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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의 역사 ─ 원시 사회에서 자본주의까지

지난해 낙태 처벌을 강화하려는 박근혜 정부의 시도는 좌절됐다. 그러나 한국 형법은 여전히 대부분의 낙태를 범죄로 취급한다. 기독교 우익들은 “태아의 생명권” 운운하며 낙태권을 인정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태아에게 권리가 있다는 개념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했다. 독일 사회주의자 단체 ‘마르크스21’의 로제마리 뉘닝이 낙태에 관한 생각이 지난 수천 년에 걸쳐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본다. 참고로, 현재 독일 법은 임신 12주 이내의 낙태는 허용하고 그 이후 시기 낙태에는 제한을 두고 있다.

해마다 베를린에서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참가자 수천 명을 조직해 행진을 벌인다. 이들은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 “신이 부여하는 생명”이 시작되기 때문에 (즉, 몇 개의 세포로 이뤄진 덩어리에 영혼이 깃든다며) 수정란을 인간과 똑같이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장 근본주의적인 세력이다.

이처럼 이른바 태아의 “생명권”을 주장하는 이들이 버젓이 활개치는 것에서 보듯, [독일처럼 낙태권이 부분적으로 인정된 나라에서조차] 여성이 자신의 몸과 삶을 결정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도전받고 있다.

그러나 낙태 억압과 관련한 이데올로기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크게 변해 왔다. 몇 개의 세포로 이뤄진 세포덩어리 혹은 태아를 온전한 인간과 동일하게 취급하고 도덕적, 법적 근거에 따라 그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비교적 근래에야 등장했다.

낙태는 죄가 아니다 조산사(오른쪽)가 천연 낙태 유도제인 페니로얄 약초를 섞고 있는 모습을 그린 중세의 그림

계급 분화와 차별이 없던 수렵·채집사회(원시공산주의라고도 불린다)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피임, 낙태, 영아 살해가 행해졌다. 17세기 이후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화를 지원하려고 그곳으로 건너간 유럽 예수회 선교사들은 출생 직후의 영아 살해 관행을 기록했다. 예컨대, 쌍둥이를 낳은 경우, “쌍둥이의 엄마가 아기 둘 모두를 위한 모유를 생산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한 명이 희생됐다.” 뉴기니에서는 또한 낙태가 “일정한 만찬과 함께 축하받는” 일이었다고 인류학자 H. J. 니부르는 전한다.

동시에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러한 사회에서 아이들이 사랑을 받고 자랐다고도 기록했다. 오늘날의 캐나다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펴던 라피토 예수회 신부는 이렇게 썼다. “덧붙이자면, 아무도 감히 아이들을 때리거나 엄하게 가르치려고 애쓰지 않았다.”

인류학은 사회과학 분야로 갓 등장했던 1900년 무렵에 이미 “원시” 사회에서 어떤 피임 수단이 사용됐는지를 연구했다. 당시 이 학자들은 18세기에 등장한 토마스 맬서스의 과잉인구론의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인구증가는 지속가능하지 않으므로 가난한 사람들은 출산·육아의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학자들은 원시 사회에서 피임, 낙태, 영아 살해가 존재했음을 발견했다. 당시 낙태는 (여성의 배를 때리는 등) 물리적 방법으로 이뤄지거나 낙태 효과가 있는 식물을 복용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한 연구자는 이런 식물을 가리켜 “맬서스 식물”이라 부르며 열광하기도 했다.

낙태와 영아 살해는 대체로 씨족의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다. 피임에 대해 “원시 사회 여성들은 … 아주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인 이유”를 들었다. 예를 들어, 이미 여러 번 유산을 한 경험이 있다거나 더 많은 아이들을 양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사회에서 아동은 성적으로 성숙한 뒤에야 온전한 인간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낙태는 도덕적으로 전혀 비난받지 않았다.

사유재산

이렇듯 공동체의 지지 속에 산아를 조절하던 일은 사유재산과 계급사회가 등장하면서 사라지기 시작한다. 황소가 이끄는 쟁기 사용, 먼 바다 낚시를 가능케 한 어선의 등장 등 새로운 생산수단 덕분에 잉여 식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동시에 여성들은 임신과 육아 때문에 이런 노동에 참여하는 것이 더 힘들어졌다. 잉여생산물은 남성들의 손에 집중되기 시작했고 결국엔 아주 소수의 남성들이 통제했다. 모든 생산 활동이 동등하게 취급되던 평등한 씨족사회는 점차 남성 가장이 중심이 되는 가족, 즉 ‘가부장’ 권력으로 대체됐다. 부계 혈통에 따라 재산이 상속되고 여성이 다른 남성의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하려면 여성을 일부일처제에 복종시켜야 했다. 이는 당연히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를 의미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를 가리켜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라고 불렀고 “최초의 계급 억압은 남성의 여성 억압과 동시에 일어난다”고 썼다.

5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등장한 도시국가의 초기 문서에서 이미 여성의 종속적 지위를 엿볼 수 있다. 쐐기문자로 쓰인 이 고문서(법전)는 주로 남성이 가진 권리를 나열한다. 낙태에 대한 언급이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것은 약 4천 년 전 도시 우르에서 만들어진 고문서였다. 이에 따르면 한 남성이 다른 남성의 딸을 폭행해 유산하면 그는 딸의 아버지에게 은화 20셰켈을 물어줘야 했다. 가난한 남성의 딸인 경우에는 5셰켈을, 노예의 경우에는 2셰켈을 보상해야 했다. 이것은 ”가부장적” 가족의 의미를 잘 보여 준다. 가족을 통솔하는 가장(아버지 혹은 남편)의 의지에 반해 이뤄진 낙태는 사유재산에 대한 손해로 간주되고 그에 대한 보상을 지급해야 했다.

이와 유사한 규정은 이후 구약성서(출애굽기 21장 22절)에 포함됐다. 이 구절에서 두 남자가 싸움을 벌이다 한 여성을 쳐서 유산하는 일을 다룬다. 죄를 범한 자는 여성의 남편이 정한 보상금을 지급해야 한다. 이는 성경에서 낙태를 언급한 유일한 경우이고, 이 또한 사유재산에 대한 손해라는 맥락에서만 언급됐다.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게 커다란 곤란이 된다.

ⓒ출처 에릭 드루커

고의적 자가 낙태를 불법으로 처음 규정한 것은 기원전 1200년 무렵 중기 아시리아 제국의 법전이었다. [낙태한 여성은] 공공 장소에서 신체관통형(고문 후 말뚝으로 신체를 관통시키는 처형)에 처했다. 이 같은 처형을 공개적으로 시행한 것은 여성에 대한 공격이었을 뿐 아니라, 국가가 가족 내 가부장 권력을 대체하려 하고 낙태를 국익을 해치는 행위로 규정했다는 점을 보여 주는 초기 징후다.

당시 낙태를 [태아의 ‘생명’을 운운하며]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경우는 없었고, 그것은 이후 등장한 그리스, 로마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우수한 사냥개의 혈통을 유지하는 것처럼 엘리트 계층만의 선택적 생식과정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는 “우수한 남성이 우수한 여성과 동거하는 경우를 최대한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동시에 “열등한 후손”은 비바람에 방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부가 지나치게 많은 자녀를 갖는 경우” 인구 조절을 위한 낙태를 찬성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배아에 감각이 생기고 생명의 지위를 얻는 특정한 시점이 있다는 생각(남자 배아일 경우 수정일로부터 40일 후, 여자일 경우 90일 후)을 최초로 내놨고, 낙태는 그 시점까지만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마에서는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 어찌나 낙태가 광범했는지 시인인 유베날리스가 상류층 여성들에게 거세당한 남성과 동침하라고 제안할 정도였다. 여전히 가부장적 사상에 영향받는 당시 사회적 규약에 따라, 남편이 동의하는 경우 낙태는 처벌받지 않았다.

기독교와 낙태

낙태 금지나 제한, ‘신이 생명을 부여한다’는 개념,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는 세계의 모든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의 정치와 관련된 문제를 주로 다룰 필요가 있다. 유럽에서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였지만, 많은 나라들로 그 세를 확장한 기독교 관료기구들은 서기 5세기 무렵 로마제국의 멸망 뒤에도 계속 살아남았다.

이후 수세기 동안 기독교 교회는 수도원 운영, 농민에 대한 착취, 식민화를 기반으로 쌓은 경제적 힘을 정치적 힘으로 전환시켜, 파편적이었던 봉건사회를 지배했다. 기독교의 사제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권능”을 주장하고 여성 차별을 분열 수단으로 강하게 이용했는데 이것은 가족 안에 존재하던 가부장의 무한한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교회는 오직 출산을 위한 성행위만을 허용하는 등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구축했고 그 과정에서 죄책감, 부끄러움, 두려움을 부추겼으며 공개 비난과 종교재판이 일상이 됐다.

이런 관점은 마침내 “수정” 이후 이뤄지는 모든 낙태를 금지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전까지 기독교 사제들이 주창하던 신학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따라) 배아의 “생명 부여” 시점을 놓고, 즉 어느 시점 이후 행해지는 낙태를 도덕적 죄악으로 간주할 것인지를 두고 오락가락했다. 그래서 처벌받지 않는 낙태가 인정되는 기간이 적어도 일부 존재했다. 서기 1200년 무렵의 교회법은 피임조차 살인 행위로 여겼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낙태 허용 기간을 없애지는 않았다. 당시 교회가 낙태에 부여하는 처벌은 몇 년 동안 빵과 물만 먹고 ‘속죄’하는 것이었다.

교회의 낙태 단속은 12~14세기 동안 광범하게 퍼지며 이단으로 지목됐던 카타리파(‘순결파’) 운동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카타리파는 로마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들의 부를 비난하고 여성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현 세상은 악마의 지배를 받는다고 믿었던 카타리파는 출산을 죄악으로 취급했다(섹스에 대해서는 다르게 봤다). 이들은 모진 박해를 받았다.

중세 시대에도 피임, 낙태, 영아 살해가 여전히 이뤄졌고 그에 관한 엄청난 양의 민간 전통법이나 안내서가 있었다. 심지어 13세기의 한 교황은 사제가 되기 전 의사로 일하면서 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낙태 처방전을 쓰기도 했다. 14세기 스트라스부르 지역 수녀들은 수도원 안에서 아기의 시체가 종종 발견되고 도미니크 수도회 사제들이 수녀원에 드나든 이후 수녀들이 자꾸 임신하는 일이 발생한다고 불평했다.

16세기와 17세기에 작성된 범죄기록을 보면 낙태 죄목으로 기록된 이들은 주로 하녀나 농촌 소녀들이다. 노간주나무는 낙태를 유도하는 효능이 있다는 이유로 독일 남서부 지역의 “모든 농장”에서 이 나무를 키운다고 독일 사회주의자 베벨은 썼다. 프랑스 시골에서는 19세기에도 여전히 영아 살해가 이뤄진 반면 도시의 여성들은 낙태를 유도하는 약을 구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와 낙태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교회는 경제적·정치적 권력에서 밀려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속적 사법기관들은 억압과 사회 통제를 위해 교회 이데올로기를 유용하게 활용했다. 1869년 교황 비오 9세는 수정된 순간부터 배아에 ‘생명이 부여’됨을 천명했고, 1871년 새롭게 세워진 독일 국가는 형법에 ‘생명에 반하는 범죄’라 칭하는 절에 [낙태를 처벌하는] 218조를 만들었다. 이 조항에 따르면 자가 낙태를 행한 여성에 대해서는 최대 5년, 여성의 낙태를 도운 이들에게는 최대 10년의 징역을 선고할 수 있었다.

산업화 시기에는 도시와 그 주변의 참혹한 생활로 인해 독일에서 낙태는 수십만 건에 이르렀다. 피임이 금지됐기 때문에 가난한 여성들은 유산을 하려고 강력한 독극물을 마시거나 배를 차거나 날카로운 물질로 자궁을 찌르기도 했다. 부유한 여성들이 쉽게 주치의의 도움을 받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218조는 여성 차별의 수단이자 계급 차별적 조항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이 법의 폐기를 위해 여성과 남성 모두 투쟁할 필요가 있었다.

[독일 혁명의 여파로 들어선] 바이마르 공화국(1919~33년)에서는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 아래 낙태 합법화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요구하는 운동이 벌어졌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가장 큰 규모의 운동이었다. 이 운동에는, (역시 1871년에 제정된) ‘동성애’를 처벌하는 형법 175조에 반대하는 운동과 성 개혁 운동, 급진적 여성해방론자들과 공산당이 함께했다. 이러한 운동은 혁명 이후의 러시아가 1920년에 낙태 금지를 전면 폐기한 것에서 영감을 받았다.

내 자궁은 내 뜻대로 지난해 말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며 서울 도심을 행진하는 여성들 ⓒ이미진

그러나 나치 정권 하에서 모든 진보적 운동은 사라졌다. 파시스트들은 낙태를 ‘인종적 반역’이고 ‘독일 민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반면 유대인 여성들은 강제 낙태의 대상이 됐다.

서독에서는 1968년 투쟁 이후 등장한 여성운동이 218조 폐지 투쟁을 다시 이끌었고 마침내 법률이 완화됐다. 이후 종교를 내세운 보수적 낙태 반대론자인 “프로 라이프”들은 역사의 흐름을 거꾸로 돌리려 해 왔다.

개악

이들이 가하는 압력 때문에 1990년대에 낙태 관련 조항이 개악돼 “태아에 대한 보호”가 처음으로 명문화됐는데 이는 임신한 여성보다 태아에 더 큰 생명권을 부여한 셈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들은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과 친밀한 관계를 쌓고 있는데 그 당은 선거에서 이미 218조 강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반동세력이 승리하는 곳에서는 생명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진정으로 야만적인 일들이 벌어진다. 가톨릭 교회의 주도로 1990년대 말에 낙태가 완전히 금지된 엘살바도르에서는 불법 낙태를 했다는 이유로 여성들이 최대 40년의 징역형을 살고 있다. 부유한 여성들은 해외로 원정 낙태를 가는 사이, 처벌받는 여성의 대다수는 가난한 원주민 여성들이다.

오늘날 독일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성장하는 것은 2013년 말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역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한 학생이 강간당했는데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병원 두 곳이 피해 여성에 대한 검진과 증거 확보를 거부한 것이다. 자신들의 ‘기독교 윤리’에 반하는 사후피임약을 장차 처방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이유였다.

오늘날 우리는 낙태 반대론자들과 AfD의 전진을 막고, 과거의 투쟁으로 쟁취한 권리를 지켜야 하는 과제 앞에 서 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여성 차별과 계급사회는 긴밀히 연결돼 있다. 낙태권이 제한되거나 완전히 금지될 경우,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이는 노동계급 여성과 그들의 파트너, 그 가족들이다. 그러므로 낙태권 투쟁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를 위해 함께 투쟁해야 하는 과제의 일부이고 차별과 착취가 사라진 사회주의 사회가 바로 그런 세계가 될 수 있다.

[개정증보판]

낙태, 여성이 선택할 권리

정진희·최미진 지음, 노동자연대, 52쪽,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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