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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실태조사 결과:
낙태죄 폐지와 낙태권의 필요성이 재확인되다

정부의 낙태(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결과가 2월 14일 발표됐다. 이 조사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보건복지부의 의뢰로 만 15~44세 여성 1만 명을 대상으로 2018년에 실시한 것이다.

이번 실태조사는 4월 초로 예상되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심판을 앞두고 발표돼 관심을 받았다.

우선, 이번 조사에서도 여성의 낙태죄 폐지 열망이 높다는 점이 재확인됐다. 무려 75.4퍼센트의 여성이 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고 답했다. 지난해와 올해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낙태죄 폐지 의견이 유지 의견보다 높았다.

지난 몇 년간 성장한 낙태죄 폐지 여론 ⓒ조승진

모자보건법 개정이 ‘필요 없다’고 답한 여성은 10퍼센트가량뿐이었다.(현행 모자보건법은 극히 예외적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낙태를 금지한다.) 모자보건법 개정 지지 응답 중에서는 대부분의 낙태 사유에 대해 ‘임신주수와 상관없이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번 조사에서는 임신 경험 여성 중 약 20퍼센트가 낙태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이를 기초로 2017년 낙태 건수를 약 5만 건으로 추정하고 2005년 조사 이래 “감소 추세”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수치는 신뢰하기 어렵다. 낙태가 불법인 상황에서 낙태 사실을 솔직히 밝히지 못하는 여성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해 문재인 정부는 낙태 처벌을 강화하는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을 강행했고, 심지어 경찰이 낙태 여성을 색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판국에 여성들이 정부 조사에 모두 사실대로 답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실제 낙태 건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가령, 2017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조사에서는 임신 경험자 중 40퍼센트가 낙태를 했다고 답변했다. 2017년에 낙태 관련 빅데이터를 분석한 연세대·배재대 연구팀은 연간 낙태 건수가 최대 50만 건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낙태죄가 여성에게 주는 고통

하지만 이번 조사에서도 낙태가 불법인 상황에서 여성들이 겪는 부담과 고통스러운 현실은 드러났다.

여성들이 낙태 이유로 가장 많이 꼽은 것은 ‘학업, 직장 등 사회활동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 ‘경제상태상 양육이 힘들어서(고용 불안정, 저소득 등)’, ‘자녀계획(자녀를 원치 않아서, 터울 조절 등)’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 낙태 사유들은 현재 모두 불법이다. 낙태를 금지한 법이 현실과 얼마나 괴리가 큰지 다시금 드러났다.

낙태는 여성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므로, 여성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계획하고 결정하려면 낙태권은 필수다.

낙태가 불법인 상황에서 여성들이 남몰래 낙태 가능한 병원을 찾느라 전전긍긍하고, 비싼 비용을 부담해야 하고, 낙태 후 제대로 쉴 수 없는 현실도 드러났다.

조사에 참가한 여성들은 낙태 시 가장 필요했던 정보로 ‘낙태 가능한 의료기관’(71.9퍼센트)을 꼽았다. 그리고 대체로 30만 원~100만 원의 수술비를 부담했다고 답했다. 낙태 수술 후 적절한 휴식을 취했다고 답한 여성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이는 부유한 여성들과는 달리 노동계급과 서민층 여성들에게는 큰 부담이다. 낙태가 계급 문제이기도 한 까닭이다.

낙태권 운동

이번 실태조사 결과에서 드러난 점들이 별반 새로운 건 아니다. 낙태를 금지하는 법이 여성들의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는 점, 낙태 처벌은 여성의 건강과 안전, 생명만 위협할 뿐이라는 점은 낙태권 운동이 오랫동안 밝혀 온 사실이다.

낙태권 운동의 요구처럼, 여성의 몸은 여성 자신의 것이다. 여성의 몸 안에서 벌어지는 임신의 유지 여부도 오롯이 여성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따라서 낙태죄를 폐지하고, 기간과 사유의 제한 없이 낙태를 합법화해야 한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안전하지 못한 낙태에 내몰리는 일이 없도록 낙태에 의료보험을 적용해 무상으로 제공해야 한다. 미프진 등 낙태약도 합법화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다른 자본주의 지배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삶에는 무관심하고 이윤을 위해 노동력을 충분히 공급받는 데만 관심이 있다. 합계출산율이 1명 이하로 떨어지자 지배자들의 위기 의식은 더 커진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는 2017년 말 23만 명 넘게 참가한 낙태죄 폐지 국민청원에 대해 고작 실태조사 약속만 하며 회피했다. 그 뒤에는 낙태죄 유지 의사를 드러내며 되레 낙태 처벌 강화에 나섰다. 이번 실태조사에서도 낙태죄 폐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일각에서는 헌재가 낙태죄 위헌(또는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릴 것이라는 기대가 큰 듯하다. 그러나 헌재도 지배계급의 일원으로서, 같은 우선순위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설사 현행법을 일부 바꿔야 하는 결정이 난다 해도, 낙태 허용 수준(기간과 사유 등)를 둘러싼 새로운 쟁투가 시작될 수 있다. 만약 상당한 제약이 유지된다면 낙태를 원하는 여성들에게 큰 도움이 안 되거나 심지어 낙태가 더 어려워지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 부분적 합법화와 함께 낙태 단속이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낙태죄 폐지와 여성의 낙태권 보장을 바라는 사람들은 문재인 정부나 헌재에 의존하지 말고, 아래로부터 낙태권 운동을 꾸준히 건설해 나가야 한다.

낙태 처벌 강화로 여성들 등에 비수 꽂은 문재인 정부 ⓒ조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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