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진 것보다 더 잔인하고 치밀하게 계획됐던 윤석열의 군사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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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에 대한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변론과 심리가 끝났다. 이제 헌재 재판관들의 선고만 남았다.
윤석열은 구속 상태에서 기소됐지만, 강제 수사와 체포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고 불리한 사실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그 탓에 헌재 탄핵심판 변론에서 내란죄 형사재판을 방불케하는 사실 공방들이 벌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국회 청문회가 열렸는데, 어떤 군 지휘관들은 두 곳에서 한 진술이 서로 다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부 언론의 추적 보도와 헌법재판소, 국회 청문회 등에서 추가적인 사실들이 드러났다.
우선, 비상계엄 선포 직전 윤석열 측의 계획이 그리 허술하지도 않았고, 무력 사용을 자제할 계획도 없었음이 드러났다.

윤석열은 적은 병력만 출동시켰다고 했지만, 검찰은 윤석열 공소장에 “무장군인 1605명과 경찰관 3790명을 동원”했다고 밝혔다.
특수전사령부(특전사)와 수도방위사령부(수방사)의 정예 특임 부대들, 방첩사, 정보사, 국방부 조사본부, 경찰 등이 출동했다. 체포조, 선관위에 출동한 경찰 등도 실탄 무장을 했다.
쿠데타 실패 직후 특전사를 제외한 나머지 계엄군이 들고 나온 실탄이 1만 발로 알려졌으나, 도중 5만 발, 18만 발로 말이 바뀌더니, 최근 국방부는 당일 출동 부대가 보유했던 실탄은 34종 총 20만 4329발이었다고 인정했다. 이 중 약 6만 5230발을 소지해 출동했고, 나머지 탄약은 차량에 실려 출동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9공수여단은 폭발시 금속 구슬이 튀어 인명 살상력이 큰 크레모어를 18개, 금속 파편이 튀는 세열 수류탄 240개를 준비했다. 수방사는 C-4 폭약을 휴대했다.
심지어 1공수특전여단과 수방사 제1경비단은 “인체 내에서 팽창하며 큰 상처를 내도록 설계”돼 국제조약상 사용이 금지된 HP탄도 보유 중이었던 걸로 알려졌다. 이 탄 사용은 ‘전쟁범죄’로 규정돼 있다.
야당 정치인 등 요인 체포에는 방첩사 수사단, 국방부 조사단, 정보사 요원, 경찰 등이 동원돼 조를 짜 요인을 잡으러 다녔다. 실제로 이재명 민주당 대표 체포조는 계엄이 선포되자마자 바로 출동했다. 1순위 체포 대상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된 뒤에도 국회 인근에는 이른바 ‘수호신TF’가 출동한 사실이 CCTV 영상으로 확인됐다. 이 부대는 비상계엄 5일 전 국회를 관할하는 여의도 변전소를 방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호신TF’는 대테러 작전 수행을 명분으로 여러 부대에서 정예 요원들을 차출해 만든 수방사 소속 특수임무 별동대다. 차륜형 장갑차 부대, 저격반, 드론 부대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한다.
그 부대는 윤석열 측에서 계엄 실행으로 마음을 굳혀 가던 지난해 2월 결성됐다. 수방사령관 이진우는 계엄 전날, 그 부대의 출동 태세를 점검했고, 김용현이 TF 출동을 지시했다는 메모를 남겼다. 군은 계엄용 별동대였을 가능성이 있는 이 부대에 대한 일체의 정보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한편, 수방사 군사경찰단, 특수전사령부 부대 모두 명찰을 뗀 채 출동했다. 위법한 지시임을 알고 부담을 느꼈다는 정황을 보여 준다.
계엄법에 따른 지구계엄사령부 설치 준비 정황도 드러났다. 전국적으로 계엄 통치를 전면화하려 했던 것이다.
노상원 수첩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은 이번 계엄의 작전 설계자로 보이는 노상원의 수첩에서 나온 계획들이다.
노상원은 야당 정치인, 윤석열 반대 운동가, 노동운동가, 종교인, 판사, 해병대 박정훈 대령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린 군 판사, 유명 연예인, 체육인 등 500여 명을 체포·구금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거기서 “수집,” “수거”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체포 후 고문·살해를 뜻하는 용어다. 노상원은 이렇게 체포한 일부를 서해 바다에 수장하거나 북한군을 이용해 “비공식 방법”으로 제거하려고 계획했다. 비밀 엄수를 위해서였다.
정치적 반대파를 ‘종북’으로 몰아 물리적으로 제거하면서, 자신들은 그 일을 위해 북한과 비밀리에 접촉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끔찍하고 역겹고 위선적인 계획은 쿠데타 일당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자극해 국지전을 유도하고, 이를 계엄 선포의 명분으로 삼으려 했던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야당 정치인들을 모두 체포하는 것은 국회 해산 계획과 연결된다.
신속한 체포·고문·살해 계획을 보면, 의원들이 신속하게 모일 수 있는 날 계엄을 선포한 것이 실수가 아니라 한 번에 체포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는지 의심된다.
노상원 수첩에는 장기 집권이 가능하도록 개헌을 하고, 중국과 러시아의 선거 제도를 조사·참고해야 한다는 것도 적혀 있었다.
한편, 노상원은 정보사령부 판교 본부에 계엄 후 모든 수사기관을 총괄하는 합동수사본부(본부장: 방첩사령관) 아래 수사2단을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민간인이 계엄사령부의 핵심 기관에서 옥상옥 구실을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윤석열 일당은 “자유민주주의를 구하기”는커녕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려 한 것이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조차 그 사회적 내용은 노동계급의 조직들임을 안다면, 그런 것들이 파괴되거나 유명무실해진 상황에서는 제도가 자유민주주의를 흉내낸다고 해도 그 제도는 형해화된 상태가 돼 전혀 민주적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나 전두환 독재하에서도 때때로 국회의원 선거가 유지됐지만, 그런 선거를 국민 대표자에 대한 민주적 선출 과정이라고 누구도 말할 수 없었다.
이런 권위주의 통치를 구상한 윤석열은 즉각 파면돼야 한다.
이런 막대한 물량과 치밀한 작전에도 허점이 있었으니, 평범한 사람들이 목숨 걸고 저항에 나설 것을 계산에 넣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회에 육로로 진입한 제1공수여단과 수방사 경비단을 막아선 것도,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707특임대를 막아선 것도 모두 특권층이 아닌 보통 사람들이었다.
국회로 출동했던 수방사 제1경비단장 조성현이 국회에 나와서 한 말은 이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저희가 보호해야 될 시민들이 저희 행위를 막는 모습을 보면서 상당히 의아해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 저희가 훈련받고, 해 왔던 그런 상황과 다른 상황이다 보니 적극적으로 제 부하들에게 군사적 행동을 시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잠시 대기시켰고 저도 상황을 판단하려 했다.”
살인을 전문으로 훈련받은 정예 부대들이 비무장 민간인들이 자신들을 막아서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신체적·심리적 대비도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계엄군 사기를 떨어트린 결정타였다. 설상가상으로 국회에서 계엄 해제 요구가 결의되자 더는 작전을 무리하게 펴기가 불가능해졌다.
헌법과 법률, 사법제도가 아니라 노동자 등 서민 대중이 민주주의를 구했다. 우리가 민주주의다. 우리야말로 민주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