키는 사업은 팔레스타인인이 아직 독립할 준비가 안 됐다는 전제를 되풀이한다. 치안 기구 지원은 주민보다 이스라엘의 안전을 지키는 데 쓰인다. 강탈을 계속하는 체제가 만든 빈곤은 구호 사업으로 관리하고, 저항은 치안 문제로 다루는 것이다. 책은 자유주의적 평화 구축이라는 외관 뒤에서 작용하는 이 지배 방식을 폭로한다. 1

이렇게 보면 ‘자치정부’를 민주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면 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는 환상에 불과하다. 국경과 자원, 세입과 이동을 외부 권력이 통제하는 한, 행정을 개선해서는 종속 관계를 끝낼 수 없다. 노동자연대가 미국이 추진하는 무장해제, 기술관료 통치, 시장 개방을 한데 묶어 비판해 온 이유도 여기 있다. 주민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권한을 갖지 못하는 재건은 새로운 종속을 낳기 십상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원조와 자치에 대한 라헵의 문제 제기를 이어받는다. 10

‘두 국가 방안’에 대한 비판도 정착촌 때문에 국경선을 긋기 어려워졌다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압도적 군사력을 가진 이스라엘과, 조각난 영토에서 외부 자금에 의존하는 팔레스타인 ‘자치’ 기구 사이의 불균형을 지적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약하고 종속된 상태로 묶어 두려는 것은 일시적인 협상 태도가 아니다. 주민을 쫓아내고 세운 국가는 그 주민의 귀환과 자결을 억압해야만 자신을 유지할 수 있다. 필연적인 문제인 것이다. 소국(小國)이라는 명패를 단다고 이 관계가 바뀌지는 않는다. 11

그런데 저자는 두 국가 방안은 이미 너무 늦었고 한 국가 방안은 아직 너무 이르다고 쓴다. 연방, 국가연합, 스위스식 칸톤 등 여러 제도를 거론하며, 부족한 것은 모델이 아니라 식민 사업을 끝낼 의지라고 강조한다. 제도 설계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지적은 옳다. 그러나 누구의 의지가 어떤 투쟁으로 실현될지는 책에서 분명하지 않다. 국제사회가 두 국가 방안을 고집하니 대안은 시기상조라는 판단도 문제다. 국제사회의 정책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운동의 목표인데, 이런 판단은 그 목표를 오히려 뒤로 미룬다. 1

일관된 탈식민화의 기준은 난민의 귀환과 동등한 시민권, 토지와 자원에 대한 차별적 지배의 폐지다. 이스라엘 안의 팔레스타인인과 점령지 주민, 국외 난민을 서로 다른 문제로 쪼개서는 이 기준을 충족할 수 없다. 모든 주민이 동등하게 살아가는 단일한 민주적 국가를 지향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연방제든 자치제든 이 기준을 실현하는지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 민족별 구획만 다시 짜고 무력과 경제적 지배를 그대로 두면 종속은 이름만 바꿔 계속된다. 탈식민화는 기존 주민을 거꾸로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식민적 특권과 억압 기구를 끝내는 일이다. 11 2 8

국가 승인과 관련한 노동자연대의 입장은 명칭과 실제 권력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2025년 9월 가자지구 주민들은 삶의 터전이 파괴되는 와중에 나온 외교적 승인에 쓰라림을 토로했다. 2026년 10월 주민들은 지도와 현실을 보라고 요구하며, 되풀이되는 두 국가 약속 대신 실제 압력을 가해 달라고 호소한다. 이 목소리는 국제 여론의 변화가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외교적 양보는 운동의 성과로 활용하되, 무기 공급과 경제 협력을 끊는 행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승인에 만족하고 멈추면, 식민화가 계속되는 동안 지배자들에게 새로운 명분만 주게 된다. 12 13

여기서 책의 결정적 공백이 드러난다. 책은 팔레스타인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 분리와 거주지 분할을 비교하고, 법적 평등을 얻어도 경제적 지배는 남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중요한 문제 제기다. 그러나 두 사회에서 억압받는 노동자들이 차지하는 위치가 어떻게 다른지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남아공의 흑인 노동자는 생산을 떠받치는 핵심 세력이었다. 반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노동을 어느 정도 이용하면서도 상당 부분 배제했고, 전략적 산업에서는 주변으로 밀어냈다. 따라서 둘 다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규정만으로 같은 해방 경로를 끌어낼 수는 없다. 1 14

노동자연대의 분석은 바로 이 차이에서 출발한다. 팔레스타인 노동자의 파업과 대중 투쟁은 중요하지만, 이스라엘 경제를 마비시키는 데는 근본적 한계가 있다. 또, 이스라엘 노동계급 내부의 임금·복지 투쟁은 저절로 시온주의와의 결별로 이어지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인 배제에서 얻는 상대적 특권이 그들을 정착민 국가에 묶어 두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인 개개인의 생각이 영원히 고정돼 있다는 말이 아니다. 식민 지배에 맞설 주된 사회적 힘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에 관한 전략적 판단이다. 14

그 힘은 팔레스타인인의 저항과 결합할 중동 노동계급에 있다. 노동자연대는 아랍 지배자들과 아랍 노동자들을 구별한다. 친미 아랍 정권들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분노가 자국의 불평등과 억압에 맞선 반란으로 번질까 봐 두려워한다. 반면 노동자들은 생산과 서비스를 멈추고, 이스라엘을 떠받치는 지역 질서를 지탱하는 정권들에 도전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라헵이 국제 연대를 강조하면서도 이 사회 세력의 특별한 힘을 중심에 두지 않는 것은 결코 사소한 누락이 아니다. 3 15

팔레스타인 해방의 길이 카이로를 지난다는 클리프의 말은 팔레스타인인더러 외부의 구원을 기다리라는 뜻이 아니다. 팔레스타인인의 투쟁은 주변국 대중을 고무하고, 주변국 대중의 투쟁은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동맹을 약화시킬 수 있다. 이 상호작용을 가로막아 온 것은 주변 정권의 국내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민족주의적 지도 노선이었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아랍 지배자들의 외교에 맡기면 연대의 가장 강력한 잠재적 주체와 멀어진다. 그래서 민족해방과 지역의 사회혁명을 결합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9 14

같은 기준을 저항 조직에도 적용해야 한다. 식민 지배에 저항할 권리를 지지하는 것과 특정 지도부의 정치·군사 전략을 지지하는 것은 별개다. 노동자연대는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맞서 싸우면서도 그 지역 국가들에 대한 의존이라는 모순을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무장투쟁만으로 압도적 군사력과 서방의 후원을 돌파할 수 있느냐는 문제도 있다. 지도부를 비판하는 것은 저항의 정당성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저항이 더 넓은 대중의 힘과 결합해 승리할 길을 찾으려는 것이다. 9

국제 연대도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라헵은 BDS(불매·투자철회·제재) 운동에 대한 탄압을 비판하고, 팔레스타인과 다른 피억압 집단의 연대에서 희망을 찾는다. 여기에 생산과 유통을 움직이는 노동자의 힘을 더해야 한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이 그 가능성을 보여 준다. 팔레스타인 연대 단체와 노동조합의 공동 행동은 연대를 거리에서의 의사 표현에서 물류와 공급망 중단으로 끌어올렸다. 이것이 지배자들이 치를 대가를 실제로 키우는 길이다. 16 17

물론 노동계급의 힘만으로 전략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잠재력은 조직과 정치적 방향이 있어야 현실이 된다. 2011년 아랍 혁명 이후의 반혁명은 독재자가 물러났다고 해서 국가 기구와 지배계급이 패배한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도 대중 시위를 일터의 조직과 연결하고, 노동조합 지도부의 소극성을 넘어 행동을 확대하며, 자국 정부의 군사 지원에 반대해야 한다. 라헵의 책에 부족한 것은 낙관이 아니라, 바로 이런 힘을 어떻게 형성하고 전환할 것인가에 대한 분석이다. 6

라헵이 마지막에 강조하는 수무드, 곧 땅을 떠나지 않고 버티는 굳센 저항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선주민을 없애려는 식민 사업 앞에서 살아남아 공동체를 지키는 것은 그 목적을 좌절시킨다. 그러나 떠나지 않은 것과 해방을 쟁취한 것은 다르다. 정착민 식민 사업은 목표를 완수하지 못하고도 오랫동안 주민을 억압하고 그들의 삶을 망가뜨릴 수 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인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에서 식민 체제가 필연적으로 무너진다는 결론을 곧바로 끌어낼 수는 없다. 수무드를 승리로 이어 줄 사회 세력을 조직해야 한다. 1

《기독교 시온주의와 팔레스타인》의 가치는 강탈을 협상의 불일치로, 종속을 미완의 국가 건설로 포장하는 논리와 프레임을 걷어 내는 데 있다. 특히 토지와 자원의 통제, 오슬로 체제와 원조의 역할에 대한 분석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하다. 그러나 그 통찰을 끝까지 밀고 나가려면 정착민과 선주민의 대립을 제국주의와 계급투쟁의 관계 속에 놓아야 한다. 팔레스타인인의 저항, 아랍 노동자들의 혁명적 투쟁, 제국주의 중심부 노동자들의 행동을 결합하는 전망이 필요하다. 라헵이 선명하게 드러낸 식민 지배의 메커니즘을 실제로 해체하는 과제는 거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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