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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위헌 심판:
여성 자신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낙태죄 위헌 소송의 선고가 헌법재판소 재판관 둘의 임기가 끝나기 전인 4월 11일에 나올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신임 재판관들의 요구로 헌재 결정이 미뤄질 수도 있다고 한다.

낙태한 여성과 낙태 시술을 한 의료인을 처벌하는 형법 조항(269조 1항과 270조 1항)이 헌재의 심판 대상이다. 형법은 임신한 여성이 낙태를 하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2백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의사 등 의료인들이 요청을 받아 낙태를 하면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낙태죄 조항들은 7년 전인 2012년 4:4로 합헌 결정이 내려졌다. 그 뒤 낙태죄 폐지 여론은 성장해 왔다. 올해 2월 정부 실태조사 결과에서 응답자 중 75.4퍼센트가 낙태죄 개정에 찬성했다. 3월 29일 한국갤럽이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필요할 경우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는 응답이 77퍼센트(남성 79퍼센트, 여성 75퍼센트)였다. 특히 20대와 30대는 각각 85퍼센트, 94퍼센트의 압도적 비율로 ‘필요시 낙태 허용’에 찬성했다.

이제 대다수 사람들은 낙태 금지법이 터무니없다고 여기고 있다. 낙태죄는 즉각 없어져야 한다.

비웨이브 주최 집회 올해 3월 9일 비웨이브가 주최한 19차 '임신 중단 전면 합법화 시위'에 여성 4천 명이 모였다. ⓒ이미진

낙태죄 폐지

한국에서 낙태로 실형 선고가 나오는 일은 드물지만, 낙태죄가 ‘사문화’된 것은 아니다. 낙태가 형법상 범죄로 남아 있는 한 여성과 의사는 언제든 경찰 조사와 처벌을 받을 수 있고 낙태 단속도 강화될 수 있다. 낙태 반대 의사들이 2009년 말 낙태 시술 의사를 고발했고, 지난해 말 남해 경찰서가 낙태 수술 여성을 색출하려 했다.

이런 일들은 여성뿐 아니라 의사도 위축시킨다. 산부인과 의사인 윤정원(성과재생산포럼 기획위원)은 낙태가 불법인 탓에 임신중절 수술을 하는 의료인이 줄고 있다고 지적한다. 보건복지부 조사에서 임신중절시술을 하고 있다고 보고한 의료기관은 2005년 전체 산부인과 의료기관의 80퍼센트였다. 2009년에는 임신중절수술의 경험이 있는 의사 비율이 58.3퍼센트, 2010년에는 49.3퍼센트로 줄었다.

이 때문에 여성들이 병원에서 낙태를 거부당하는 일이 증가하고 낙태 비용이 높아질 수 있다. 최근 〈여성신문〉이 7개 산부인과 병원을 조사했는데, 수술비가 임신 7주에 무려 80만~100만 원이었다. 임신 13주에는 100만~180만 원이었다.

임신 초기에 안전하게 낙태할 수 있는 약인 미프진이 이미 수십 년 전에 개발됐지만 한국에서는 이를 합법적으로 구입할 수 없다. 정부는 낙태 약을 판매하거나 제공하는 해외 사이트 접속을 차단해 왔다.

낙태를 죄악시하며 여성의 몸과 삶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모두 사라져야 한다. 낙태죄 폐지는 물론, 여성이 요청하면 낙태할 수 있는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누구도 여성에게 원치 않는 임신을 지속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낙태권

낙태 수술과 약은 의료보험을 통해 무상으로 제공돼야 한다. 피임도 마찬가지다.

사유와 기간 제한, 상담 의무화 등의 제한 없이 여성의 낙태권이 온전히 보장돼야 한다. 여성이 낙태하려는 사유를 제3자에게 해명하고 승인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기간 제한 역시 불필요하다. 해외 낙태권 운동의 구호처럼 ‘가능하면 조기에, 필요하다면 늦게라도’ 여성은 낙태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상담은 의무가 아니라 여성의 선택 사항이 돼야 한다.

낙태 반대론자들의 궤변과 달리, 태아는 결코 모체와 별개의 독립적 생명체가 아니다. 태아의 생명권 주장이 잘못된 이유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가 살아 숨쉬는 여성의 삶보다 우선할 수 없다.

지난 주말에 영아 유기 사건이 잇따르면서 낙태 금지론자들은 또다시 ‘생명 윤리’ 운운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미혼 여성에 대한 천대나 가난이다. 도덕적 설교로 현실을 회피하지 말고 이미 태어난 아이들이 힘겹게 살아가거나 버려지는 현실을 주목해야 한다. 낙태 금지가 아니라 사회가 양육을 책임지는 게 절실하다.

지난해 7월에 열린 낙태죄 위헌·폐지 촉구 퍼레이드 7월 7일 모낙폐 등 71개 단체들이 주최한 집회에 2~3천 명이 모였다. ⓒ이미진

낙태죄 반대 운동은 대중 운동으로 성장해야

올해 2월 〈경향신문〉은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헌법불합치 판결이 나오면 국회는 법률을 개정해 낙태 허용 조건을 정해야 한다.

경향신문의 전망은 낙태죄 폐지 여론이 높다는 점과 2012년의 헌법재판관들이 대부분 물갈이 되면서 자유주의적 재판관들이 다수가 됐다고 보기 때문인 듯하다.

위헌 판결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번에는 그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어쩌면 판결이 연기될지도 모른다. 헌재는 매우 보수적인 국가기관이므로 여론조사 결과를 단순히 반영하지 않는다. 간통죄는 1988년을 시작으로 네 차례나 헌법소원이 제기됐지만 2015년에야 폐지됐다.

지배자들은 ‘심각한’ 저출산 때문에 생산 가능 인력이 부족해져 ‘국가경쟁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다. 지난해 출산율이 1명 미만으로 떨어졌다고 호들갑을 떠는 언론 보도와 국책 보고서가 많다.

물론 낙태 문제에서 지배계급의 입장이 통일돼 있지는 않다. 지배계급 일부는 낙태 금지를 완화하기를 바란다. 신임 헌법재판소장과 일부 헌법재판관들이 초기 낙태를 허용하자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지난해 여가부도 낙태죄 폐지 입장을 헌재에 제출했다.

그럼에도 낙태를 일부 허용하자는 입장이 지배계급 다수의 견해는 아닌 듯하다. 문재인 정부만 해도 법무부는 낙태죄 유지 입장이고 보건복지부는 불법낙태 시술 의사 처벌을 강화하는 의료법 시행 규칙을 지난해 발표했다(의사들의 반발 때문에 헌재 판결 뒤로 시행을 유보했다).

특히, 현 헌법재판관의 다수가 위헌 입장은 아닌 듯하다. 셋만이 위헌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위헌 결정이 나오려면 9명 중 6명이 위헌 입장이어야 한다). 더욱이, 이번 낙태죄 심판의 주심인 조용호는 낙태죄 유지 입장이다.

따라서 낙태가 합법화되려면 낙태권 운동이 헌재 판결에 좌우되지 말고 장기적 시각에서 아래로부터 운동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대중 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지난해 아일랜드에서 낙태가 국민투표로 합법화된 것을 자유주의 언론이나 여성운동 일각에서는 아일랜드 총리나 전문가들의 노력 덕분으로 여긴다. 그렇지 않다. 아일랜드 낙태 합법화는 수십 년 동안 일어난 낙태권 운동이 최근 몇 년 간 대중 운동으로 성장한 덕분이었다. 기층에서 조직된 거리 시위가 수만 명 규모(한국으로 치면 수십만 명에 해당)로 몇 차례 일어났다. ‘이윤보다 인간을’ 소속의 사회주의자들이 대중 운동 건설에서 주도적 구실을 했다.

올해 3월 9일과 30일, 비웨이브와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모낙폐)이 주최한 집회가 각각 열렸다. 특히 비웨이브 시위는 젊은 여성 4천 명(주최 측 추산)이 모여 이 운동이 등장한 이후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비웨이브 집회는 급진적이고 투쟁적이라는 장점이 있다. 이 집회는 태아의 생명권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여성의 임신 중단 전면 합법화를 옹호한다. 문재인 정부와 입법부, 사법부를 거침없이 비판하기도 한다.

약점도 있다. 남성 비하 발언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남성과 ‘운동권’ 배제 방침이 그것이다. 이는 낙태권 운동이 대중 운동으로 성장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다.

비웨이브가 내건 ‘임신 중단 전면 합법화’라는 급진적인 요구를 성취하려면 운동의 규모가 수천 명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대규모 운동으로 성장해야 한다. 운동이 성장하게 되면 낙태 반대론자들의 반격도 거세질 것이다. 따라서 투쟁성뿐 아니라 광범한 대중의 참가를 고무하는 게 필요하다. 낙태죄 폐지를 지지하는 여성과 남성이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환영하는 게 바람직하다.

노동계급의 쟁점

낙태는 여성의 자기결정권 문제일 뿐 아니라 노동계급의 쟁점이다. 낙태 불법화로 가장 피해를 받는 사람들은 노동계급의 여성들이다. 부유한 여성들은 낙태가 금지됐어도 늘 낙태를 쉽게 할 수 있었다. 또한 노동계급은 낙태죄 유지에 이해관계가 없다.

역사적으로 많은 노동계급의 여성과 남성이 여성의 낙태권을 지지하며 운동에 동참해 왔다. 국민투표 승리로 올해부터 낙태가 부분 합법화된 아일랜드에서도 남녀 노동계급이 운동에 대거 참가했다.

특히, 1920년에 세계 최초로 여성의 요청에 따른 낙태를 합법화한 나라는 바로 1917년 노동자 혁명으로 세워진 소비에트 러시아였다. 배우자나 의사의 승인을 요구하지 않았고 여성에게 낙태 사유를 해명하라는 조건도 없었다. 닉태 시술은 소비에트의 병원에서 하도록 법률에 명시됐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대중 운동으로 낙태가 합법화돼도 이내 반격이 일어난다. 미국, 스페인, 이탈리아 등 낙태가 합법화된 서구에서 낙태권 공격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이런 반격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서도 노동계급이 광범하게 동원돼야 한다. 1970년대 영국에서 보수당 정부가 합법 낙태를 축소하려 하자, 영국노총(TUC)이 최대 8만 명 규모의 대중 시위를 이끌어 저지한 경험이 있다. 이때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조합들이 낙태권 공격에 반대하는 공식 입장을 채택하고 운동에 앞장서도록 촉구하는 데서 핵심적인 구실을 했다.

한국의 낙태권 운동은 이런 노동계급의 투쟁과 여성운동의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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