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맥주홀 쿠데타’:
국가 기구에 의존해서는 극우를 막을 수 없음을 보여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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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9일 서부지법 폭동은 극우 세력이 만천하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주류 윤석열 퇴진 운동 지도부는 가담자 구속·처벌을 요구하는 데 머물며, 극우와 대결하기보다는 국가 기구에 기대를 걸며 극우에 대처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국가 기구와 더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극우에 맞선 방패가 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지금의 한국처럼 위기의 시기에 그랬다.
이 점에서, 히틀러의 보잘것없던 나치당이 1923년 바이에른에서 쿠데타를 기도할 만큼 성장하고 쿠데타 실패 후에도 재기에 성공한 과정을 살펴봄 직하다.
당시 독일은 제1차세계대전 패배, 인플레이션, 극우의 백색 테러로 엄청난 위기를 겪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끔찍했다.
사회민주당이 이끄는 정부는 군부와 손잡고 공산당을 비롯한 혁명적 노동자들을 탄압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사회를 안정시킬 수 없었다. 독일 자본주의의 위기가 너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많은 극우 민족주의 운동이 등장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좌파(사회민주당과 공산당 막론)가 독일 제국의 등에 칼을 꽂아 제1차세계대전을 패배로 이끌었기 때문에 독일이 위기에 처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특히, 유대인들이 그런 배신을 이끌었다는 유대인 혐오적 음모론이 두드러졌다. 히틀러는 그런 극우 민족주의 운동 지도자의 하나였다.
그런 극우 민족주의 운동은 많은 권력자들의 후원을 받았다. 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하에서 진정한 권력을 휘두르며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기업가와 국가 관료들, 군부, 검찰, 주류 언론 등등이다.
게다가 히틀러가 활동하는 바이에른주는 극우의 전국적 중심지로, 몇 해 전 베를린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던 세력이 공공연하게 피신하고 있어도 중앙 정부가 손을 못 댈 정도였다. 군부와 극우 성향의 자본가들이 바이에른을 좌파에 맞설 아성이자 ‘플랜B’로 여기며 비호한 덕분이었다. 특히 바이에른 군부는 바이에른 주정부의 통제도 따르지 않을 만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행태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히틀러는 대중 동원 능력을 인정받아 유력한 재력가와 군 관계자, 상류층과 연줄을 만들고 또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또한 돌격대라는 준군사조직을 운영했다. 그 덕에 그는 경쟁 극우나 사회민주당의 집회를 물리적으로 방해하며 큰 홍보 효과를 노릴 수 있었다.
좌파를 상대할 때와는 다르게 경찰과 사법 당국은 나치당에 관대했다.
히틀러가 쿠데타를 일으킨 1923년은 정치와 경제 위기가 절정에 달했던 해였다. 연초 프랑스가 루르 지역을 점령했다. 그리고 자본가들의 환투기 등으로 극단적인 인플레이션이 벌어졌다. 제1차세계대전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1달러에 4.2마르크였던 환율이 쿠데타가 벌어질 무렵인 1923년 11월 15일에는 4조 2000억 마르크가 됐다!
사람들은 모두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극우든 극좌든 중앙 정부에 반대해 궐기할 것이라는 전망이 파다했다. 지배계급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유지하며 지배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히틀러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몇 주 전 작센주의 군대가 선출된 좌파 정부를 무너뜨리는 일이 있었다. 불행히도 공산당은 좌파의 아성이었던 이곳에서 반격을 준비해 놓고도 마지막 순간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사회는 크게 우경화했다. 바이에른 주정부를 장악한 뒤 군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베를린의 중앙 정부를 공략한다는 것은 히틀러뿐 아니라 많은 극우의 공통된 구상이었다.
히틀러의 1923년 쿠데타를 개인적 괴퍅함이 드러난 해프닝 정도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렇듯 당시의 사회적 맥락을 보면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히틀러에 관한 권위 있는 전기 작가 이언 커쇼는 이렇게 썼다. “유력한 개인들과 조직들이 베를린 중앙 정부에 맞서서 봉기를 일으키려는 공동의 준비가 없었다면 히틀러는 … (쿠데타) 기회조차 잡지 못했을 것이다.” (《히틀러I》)
그보다 약 1년 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권력을 얻는 데 일단 성공한 것도 히틀러를 고무했다. 이탈리아의 기존 지배자들은 얼마든지 군대를 동원해 무솔리니를 저지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자신들의 특권과 이윤을 보존하고 결국 좌파를 무찌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산당이 봉기의 기회를 놓쳐 버린 1923년 11월, 당시 독일 지배계급은 나치의 손을 빌려야 할 만큼 절체절명의 처지에 있지 않았다. 게다가 바로 몇 주 전 자신이 군대를 동원해 작센 주정부를 무너뜨린 뒤라 더욱 그랬다. 그래서 히틀러의 쿠데타는 경찰에 의해 손쉽게 꺾였다.
그러나 쿠데타 실패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정치 생명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히틀러는 쿠데타 실행을 통해 행동력이 있는 극우 지도자 이미지를 얻었고, 재판 과정에서 판사의 배려로 몇 시간이고 자신의 주장을 선전할 수 있었다. 수감 생활도 호텔에 가까울 정도로 쾌적한 환경에서 밀려드는 지지자들을 만나고 팬레터를 받으면서 보냈다.
무엇보다 쿠데타 실패 후 13개월(재판 기간 4개월 포함)이라는 짧은 기간만 복역하고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권총으로 무장한 2000명을 동원해 바이에른 주정부 장악을 시도하고, 이 과정에서 경찰 4명을 살해한 범죄 행위에 비하면 말도 안 되게 관대한 처분이었다.
출소 후 히틀러는 극우 운동의 지도자를 자임하며 규율 있는 정당을 건설하고 나치 간부층을 축적하는 데에 집중했다. 또한 자신의 지명도를 이용해 공식 정치에 진입하고자 겉으로는 ‘합법 노선’을 표방하며 바이에른을 넘어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장 노선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한편으로는 선거 득표를 늘리는 것으로 명망을 추구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거리 폭력 조직으로 좌파와 유대인 등을 공격해, 절망 속에서 출구를 찾는 중간계급 대중의 지지를 동시에 얻는다는 이중 전략을 구사했다.
히틀러는 사회적 위기의 잠잠한 시기에는 주변적 인물이었지만, 1929년 대공황이 터져 다시금 심각한 위기가 벌어지자 빠르게 재부상했다. 그러자 히틀러에 대한 독일 지배자들의 태도도 빠르게 변했고, 결국 1933년 1월 히틀러를 총리에 앉혔다.(좌파가 이를 충분히 저지할 수 있었는데도 실패한 이유는 최일붕, ‘1933년에 나치는 어떻게 쉽사리 권력을 장악했는가?’를 보시오.)
당시 나치보다 노동자 정당인 사민당과 공산당의 총 득표가 더 많았는데도 지배자들은 히틀러를 총리로 선택했다. 10여 년 전 이탈리아 지배자들이 무솔리니를 총리에 앉힐 때 그랬듯이 자신들의 특권과 이윤을 보존하고 좌파를 무찌르는 것을 자유 민주주의보다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는 위기 시기에, 선출되지 않은 권력자들이 좌파에 맞서기 위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우회해서 극우를 지원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현재 한국 지배자들도 지정학적·경제적·정치적 위기가 앞으로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우려하고, 윤석열 방어 극우를 지원할 필요를 느끼고 있을 수 있다. 실제로 극우는 지배자들의 지정학적 위기감을 반영해 ‘종북 세력’, ‘친중 세력’(이재명과 민주당까지 포함시키고 있다)에 대한 증오를 내세우고 있다.
극우 대중 운동은 불만의 진정한 책임이 지배자들에게 있다는 것을 가려 줄 뿐 아니라 노동자와 좌파들을 공격하는 데 쓰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지배자들에게 유용하다.
히틀러가 맥주홀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 이후 재기하는 과정은, 자본주의적(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존중하자고 호소하는 것으로는 극우 부상에 맞설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극우에 맞서려면 국가 기구에 의존하지 않는 아래로부터의 대중 행동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