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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퇴진 운동 2023~24년 팔레스타인 투쟁과 중동 트럼프 2기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팔레스타인: 끔찍한 억압과 꿋꿋한 저항의 역사

팔레스타인인들은 “수무드(굳건함)”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들이 수십 년간 벌인 저항의 특징 하나는 팔레스타인 공동체가 억압, 탄압, 그리고 이제는 인종 학살 공격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만큼 굳건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1년 가까이 만행을 저지른 지금도 팔레스타인인들은 굴복하지 않고 있다.

제1차세계대전 종전 후 팔레스타인 땅은 영국의 통제하에 놓였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분쇄하려고 야만적 탄압을 자행했다. 영국은 아일랜드 봉기 때 사용한 진압 수법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썼다.

그러나 저항은 계속됐다. 여러 도시에서 시위가 벌어졌는데, 땅을 빼앗긴 농민도 이 시위에 참가하곤 했다. 1929년 투쟁이 벌어진 후 영국은 저항 세력의 핵심 지도자들을 투옥·처형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자가 늘어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은 두 개의 적에 직면했다. 하나가 영국이고, 또 하나가 시온주의 정착자들의 준군사 세력 하가나였다.

이 적들에 맞서 팔레스타인인들은 1936년에 팔레스타인 땅 전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인티파다(항쟁)’는 영국이 통제하려 애쓰던 대중 운동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보수적인 팔레스타인인 지도층조차 “총파업”(실제로는 협력 거부 대중 운동)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팔레스타인의 기존 지도층은 끔찍이도 타락해 있었다. 많은 식민지 해방 민족주의 지도층이 그렇듯, 이들도 자기 이익을 유지하는 데에 몰두했다. 개중에는 시온주의자들에게 자기 땅을 팔아넘겨 농민 수천 가구를 살던 곳에서 쫓겨나도록 한 자들도 있었다.

총파업이 시작된 지 6개월이 흐른 후 지도층은 이를 중단시켰지만 운동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이후 활동가들은 게릴라 투쟁을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팔레스타인 땅 대부분을 통치 불가능한 상태로 몰아넣었다.

여성들은 마을을 방어하고 점령군의 수색에 항의하는 데서 핵심적 역할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폭행을 당하거나 몇몇은 사살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한 시온주의 정착자 간부는 공식적으로 이렇게 시인했다. “그 여성들의 전투성은 아랍 민족주의의 염원이 얼마나 강렬한지 웅변하는 산 증거였다.”

결국 영국은 3만 군대를 투입해, 지금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자행하는 야만적 행위의 선례가 될 강도 높은 억압 통치를 했다.

영국군은 아랍계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의 37퍼센트에 해당하는 50만 명 이상을 구금하고 최소 5000명을 살해했다.

영국은 저항의 지도부를 사실상 제거했고, 시온주의 운동이 그 혜택을 입었다. 1948년에 시온주의자들의 전투 병력은 도합 9만 5000명에 이르렀는데, 영국이 그 핵심부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제공했다.

1948년에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인의 마을 수백 곳을 파괴하고 민간인을 학살하고 100만 명 가까운 팔레스타인인들을 살던 곳에서 내쫓았다. 이를 팔레스타인인들은 ‘나크바(재앙)’라고 부른다.

이스라엘이 퍼뜨리는 신화 중에는 1948년에 팔레스타인인들이 제 발로 살던 집과 땅을 떠났기 때문에 정착자들이 그곳을 차지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거짓말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나크바 동안에도 맹렬히 저항했다. 역사가 일란 파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마을을 “요새로 만들어 … 침략자들에게 압도되기 전까지 변변찮은 무기로라도 항전을 벌였다”고 설명한다.

나크바로 난민이 된 사람들의 운명은 계급에 따라 나뉘었다. 팔레스타인인 자본가들은 자신의 자본과 중동 지역의 인맥을 한껏 이용했고, 대개 목적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농민·노동자 대중의 운명은 달랐다. 북부 벽촌 지역의 팔레스타인 극빈층은 레바논으로 쫓겨났고, 오늘날에도 이들은 레바논에서 가장 가난하고 취약한 계층이다.

조직적 저항은 1960년대에 재개됐다. 이 저항은 걸프 연안국의 신흥 자본가 계급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 상징적 인물인 야세르 아라파트는 토목 기사 출신으로 쿠웨이트에서 백만장자가 된 인물이다.

아라파트와 동료들은 파타를 창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타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주름잡게 됐다. 1965년에 이들은 무장 저항을 시작했다. 요르단 계곡에 있는 카라메에서는 팔레스타인 저항 전사 수백 명이 탱크와 전투기를 동원한 수천 명의 이스라엘군에 맞서 싸웠다.

이들의 투쟁은 팔레스타인 해방의 대의를 크게 고무했다. 아라파트 그 자신은 사로잡힐 뻔했고 요르단을 통해 도망쳐야만 했다.

아라파트의 목표는 팔레스타인 해방이었다. 그러나 그의 염원은 다른 중동 국가들과 유사한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런 부르주아 민족주의적 접근법이 PLO의 프로젝트를 규정하게 됐고 결국 실패하도록 이끌었다.

파타는 가장 부유한 아랍 국가들과 협상을 체결했다. 파타는 그들에게서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는 대신, 중동 각국의 내정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불개입” 정책에 합의했다. 이는 재앙적 선택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아라파트와 PLO 지도자들은, 1968년 이집트에서 독재자 가말 압델 나세르에 맞서 분출한 대중 저항을 외면했다. 아라파트는 그 운동을 잠재적 동맹으로 여기지 않고, 이집트 통치자들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두려워했다.

1987년에 시작된 제1차 인티파다는 이스라엘 국가를 뒤흔들었을 뿐 아니라 아랍 세계 전역의 대중 운동을 고무했다 ⓒ출처 Efi Sharir/ Wikicommons

1987년에 서안지구·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새롭게 인티파다를 일으켰다. 이 항쟁은 4년 가까이 지속됐고 이스라엘에게 심각한 문제를 안겨 줬다. 팔레스타인의 모든 집단이 항쟁에 참가했는데, 이번 항쟁에서도 핵심 특징 중 하나는 여성이 운동에서 지도적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인티파다는 용맹하고 활력 넘치는 반제국주의 투쟁이었다. 이는 아랍 전역에서 연대를 고무했다. 요르단·수단·알제리·쿠웨이트·이집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 시위를 벌였다. 연대 파업이 벌어진 경우도 있었다.

아라파트는 기겁했다. 인티파다가 불개입 정책을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PLO는 중동에서 잠재력이 가장 큰 정치 세력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태도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었고, 이를 반길 만반의 태세에 있는 PLO를 이용해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여러 해 동안 후속 협상을 질질 끌었고, 마침내 2000년에 팔레스타인인들은 또다시 이스라엘에 맞서 인티파다를 일으켰다.

이번 인티파다 역시 아랍 세계 전역에서 행동을 촉발했다. 이집트에서 인티파다는 노동운동이 소생하고 2002년에 타흐리르 광장 점거 운동이 벌어지는 데에서 핵심적 구실을 했다.

오늘날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PLO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라파트는 “미니 국가”를 얻어 내려고 협상했지만, 이 “미니 국가”란 이스라엘군이 통제하는 서안지구 안에서 고립된 거주지들을 얼기설기 엮어 놓은 것에 불과했다.

이런 “미니 국가”를 위해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역사적 팔레스타인 땅의 많은 부분을 포기할 것을 요구받았다.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이 민족해방 투쟁의 지도자를 자임하며 부상했다. 사상 처음으로 이슬람주의자들이 전면에 서게 됐다.

하마스는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이 만들었는데,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은 팔레스타인에서도 회원들을 모았다.

여러 해 동안 이스라엘은 무슬림형제단이 PLO를 견제하리라 기대하고 그들의 활동을 용인했다. 이스라엘은 이슬람 사원 설립을 장려했는데, 그곳이 무슬림형제단의 근거지 구실을 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티파다가 시작되자 무슬림형제단은 하마스를 창설하고 무장 투쟁을 선포했다. 2001년에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하마스를 “테러리스트” 조직이라고 규정했다.

하마스는 2006년에 이스라엘 점령하의 팔레스타인에서 치러진 자유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강도 높은 탄압 정책을 폈고, 하마스의 지도자들을 암살했다.

하마스는 다른 이슬람주의 단체들이 그렇듯 모순투성이이다. 엘리트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이다. 하마스는 카타르·이란 같은 국가들의 지원을 받고,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하마스가 재정을 복지와 교육에 써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마스는 고물가와 실업에 항의하는 시위를 억압해 왔다.

그러나 하마스는 정착자 식민주의와 이스라엘의 지배에 반대하고, 여전히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조직이다. 최신 여론조사에서 하마스 지지율은 가자지구에서 40퍼센트를 기록했고, 서안지구에서는 60퍼센트가 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계속되는 저항이 하마스의 부상으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 청년들은 보이콧, 투자 철회, 제재를 요구하는 BDS 운동을 시작했다. PLO의 부역 행위에 격분한 이 청년들은 팔레스타인 해방의 대의를 국제화하기로 결심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의 역사는 매우 인상적이지만 유일무이한 사례는 아니다. 식민 지배를 당한 많은 사람들이 그에 맞서 오랜 시간 투쟁을 벌였었다.

팔레스타인인의 사례가 다른 점은 70년 넘게 한 팔이 뒤로 묶인 채 투쟁해 왔다는 것이다.

나크바로 팔레스타인인 대부분이 피란민이 되고, 팔레스타인 공동체가 원자화되고, 팔레스타인 사회의 역량이 약해졌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다른 민족 해방 운동이 가진 경제적·정치적 수단이 많이 결여돼 있다.

따라서 중동 전역에서의 강력한 노동계급 투쟁이 팔레스타인 해방에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팔레스타인을 변화시킬 열쇠는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아랍 나라들의 산업 도시에 있다. 그러나 이 저항에 영감을 받은 우리 모두에게도 BDS 운동을 건설하는 데에서 할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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