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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유지 밀어붙이는 문재인 정부

낙태죄를 유지하고 임신 주수와 사유에 따라 낙태를 제한하는 내용의 모자보건법·형법 개정안(이하 개정안)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모자보건법·형법 개정안 모두 40여 일 전 입법예고한 원안 그대로 의결됐다. 법안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겠다더니 정부는 낙태죄 유지와 낙태 제한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계속 무시했다.

정부 개정안은 임신 14주 이내에 이뤄지는 낙태에 대해서는 조건 없이 허용했지만, 15-24주에는 여러 조건을 둬 낙태를 제한했고, 24주 이후의 낙태는 현행처럼 금지했다. 개정안은 낙태유도약(미프진)을 도입하기로 했지만, 낙태에 대한 의사 거부권도 명시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꾸준히 커져 왔고, 이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시위도 벌어졌다. 낙태죄 폐지를 바란 한국의 여성(과 남성)들은 폴란드, 아일랜드 등지에서 벌어진 낙태권 운동에도 동질감을 느꼈다.

지난해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이 나온 것은 높은 낙태죄 폐지 여론과 운동 덕분이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기어코 낙태죄를 유지하고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성평등’을 내세우더니 또다시 위선을 드러낸 것이다.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은 국무회의 의결 다음 날인 11월 25일, 여성폭력 추방 주간을 알리면서 정부가 “성범죄 등 여성 대상 범죄”에 “단호히 대응”하고 “피해자를 보호”할 것이라며 또다시 “여성 인권’과 “성평등”을 운운했다. 낙태죄 유지로 커지는 여성들의 불만을 달래려는 속셈일 것이다.

낙태권

여성이 원하면 제약 없이 낙태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삶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므로, 낙태를 할지 말지는 여성 자신이 선택해야 한다.

낙태권은 여성이 자신의 몸과 삶을 통제하는 데 꼭 필요하다. 여성의 사회적 구실이 커진 오늘날 낙태권은 더욱 중요하다. 자신의 출산을 통제할 수 없으면, 여성은 평등하게 사회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수나 사유 따위의 자의적 기준들로 여성의 몸을 통제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정부 개정안은 조건 없는 낙태 허용 기간을 14주 이내로 제시했다. 물론 낙태의 절대 다수는 임신 12주 이내에 이뤄진다. 그러나 임신을 뒤늦게 자각하는 여성들도 적잖이 있을 수 있는데다, 여러 조건과 나름의 사정 때문에 얼마든지 낙태가 지연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임신 12주까지만 낙태를 허용하는 프랑스에서는 1년에 5000여 명의 여성이 합법 낙태의 시기를 놓쳐 경제적 부담을 감내하며 임신 24주까지 낙태가 허용되는 네덜란드로 원정 낙태를 간다.

문재인 정부의 배신 목록이 또 하나 늘었다 11월 15일 오후 서울 신촌 유플렉스 앞에서 열린 ‘마지막경고:낙태죄 전면 폐지’ 집회 ⓒ조승진

임신 15주 이후에 이뤄지는 낙태는 적지만, 직장이나 학업, 생활 형편, 남편과의 관계 등의 변화로 임신 유지를 원치 않는 여성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정부가 제시한 ‘사회·경제적 사유’라는 기준은 모호한데다 국가 관료나 의사가 낙태 가능 여부를 판단하게끔 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자신이 임신한 것도 아니고 태어날 아기의 양육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을 국가 관료와 의사들이 왜 여성을 대신해 결정권을 행사한단 말인가.

정부는 24주 이후의 낙태는 아예 금지했다. 그러나 후기 낙태의 경우 여러 이유로 조기에 낙태할 기회를 놓쳐 불가피하게 이뤄지고, 여성들은 후기 낙태가 신체에 주는 부담을 알기에 많은 고심 끝에 결정을 내린다. 그런 만큼 여성의 결정이 존중돼야 한다. 후기 낙태를 하는 여성들은 극소수이지만 안전을 위해 반드시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보장받아야 하는 이들이다. 후기 낙태 금지는 안전하지 못한 방식으로 낙태할 위험을 키워 여성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할 뿐이다.

상담·숙려기간 의무화도 문제적이다. 해외의 사례를 보면 상담과 숙려기간 의무화는 낙태하려는 여성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낙태를 억제하려는 목적에서 이뤄진다. 낙태에 필요한 의료 정보를 의사에게서 제공받을 수 있어야 하지만 상담을 의무화해서는 안 된다. 해외에서는 의무적 상담이 불필요한 요식 절차이고 낙태를 지연시킬 뿐이라며 폐지하라는 목소리가 높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의무적 상담을 폐지했다.

정부 개정안에는 의사가 낙태 시술을 거부할 권한도 명시돼 있다. 물론 낙태에 적대적 태도를 가진 의사에게 진료받고 싶은 여성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사의 양심에 따른 낙태 거부는 낙태를 제약하는 실질적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 가톨릭의 영향력이 강한 이탈리아에서는 1978년 낙태가 합법화됐지만, 시칠리아의 산부인과 의사 87.6퍼센트가 ‘양심적 거부’ 조항을 이용해 낙태 수술을 거부하고 있다. 미국 일부 지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데, 낙태 선택권을 지지하는 의사들이 시카고에서 남부 주로 가서 낙태 수술을 하기도 한다. 남부 주에는 낙태 수술을 할 의사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태아의 생명권?

정부는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조화”를 운운하며 낙태죄 유지를 합리화한다. 그러나 태아 생명권 논리는 낙태 금지론자들의 핵심적인 주장으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낙태 금지론자들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도 않은 태아의 ‘독자 생존’ 가능성을 과장하며 태아를 모체와는 구분되는 독립적 인격체인 양 주장하고 낙태를 살인으로 취급해 왔다.

그러나 태아는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아직 인간은 아니다. 태아는 여성의 몸에 철저하게 의존해 있어 독립적 인격체일 수 없다. 그런 태아에 ‘권리’를 부여하고 이미 살아 있는 여성의 자기결정권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여성을 단지 출산 도구로 취급하는 것이다.

낙태가 여성의 건강을 해친다는 주장도 과장이다. 의료진이 정확한 방법으로 낙태를 시술하면 안전하다. 게다가 낙태를 시술하는 안전하고 단순한 방법이 개발된 지 이미 오래이다. 문제는 이런 시술을 여성이 안전하고 비용 부담 없이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다. 낙태 불법화와 제한 조처는 여성을 안전하지 못한 방식의 낙태로 내몬다.

11월 15일 오후 서울 신촌 유플렉스 앞에서 열린 ‘마지막경고:낙태죄 전면 폐지’ 집회 ⓒ조승진

한편, 국민의힘 조해진 의원이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제출했는데, 임신 6주 내에 이뤄지는 낙태는 처벌하지 않고 임신 10주 이내까지는 사회·경제적 사유를 입증하고 상담과 숙려기간을 거친 경우 처벌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정부 안보다 낙태를 더욱 제한하는 안이다. 그러나 임신을 자각한 여성이 보통 4~5주차에 병원에 가도 임신 여부를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고, 6주 안에 여성이 임신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여성이 차별받는 현실에 대한 공감이나 개선 의지는 눈꼽만큼도 없는 법안이다.

반대로 이은주 의원(정의당)권인숙 의원(민주당)은 여성의 판단에 따라 주수와 사유 제한 없이 낙태가 가능하게끔 하는 법안을 발의한 상태다.(낙태죄 폐지 법안을 발의겠다고 한 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국회의원 10명을 채우지 못해 법안 발의를 하지 못한 상태다.) 특히 이은주 의원안은 정의당의 당론을 반영한 안이다.

낙태죄 폐지를 지지하는 의원 수가 적은 상황에서 향후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법안이 통과되려면 지배계급을 크게 압박하는 대중 투쟁이 필요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배신과 우파의 더한층의 후퇴 압력 모두에 맞서며 여성의 낙태권을 일관되게 옹호하며 싸워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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