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번지는 청년 반란:
청년들은 왜 들고일어났고,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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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의 저항이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알바니아, 그리스 등 유럽 곳곳에서, 그리고 인도와 인도네시아, 아르헨티나까지.
국경을 넘어 번지는 청년들의 저항은 나라마다 직접적인 계기는 다르지만 비슷한 불만과 분노를 배경으로 한다. 주거난, 취업난, 생활고 등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생활고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가한 한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 “가진 것도,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갈 방법조차 없는 미래가 전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MBC 10월 25일 자 보도)
게다가 전쟁과 기후 위기가 청년들의 현재와 미래를 위협한다. 앞으로 청년들이 살아가야 할 세계는 그야말로 재난의 시대다.
그러나 자본주의 정부들은 해결책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오히려 ‘항구적 재난’이 된 자본주의 체제를 떠받치려 분투하고 있다. 긴축 정책으로 정부가 직접 대중의 숨통을 옥죄기도 한다.
오늘날 청년들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태어났고, 신자유주의를 주도한 중도 정치의 실패를 목도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중도 세력에 대한 청년들의 불신이 팽배하다.
청년들이 보기에 주류 정치는 자신의 삶을 개선해 주지 못한다. 그런 정치적 소외 때문에 냉소와 환멸, 좌절감에 빠지는 청년도 적지 않다.
누적된 불만은 어떻게 저항으로 분출하는가
주류 정치에 실망했다고 해서 곧바로 집단적 저항을 대안으로 여기게 되는 것은 아니다. 불만을 품으면서도 기존 제도 안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정부가 약속을 지키기를 기다리거나, 선거에서 다른 정당이 승리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런데 청년이 보기에도 현실은 이렇게 변화하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처럼 체제의 복합적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에서는 매우 유동적이고 빠르게 변화한다.
그럴 때 대중의 의식은 점진적이고 평온하게 변화하기보다는 갑작스럽고 격렬하게 바뀔 수 있다. 정부의 새로운 공격이나 특정 사건이 계기가 돼, 오랫동안 쌓인 울분이 커다란 투쟁으로 분출할 수도 있다. 지금 국제적 저항에서처럼 말이다.
또, 사람들은 다른 나라나 집단의 저항을 보며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 투쟁 자체가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킨다는 점도 중요하다. 처음에는 제한된 요구를 내걸고 나섰다가 정부의 거부와 탄압, 다른 집단의 연대를 경험하면서 체제를 새롭게 이해하고 대중 투쟁의 힘을 자각할 수 있다.
청년·학생들은 신속하게 행동에 나설 수 있다. 그들은 기성세대에 비해 일터나 피부양 가족에 매인 정도가 느슨하다.
특히, 노동자들과 달리 대체로 일터의 규율에 묶여 있지 않고 생계 책임에도 덜 얽매여 있다. 학교에 모여 있어 토론하고 조직하기도 쉽다. 소수의 선도적인 행동으로도 시위나 점거를 시작할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반복된 고된 일상과 착취, 정치적 배신을 겪은 기성세대보다 새로운 저항의 가능성에 더 과감하게 반응할 수도 있는 것이다.
청년들의 분노는 어디로 향할까
그러나 청년·학생은 단일한 사회 집단이 아니다. 정치 성향도 단일하지 않고, 특히 계급에 편입되지도 않았다.
상당수 청년은 이미 노동계급의 일부지만, 모든 청년이 노동계급인 것은 아니다. 학생은 독자적인 하나의 계급을 이루지 않으며, 가족 계급 배경과 앞으로 차지할 사회적 지위가 다양하다.
게다가 청년들의 불만은 우경화로 향할 수도 있다. 적잖은 청년이 극우를 대안으로 여긴다. 중도 정치 세력의 위선과 배신은 극우가 활개 치는 토양이 된다.
극우는 청년들의 절망과 환멸을 적극적으로 파고든다. 특히 극우는 청년이 겪는 고통의 원인을 호도하고 분노를 표출할 초점을 제공한다.
물론 극우가 과녁으로 삼는 것은 청년들의 고통에 책임 있는 지배자들과 체제가 아니라 좌파, 이주민·난민, 여성, 성소수자다.
그러나 청년들이 왼쪽으로 급진화할 가능성도 있다. 2010년대 후반 국제적으로 일어난 기후 운동은 매우 젊고 활력 넘치는 운동이었다. 당시 청년들은 “기후 변화가 아니라 체제 변화”를 요구했다.
현재 글로벌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글로벌 청년 세대 급진화의 한 축이 됐고 국제적 연대의 상징이 됐다. 프랑스 등지에서 일어난 국제적 시위들에서 케피예를 두르고 팔레스타인 깃발을 흔드는 청년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요컨대 청년들의 분노가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극우가 급진적 대안 세력을 참칭하며 청년들에게 접근하는 상황에서, 좌파가 지배자들과 체제를 겨냥한 급진적 주장과 대안을 내놓고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노동계급의 투쟁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
청년들이 왼쪽으로 급진화하더라도, 젊다는 것 자체가 사회를 변혁할 힘을 지녔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청년들의 저항은 더 광범한 노동계급의 집단적 투쟁과 결합돼야 한다.
노동계급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투쟁에서 결정적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집단적으로 일손을 멈춰 자본의 이윤 창출에 타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년들의 저항을 잔인하게 짓밟으려 하는 정부와 국가기구들도 노동자들의 나날의 노동 없이는 한순간도 유지될 수 없다.
청년 노동자를 포함한 노동계급은 지배자들과 체제에 맞서는 청년 저항에 함께할 이해관계가 있다. 수많은 기성세대 노동자들도 청년들의 불만과 분노에 공감한다. 이들도 정치인들의 온갖 미사여구가 가득한 약속을 듣고 배신당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안다.
학생들을 비롯한 청년들이 앞장선 저항이 더 광범한 노동계급의 집단적 투쟁을 고무하는 일이 역사에서 여러 차례 있었다. 학생들이 앞장서고 노동자들도 대거 참가한 한국의 1987년 6월 항쟁은 7~8월 노동자 대투쟁을 고무했다. 1968년 프랑스에서는 학생들의 저항이 노동자 1,000만 명의 파업으로 이어졌다.
기성세대 노동자들은 저항에 나서는 청년들을 보며 새 시대에도 변화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며 고무될 수 있다.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프랑스 시위에는 저항에 나선 청년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팻말들이 등장하고 있다. 프랑스 그르노블의 한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이 우리를 일깨웠습니다.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입니다!”(〈플라스 그르네〉, 10월 6일 자)
요컨대 청년들의 저항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이라고 부른 노동계급의 투쟁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청년들의 반란이 진정한 변화의 기회를 열어젖힐 수 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국제적 저항이 노동계급의 투쟁과 결합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특히 노동계급의 고유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파업이 동반돼야 한다.
새로운 가능성과 혁명가들의 과제
하지만 이런 가능성이 저절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투쟁의 확산을 제약하거나 운동을 의회적 해결에 종속시키려 할 것이다.
이런 장애물을 넘어 청년들의 저항과 노동자들의 투쟁을 결합하고 발전시키는 데서 혁명가들의 의식적 개입과 노력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혁명가들은 운동의 전진을 가로막는 주장과 전략에 맞서며, 학생과 노동자 사이의 연대와 공동 행동을 조직하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투쟁을 확대하도록 힘써야 한다.
현재 일어난 국제적 저항의 물결은 이런 개입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국제적 저항이 모든 나라에서 같은 속도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저항은 한국의 청년과 노동자들에게도 자극과 자신감을 줄 수 있다. 한국에서도 그런 기회가 생겨날 수 있으며, 그 가능성을 포착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