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사망 1년:
소심한 민주주의자에서 노동자의 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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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사망 1년을 맞아 “한국 민주화의 인동초” 김대중의 삶과 정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김대중 자서전》은 일주일 만에 초판이 매진되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많은 사람들이 군사독재 하에서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이었고, 죽기 직전에도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며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하는 양심이 돼 달라”고 호소한 김대중을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정치 지도자로 여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민주주의는 김대중의 일생을 관통한 신념이요 가치”라고 했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의 한복판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산 김대중의 정치 역정은 김대중이 민주주의 투쟁에 철저하지도 일관되지도 않았음을 보여 준다.
김대중의 정치적 한계는 1960년 4·19 혁명으로 등장해 단명한 유약한 장면 정부의 대변인을 했을 때부터 드러났다. 김대중은 ‘자유당과 뭐가 다르냐’며 비판을 받던 꾀죄죄한 민주당 정부를 적극 옹호했다. 또, ‘남북 군대의 무장 해제와 외군 철수’, ‘선 통일 후 중립화’ 등을 외치던 혁신 세력의 급진적 주장과 시위를 “정국의 안정을 해치고 국민들에게 극도의 불안감을 안겨 준다”며 비판했다.
김대중은 1965년 한일국교정상회담을 조건부 찬성했고, 베트남 파병에도 철저하게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군사 독재 강화의 빌미를 제공했다며 투쟁을 이끌던 야당 강경파를 비난했다.
그러던 김대중이 박정희 정부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야당 정치 지도자로 성장했다.
1971년 대선에서 정권 교체 열망은 김대중 지지로 표출됐다. 장충단 공원 유세에 백만 인파가 모일 정도였다. 광범한 부정 선거 덕분에 가까스로 승리한 박정희는 유신 체제를 도입하고 김대중을 제거하려 했다.
민주화의 진정한 동력
1979년 박정희가 죽고 ‘서울의 봄’이 찾아왔을 때, 재야 지도자들은 투쟁을 호소하는 성명서를 들고 김대중을 찾아갔다. “모든 군인들은 무기를 놓고 병영을 나와라. 모든 노동자들은 해머를 놓고 공장을 떠나라. 모든 상인들은 문을 닫고 철시하라. 모든 국민들은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장충단공원으로 모여라.”
당시 군부의 재등장을 막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려면 이렇듯 기층 대중의 투쟁이 필요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성명서 내용에 깜짝 놀랐다. “국민들은 혼란을 원하지 않는다”며 성명서 내용에 강하게 반대했다. 김대중의 관심은 국회에서 계엄령 해제가 논의되는 것이었고 선거를 통해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칫하면 선거를 하지 않을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며 학생들에게 시위 자제를 요청했고, 최규하 과도 정부와도 협력할 수 있다고 밝혔다.
민주주의의 전환점이었던 1987년 6월 항쟁 때에도 김대중과 자유주의 야당 정치인들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두려워하고 독재 타도 투쟁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기를 주저했다. 여야 영수회담에 매달리다가 군부가 타협책으로 내놓은 직선제 수용으로 운동을 제한하려 했다.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이 터져나오자 김대중과 자유주의 야당은 노동자 투쟁에 보수적 태도를 보이며 계급적 본질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노동자 대투쟁이 김대중 자서전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는 것은 그의 계급적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진정한 힘은 김대중과 자유주의 야당이 아니라 학생과 노동자들의 투쟁이었다.
야당 지도자에서 지배자로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한 후 자본주의 국가의 수장으로서 자본가 계급의 이해를 대변했다. 대중의 민주 개혁 열망은 저버리고, IMF 요구를 충실히 이행하며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 구조조정 등 시장 개혁을 추진했다.
김대중은 한때 국가보안법으로 억울하게 사형 선고까지 받았지만, 집권 후 국가보안법을 이용해 좌파를 탄압했다. 2000년 국회 법제사법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 집권 초기 3년간 국가보안법 구속자가 무려 8백70명이었다. 집권하자마자 전두환·노태우를 사면해 줬지만, 집권 기간 노동자를 무려 8백92명이나 구속했다. 김영삼 정권 때보다 훨씬 많은 노동자들이 구속된 것이다.
은행과 기업을 구제하려고 1백60조 원을 쏟아부었지만 노동자들에게는 희생만 강요했다. 정리해고제가 도입되고, 비정규직이 늘어났다. 파업 중인 롯데호텔노조와 사회보험노조에 경찰특공대가 투입됐고, 2001년 정리해고에 맞서 투쟁하던 대우차 노동자들에게 지난해 이명박 정권의 쌍용차 진압에 버금가는 야만적 탄압을 가했다.
김대중은 야당 지도자 시절에도, 선거에서 승리해 대통령이 된 뒤에도 결코 노동자들의 친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대통령으로서 김대중은 정확히 노동자들의 적이었다.
이런 김대중의 반노동자적 본질 때문에 민주노총은 2001년에 김대중 퇴진 투쟁을 벌였다.
김대중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할 때 “우리 사회에서 돈이 없어서 굶어 죽거나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일이 없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였다.
사회 양극화는 심화됐고, 실업자와 빈곤층이 산업화 이래 최대 규모로 확대됐다. 거리는 노숙자들로 넘쳐났다.
‘생산적 복지’의 일환이었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수급자 수가 3퍼센트 미만으로 IMF 이후 급격히 확대된 빈곤에 대처하기에는 턱없이 미흡했다. 현재 빈곤층임에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자가 되지 못해 사각지대에 방치된 사람이 정부 발표로도 4백만 명이 넘는데, 이 수치는 김대중 정부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김대중은 2008년 촛불시위를 우호적으로 언급했지만,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사망을 계기로 촉발된 촛불시위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다. 또, 지난해 용산 참사를 보면서 이명박 정부를 비판했지만, 김대중 정부 때에도 야만적인 철거가 진행됐고, 부동산 규제 완화로 주거 양극화도 엄청나게 심화됐다. 그래서 남북정상회담 성사와 노벨평화상 수상에도 김대중의 지지율은 집권 3년 만에 17퍼센트까지 하락했다.
김대중은 “민주화의 핵심은 의회 정치”라고 믿었다. 제국주의에 타협하고 시장경제를 유일한 대안으로 여겼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대중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 주는 이 시대에 “행동하는 양심”은 탐욕스러운 시장과 제국주의에 도전해야 한다. 또 더는 탄압받지도 않고, 기층 민중의 투쟁에 보수적인 자유주의 야당에 의존해선 안 된다.
민주화의 진정한 동력이었고, 의회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 진정한 정치적·경제적 민주주의를 쟁취할 잠재력이 있는 노동계급의 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김대중이 언급한 3대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 남북관계의 위기, 서민경제의 위기”를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