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행동과 원탁회의 안에서 진보당의 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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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윤석열 즉각 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하 비상행동)과 야5당 원탁회의(이하 원탁회의)는 ― 이 둘을 합쳐 역사적으로는 민중전선이라고 한다 ― 공동 입장문을 채택했다. 내란 세력 종식과 재집권 저지, 사회대개혁을 위해 협력한다는 것이 주내용이었다.
극우 압력 증대의 효과로 윤석열이 석방된 지 이틀 뒤였다. 원탁회의와 비상행동은 좌측으로부터의 비판을 봉쇄하고자 단결 호소 메시지를 내놓았다. 원탁회의에 참가하지 않고 있던 정의당도 공동 입장문에 서명했다.
특히, 비상행동 집회에서 공공연하게 야당 정치인들이 발언하게 됐다. 그러나 공동 입장문에 윤석열 파면 투쟁이나 극우 반대 투쟁을 위한 구체적 실천 방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원탁회의는 서울 서부지법 폭동 사태 등으로 극우의 위협이 현실로 다가온 2월 19일 출범했다(정식 명칭은 ‘내란종식 민주헌정수호 새로운 대한민국 원탁회의’).
민주당·진보당·조국혁신당·기본소득당·사회민주당이 거기에 참가하고 있다. 노동자 정당인 진보당이 자유주의 정당들과 협력하는 구조이다.
민중전선의 본질은 계급을 초월한 국민적 동맹을 위해 좌파 정당들과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정당들이 맺는 전략적 연합이다.
민주당의 ‘진보성’은 일부 모호한 사회 개혁(가령 기본사회 공약)에서 겨우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도 진보당은 민주당과의 동행을 추구한다. 민주당과의 연립정부에 참가해 진보적 개혁 정책들을 실행한다는 민주대연합 전략을 90년 된 역사적 전통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극우를 저지할 방화벽이 아니다. 극우를 저지할 수 있는 결정적인 힘은 노동계급에게 있는 데 반해, 민주당의 궁극적 임무는 자본주의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계급의 저항을 설득해서 억제하는 것이다. 과거 민주당 정부들이 한 일이다.
따라서 민중전선은 좌파 정당이 극우에 맞서 헌법과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구실로 노동계급의 독립적 목표와 수단을 억제하고 자본주의의 전반적 질서 유지와 제한적 개혁에 종속시키는 전략이다.
민중전선이 그 90년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음은 수십 차례 입증됐다.

민주당의 진보적 날개
민중전선은 이미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시험 가동을 했다. 민주당·진보당·기본소득당·사회민주당은 선거 연합 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을 결성했다.(조국혁신당은 그때는 독자 출마했다.)
총선이 끝난 뒤 더불어민주연합은 해산됐다. 하지만 진보당의 민중전선 전략은 폐기되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지난해 11월 반윤석열 투쟁이 점화되자, 특히 윤석열의 12.3 군사 쿠데타(미수)를 계기로 민중전선은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원탁회의가 공식 결성되기 석 달 전에 이미 민중전선은 실질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30년대 프랑스 민중전선 결성 과정도 그 비슷했다. 민중전선 협정이 공식적으로 체결된 것은 1935년 7월이었다. 그러나 민중전선은 이미 1934년 10월부터 가동됐다. 1934년 10월 24일 자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인류)의 한 기사에서 민중전선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날 공산당 대표 모리스 토레즈는 급진당 (1870년 프랑스 제3공화국 수립 이래 가장 주된 자본주의 정당) 대회에 전격 참석해 “평화와 자유를 위한 민중전선”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다.
급진당은 당명과 달리 전혀 급진적이지 않은 정당이었다. 그렇기는커녕 프랑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이익을 확실하게 대변하는 정당이었다.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급진당을 “프티부르주아지의 전통과 편견에 가장 잘 적응한 대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도구”라고 지적했다.
민주당과 진보당이 윤석열의 쿠데타 기도를 저지하는 데서 주도적 구실을 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12월 3일 쿠데타의 밤 때 계엄 해제 결의를 위해 국회의사당으로 모이라고 야당 의원들과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진보당은 국회의사당 앞 거리에서 계엄군에 맞선 시위를 이끌었다.
물론 이재명 대표가 호소하기 전에 이미 평범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국회의사당 앞에 모이고 있었다. 진보당은 그렇게 모인 대열에 구호 선창 등 리더십을 제공했다. 그 덕분에 민주당뿐 아니라 진보당의 지지율도 올랐고 당원 수도 급속히 증가했다.
그러나 진보당은 민중전선 전망에 따라 스스로를 민주당의 진보적 날개로 자리잡았다. 특히, 헌법과 법을 극도로 존중했다.
이재명 대표는 국회에서 윤석열 탄핵안이 가결된 다음 날(12월 15일) 한덕수 대행 체제를 인정했다. 그는 자신이 “국정 안정”을 이끌어낼 능력이 있음을 지배계급에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윤석열과 쿠데타 옹호 세력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여전히 국가기관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민주당이 통제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국회 다수 의석뿐이었다.
한덕수는 ‘윤석열 없는 윤석열 정부’를 운영하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민주당은 열흘 정도 시간을 낭비한 뒤에야 비로소 한덕수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다.

진보당은 민주당의 불길한 타협을 비판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진보당은 국가기구의 민주화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무렵 커지기 시작한 헌법에 대한 개혁주의적 환상(“헌법 공부 열풍”)에 편승한 것이기도 했다. 인터넷서점 ‘예스24’는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 헌법 관련 도서 판매가 두 달 연속 증가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바로 그 시기에 윤석열은 관저에서 농성하며 극우를 결집시키고 있었다.
진보당은 1월 19일 서울 서부지법 경내 폭동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도 극우의 위협을 과소평가했다. 1월 초 극우가 대통령 관저 앞으로 집결하고 있을 때도 진보당은 소수의 학생 당원들을 그곳에 배치했다. 주력 부대는 비상행동의 경복궁 앞 집회에 있었다.
서부지법 폭동은 극우의 위험성을 분명하게 보여 줬다. 비록 경찰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극우는 정치적 존재감을 과시했다. 극우가 한국 공식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세력으로 떠올랐음을 보여 준 것이다.
그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특히, 3.1절 극우의 대규모 동원 이후로는 우리 측에서 거리 항의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본지가 강조한 바로는 노동자 대파업이 필요했다. 그래서 극소수 엘리트 헌법재판관들이 아니라 평범한 대중이 정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 줘야 한다.
진보당은 민주노총의 상층과 기층 모두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민주노총에 파업을 촉구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폭동 가담자들에 대한 엄정 수사와 처벌을 경찰에 촉구했다.
진보당은 노동자 파업이 민주당을 기겁하게 만들까 봐 파업 촉구를 하지 않은 것이다. 민주당과 노동자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때, 진보당은 전자를 택한 것이다.
민중전선은 극우를 막겠다며 결성됐다. 그러나 극우에 맞설 수 있는 핵심 세력인 노동계급의 고유한 힘을 발휘케 하려 하지 않는다. 계급투쟁을 고무하지 않고 무마하려 한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진보당은 쿠데타에 맞선 최초의 거리 항의에서 주도적 구실을 했다. 그러나 진보당은 민중전선 전략에 따라 주요 고비 때마다 윤석열 탄핵 운동이 민주당이 설정한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도록 애썼다.
가령, 1월 초순 윤석열이 관저에서 공수처의 체포영장 집행에 저항하자, 비상행동 내에서 소수는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호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보당계 파견자들은 이 제안을 반대했다.
민주당은 한사코 합헌적 틀 안에서 움직이고, 진보당은 민주당과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타협적 선택을 해 온 문제들이 누적되면서 이제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탄핵 심판은 오리무중 상태가 됐다.
민중전선은 사회대개혁을 가져다 줄 수 없다
진보당은 민주당과의 동맹을 중시하면서도 사회대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해 좌파적 차별성을 드러낸다.
사회대개혁 슬로건은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개혁 정책으로 사회를 진보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전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주의 시스템은 경제·지정학·정치·기후 위기 등 다중적 위기를 겪고 있다.
사실상 무솔리니 감옥에서 사망한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위기가 결합되는 상황을 두고 자본주의의 “유기적 위기”라고 불렀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배계급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체제를 정당화시키는 능력이 흔들린다. 대중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문제를 지배자들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리 되면 정치인·기업주·매스미디어가 설파하는 세계관에 의문을 품게 된다. “우리가 가능한 최선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자본주의 변호론자들의 주장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외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배계급과 그 국가 기관들이 신뢰를 잃은 심각한 불안정의 순간이다. 그람시는 이를 두고 “권위의 위기”이자 “국가의 전반적인 위기”라고 썼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자들은 권위주의적 수단을 강화해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다. 윤석열은 군대와 경찰 등 무장 기구들을 동원해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려다 일단 저지됐다.
그러나 민중전선은 위기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민중전선은 노동계급 운동이 자본주의 국가의 관료 기구와 위로부터의 미온적 개혁에 의존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기껏해야 미온적인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의 “유기적 위기”를 해결할 수는 없다.
민중전선 정부가 사회대개혁을 실행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공직 차지를 국가 권력 장악으로 혼동하는 데서 비롯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의 비인격적 관료 기구는 매우 견고한 요새의 외부 방어벽 같은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국가를 이루는 관료 기구는 선출되지 않으며 어떤 민주적 통제도 받지 않는다. 그것들은 지배계급의 수단이요 무기다. 윤석열 쿠데타 기도에 관여한 고위 국가 관료들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따라서 선거를 통해 의석을 늘리고 정부 직책들 몇백 개를 차지한다고 해서 국가 기구들의 방해를 뚫고 사회대개혁을 실행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몽상적인 전략은 노동계급을 정치적·조직적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장 해제시킬 뿐이다.
민중전선 정부는 대체로 두 가지 결말을 맞이했다.
하나는, 지배계급이 민중전선 정부를 전복시켰다. 아옌데는 “사회주의로 가는 칠레의 길,” 즉 의회주의적 길을 매우 만만찮게 추구했지만 지배계급은 무자비하게 방해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민주적이고 군대가 “병영에 머물러 있다”던 나라에서 1973년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지배계급은 노동운동이 자기들에게 가한 공포에 대해 피의 대가를 치르게 했다.
다른 결말도 있다. 민중전선 정부가 지지자들을 배신하고 지배계급의 요구에 순응한 사례다. 1981년 프랑스에서 사회당 소속의 미테랑이 대통령이 됐고, 공산당은 미테랑 정부에 참여했다. 그러나 미테랑 정부는 1983년에 국유화 정책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180도 선회해 지지자들의 희망을 짓밟았다.
역사적으로 민중전선 정부는 첨예한 계급 갈등, 대중 운동의 성장, 정치적 급진화를 배경으로 집권했다. 아옌데의 민중연합 정부가 1970년에 집권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사회대개혁 약속이나 민중전선 정부가 대중 운동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대중 운동이 민중전선 정부를 등장케 하는 조건을 만든 것이다.
재난이 예외가 아니라 정상이 되고 있는 위기의 시기에 노동계급과 차별받는 다른 사람들이 함께 대중 투쟁을 벌이며 자체의 민주적 투쟁 기관을 발전시키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