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배틀그라운드 —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
낙태죄의 문제점을 이모저모 다룬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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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그라운드》는 낙태죄 폐지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책이다. 이 책을 집필한 저자 12명은 2016년에 결성된 ‘성과재생산포럼’의 활동가들이다. ‘성과재생산포럼’은 연대체인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의 참가 단체이다.
저자들은 여성 차별의 결과로 ‘배틀그라운드’(전쟁터)가 된 여성의 몸을 둘러싼 재생산권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다루며 낙태죄의 불합리성을 들춰낸다.
《배틀그라운드》에 서술된 역사적 사례와 의학적 통계·자료들은 낙태죄 폐지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꽤 유용하다. 몇몇 저자들은 ‘태아 생명권’ 논리에 도전하고 여성을 인구 정책의 도구로 삼는 국가 권력에 맞서 저항을 촉구하기도 한다.
나영의 글은 종교계의 낙태 금지 논리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형성되고 변형돼 왔음을 여러 문헌을 들어 보여 준다. 그리고 “신의 이름으로 위험에 내몰리는 여성들”의 낙태 현실을 고발하며 “여성의 생명을 외면”하는 종교계의 위선을 폭로한다.
일부 저자들은 낙태가 “여성의 권리”라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가령, 백영경은 “여성이 왜 임신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변명조의 설명 방식”을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안전한 임신중단 방법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를 명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옳게 지적한다.
하지만 이 책 전반에서 낙태권과 재생산권 사이의 관계는 혼란스럽게 서술돼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의 에필로그에는 “안전하고 합법적인 인공임신중절이 재생산권 보장과 동의어는 아닐뿐더러, 상호 충돌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는 언급이 나온다.
재생산권은 여성의 출산·양육의 권리가 핵심적으로 포함되므로 낙태권이 재생산권과 동의어가 아닌 것은 맞다(낙태권은 재생산권의 일부이다). 그러나 낙태권 인정이 여성의 출산·양육의 권리와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낙태권 인정은 여성에게 낙태를 강요하거나 권장하는 것과 관련이 없다. 낙태권은 낙태 여부(=출산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자격이 여성 자신에게 있다는 것, 즉 여성의 몸과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낙태는 여성의 권리
한편, 백영경은 낙태죄 폐지를 지지하지만 “내 몸의 주인은 나”라고 외치는 것을 “자유주의적 담론”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이런 지적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구호는 그 말 자체로 옳을 뿐 아니라, ‘낙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여성 자신이 오롯이 결정할 문제’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여성의 온전한 낙태 결정권을 옹호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장애와 낙태에 관한 쟁점도 다룬다. 백영경은 국가가 여성에게 임신·출산·낙태를 강요해서는 안 되지만, “태아에게 장애가 있다고 해서 임신한 여성 마음대로 인공적인 임신중단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런 주장은 장애인 차별에 반대하는 맥락에서 나오는 듯하다.
과거에 한국 정부는 ‘건강하고 정상적인 아이를 낳을 수 없다’며 한센인과 장애 여성들에게 끔찍한 강제 불임·낙태 수술을 자행했다. 이런 국가의 억압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장애 여성들은 온전한 임신·출산의 권리를 보장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국가가 장애 여성들의 임신·출산을 억제하는 것과 임신한 여성 자신이 낙태를 선택하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 둘은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장애가 있든 없든 태아는 모체에 종속돼 있으므로 독립적 인격체가 아니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출산은 여성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장애 여성을 비롯한 모든 여성들에게 낙태와 출산을 선택할 결정권이 온전히 보장돼야 한다. 또한 장애아 출산을 감당할 수 없어 낙태를 선택하는 여성에게도 낙태권을 보장해야 한다.
이 책에서 여성의 낙태권 옹호가 가장 선명한 글은 이유림의 글이다. 그는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사회경제적 사유’ 낙태 허용 입장의 약점을 지적한다. “형법상 낙태죄의 존치를 인정”하거나 “여성의 경험을 승인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국가에 부여하는 등의 한계가 있다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산부인과 의사인 윤정원의 글은 낙태죄 폐지뿐 아니라 여성의 건강권을 위해 ‘유산 유도약’ 도입, 낙태시술 건강보험 보장, 제대로 된 성교육과 피임 지원 등 다방면의 보건의료 서비스가 제공돼야 함을 강조한다.
〈노동자 연대〉가 낙태권 운동 내에서 강조해 왔듯, 비싼 낙태 비용과 안전하지 못한 시술로 고통받는 것은 부자 여성들이 아니라 가난한 청소년과 청년 등 노동계급 여성들이다. 따라서 낙태 시술과 피임 등에 대한 국가의 재정 지원 문제는 낙태권 보장에 핵심적인 쟁점이다. 여성이 원하면 언제든지 조건 없이 안전하게 낙태할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고, 국가가 지원해 모든 여성들에게 낙태 시술이나 미프진(임신 중단 약)을 무상으로 제공해야 한다.(관련 기사: 본지 232호 ‘낙태권 운동 — 여성의 몸은 여성 자신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