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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1993년 제1차 인티파다 ― 팔레스타인인들이 들고일어났을 때

1987년에 시작된 제1차 인티파타는 매우 강력한 아래로부터의 반란이었으며 이스라엘 국가를 뒤흔들고 시온주의에 맞서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소피 스콰이어가 《팔레스타인의 저항》(책갈피)의 저자 필립 마플릿에게 그 의미에 대해 들어본다.

제1차 인티파다는 어떤 사건이었나요?

제1차 인티파다는 1987년 12월에 시작돼 거의 6년간 지속됐습니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뿐 아니라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까지 집집마다 이 항쟁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반란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팔레스타인 사회의 모든 층이 참여한 매우 민주적인 아래부터의 반란이었어요. 인티파다 동안 여성들의 자치 조직이 만개하기도 했죠.

파업은 저항의 중요한 일부가 됐습니다. 점령지 노동자들이 여러 날 동안 일터에 나가기를 거부했죠. 다급해진 이스라엘 사용자들은 호텔과 식당을 운영하고 열매를 수확할 노동력을 새로 구해 달라고 정부에 촉구해야 했죠.

제1차 인티파타의 에너지와 활력은 팔레스타인인들이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아닌 대안적 지도부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습니다. 이 항쟁은 처음에 이스라엘인이 운전하는 차량이 팔레스타인 차량들을 덮쳐 여러 명을 죽인 일을 계기로 시작됐습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 세 명이 가자지구 자발리아 난민촌 사람이었어요. 반란은 그곳, 바로 자발리아 난민촌에서 단단한 뿌리를 내린 후 가자지구 전역, 그다음에는 서안지구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반란이 일어난 지 단 이틀 만에 항의 행동의 결과로 가자의 모든 것이 멈췄습니다. 한 국제 구호 단체 직원은 가자가 “완전히 문을 닫았다”고 했죠.

“도로는 봉쇄됐고 거리에는 쓰레기가 널려 있고 불타는 타이어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가 도시를 휘감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 항쟁을 이끈 것은 새 세대 팔레스타인 청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돌멩이를 던지며 저항했습니다. 이 새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국가가 가한 모욕과 가난, 폭력만을 경험하며 자란 세대였습니다.

새 세대 팔레스타인 청년이 이끈 제1차 인티파다 ⓒ출처 Efi Sharir

이들은 그런 상황을 바꿀 수만 있다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저항할 태세가 돼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일간지 〈예루살렘 포스트〉의 한 기사가 그 시기의 광경을 단적으로 포착한 바 있는데요, 그 기사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우리(이스라엘의) 스무 살 젊은이들이 저들(팔레스타인의) 스무 살 젊은이들과 싸우고 있다. 우리 편은 장갑차와 헬리콥터를 동원하고 저들은 몽둥이와 돌멩이, 원시적인 화염병을 쓴다.”

제1차 인티파다가 벌어진 맥락은 무엇이고, 새로운 활동가들이 그 맥락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선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식민 지배에 저항한 오랜 전통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시온주의자들과 영국 제국주의 모두에 맞서 전투를 벌였던 1936~1939년 항쟁의 물결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극심한 폭력으로 이 저항은 진압됐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은 결코 이 투쟁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이 시기는 그 자체로 또 다른 인티파다입니다.

그러나 1987년에 팔레스타인인들이 항쟁에 나선 것은 단지 이스라엘의 잔혹함과 폭압 때문만이 아닙니다. 경제적 압박과 가난이라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20년 넘게 가자지구를 점령했습니다. 이스라엘 국가는 가자지구를 사실상 반투스탄으로 만들었습니다. 반투스탄이란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공 지배자들이 설정한 흑인 분리 거주 지역을 말합니다. 가자지구도 그런 곳과 비슷하게 만든 거죠.

가자지구에 거주하는 노동자 수천 명이 이스라엘에서 일했는데, 이스라엘은 이들을 값싸고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노동력으로 여겼습니다. 1981년에는 팔레스타인 사람 11만 명이 점령지와 이스라엘을 오가며 일하고 있었어요.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실업률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주 손쉽게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부려 먹을 수 있었습니다.

1987년에 이스라엘 노동자의 임금은 팔레스타인 노동자보다 10배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세운 억압적 체제하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굶주림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어요. 이런 억압적 점령 체제에 대한 분노 때문에 엄청난 속도로 반란이 퍼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인들의 맹렬하고 완강한 저항은 이스라엘 국가를 뿌리째 뒤흔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인티파다를 진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1948년 ‘나크바’,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수십만 명이 살던 곳에서 강제로 쫓겨났습니다. 이렇게 쫓겨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레바논이나 요르단 같은 이웃 나라에 정착했는데, 거기서 그들은 PLO 등 자신의 저항 기구들을 조직합니다.

1982년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공해 당시 레바논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운 PLO를 분쇄하려 했습니다. 침공 동안 이스라엘의 동맹 세력인 레바논의 카테브[기독교 우익 파시스트 운동]는 수도 베이루트에서 팔레스타인인 2000명을 학살했어요. 이스라엘은 자신이 팔레스타인 민족해방 운동을 진압했다고 믿었죠. 그러나 그들은 틀렸습니다.

운동은 치명타를 입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운동은 팔레스타인 내의 대중 저항이라는 형태로 변모했습니다. PLO 같은 저항 조직들이 이스라엘에 맞서 1960년대 내내 벌인 게릴라 투쟁은 영웅적이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87년 인티파다에 나선 수많은 팔레스타인 청년은 자신이 새로운 방법으로 싸우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 경험이 청년들에게 열정을 불어넣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게릴라 전사들과의 싸움에만 익숙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파업과 대중 시위를 망라하는,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아래로부터의 민간 대중 운동에 대비가 돼 있지 않았습니다. 반란이 시작되고 1년 후 당시 이스라엘 부참모장 에후드 바라크는 인티파다가 이스라엘 국가의 진을 빼놓고 있다고 시인했습니다. 1만 명 규모의 이스라엘 병력이 서안과 가자지구에 배치됐고 인티파다를 진압하는 데 350만 일의 노동 시간이 “투자”됐다고 털어놓았죠.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탄압으로 저항을 깨부수려 했습니다. 인티파타 동안 3만 명에 가까운 팔레스타인인들을 투옥했어요. 당시 국방장관 이츠하크 라빈은 자신이 “철권통치”라고 부른 정책을 도입했습니다. 이 정책은 1985년에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시행됐던 것이고, 팔레스타인인을 강제 추방하는 조처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4년 동안 이스라엘은 이 ‘철권’ 정책을 대대적으로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인티파다를 결코 중단시키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이 항쟁에서 배워야 할 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저항의 불꽃이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제1차 인티파다 때 억압과 폭력에 맞서 들고일어났듯이, 지금 이스라엘의 만행은 이후 더 큰 반란을 낳을 것입니다.

제1차 인티파다는 어떻게 끝났나요?

결국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국가의 야만적 탄압을 당해 내지 못했고, 거의 6년이 지난 후에는 버틸 힘이 남아 있지 않았죠.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거대한 저항을 끝내기 위해 PLO 지도부에 의존하기도 했습니다. 야세르 아라파트 등 PLO 내의 파타당 지도자들은 분출한 운동을 통제하고자 했습니다.

그 지도자들은 그렇게 하면 이스라엘이 독립적인 팔레스타인 국가를 자신들에게 넘겨줄 거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오슬로 협정으로 알려진 이른바 ‘평화 협상’에 참여하게 되죠. 대중 운동은 1993년 9월에 끝났고 그 뒤에 이어진 ‘평화 프로세스’는 결국 거짓과 사기로 드러났습니다. 평화 협상은 이스라엘이 서안지구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계속 건설하고 가자지구를 감옥 같은 곳으로 만들 수 있게 했습니다.

협상 결과,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대한 부분적 통제권을 갖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 협상이 사기임을 깨닫고 PLO와 아라파트에 대한 지지를 거둬들였죠. 2006년 자유롭게 치러진 총선에서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은 파타가 아닌 하마스를 찍었습니다. 애초 이스라엘은 세속적인 PLO의 대항마로 하마스 같은 이슬람주의 단체의 성장을 북돋으려 했어요.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모스크 설립 허가를 내줬습니다. 하마스가 초기에 학교와 어린이집에 자금을 지원하고 자선 사업을 벌이는 등의 복지 제공에 기반한 조직이었을 때 이스라엘은 이를 마음에 들어 했어요. 그러나 이게 계속되지는 못했죠. 하마스가 PLO의 균형추 구실에만 머무르지 않았던 거죠. 오늘날 이스라엘은 지금 자신이 뿌린 대로 거두고 있습니다.

제1차 인티파다가 다른 곳의 반란을 고무했나요?

인티파타는 레바논, 요르단, 북아프리카, 걸프 국가 등 아랍 세계 전역의 대중 운동을 고무했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성격이 중요했습니다. 투쟁에 나선 아랍 세계의 대중은 이것이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임을 이해했습니다. 또, 자신들이 단지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를 표하려고 시위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국 정부에도 맞서 싸웠던 것이죠.

이집트에서 벌어진 시위가 한 사례인데요, 이집트에서는 대학 캠퍼스에서 대중 시위가 일어나고 마할라 지역의 섬유 공장 노동자들이 거기에 동참했어요. 노동자들은 일손을 놓고 인티파다 지지 행진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이집트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에 반대하는 구호도 제기했습니다.

2000년 가자지구에 진입한 이스라엘군 탱크에 맞서 맨몸으로 돌을 던지는 소년

자국 통치자에 맞서게 되면서 연대 시위는 그 통치자들에게 아주 위험한 것이 됐어요. 그래서 아랍 국가들은 연대 운동을 진압하려고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수십 년 전부터 계속되는, 아랍 정권들의 냉혹한 위선을 뚜렷하게 보여 주는 하나의 패턴을 볼 수 있죠. 한편,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에 일체감을 갖는 세계 도처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점령하에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중 운동을 보면서,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는 집단조차 저항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직도 싸우고 있고 전 세계에서 투쟁을 고무하고 있습니다. 제국주의의 온갖 후원과 지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아직도 집단적 저항 의지를 꺾지 못한 것이죠.

팔레스타인 밖 아랍 지배자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제1차 인티파다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에서 큰 저항 운동이 벌어지면 아랍 지배계급은 항상 불안해 했어요. 그 저항이 자국의 대중적 저항으로 번질 때가 많았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아랍 통치자들을 구해 준 것이 바로 PLO였어요. 1960년대에 야세르 아라파트[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초대 수반]는 다른 아랍 국가들의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채택했습니다.

아라파트는 아랍 통치자들에게서 돈과 무기를 받는 대가로 PLO가 그들의 국내 정책에 간섭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에 고무돼 투쟁에 나선 다른 아랍 국가 대중에게 PLO가 보낸 메시지는 ‘집으로 돌아가라, 일터로 복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더 광범한 아랍 노동계급의 투쟁과 분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은 이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은 언제나 아랍 지역 전역에서 연대 운동을 촉발했지만 팔레스타인 운동 지도자들, 특히 PLO는 이것이 팔레스타인 해방의 열쇠가 될 수 있음을 결코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언제나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 더 광범하게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을 고립시켰습니다. 투쟁이 승리하려면 이런 전략을 반드시 거부해야 합니다. 언제나 팔레스타인 운동은 아랍 노동계급과 함께 싸울 때 가장 강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