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은 중동 재편을 원한다 — 그러나 이를 저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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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추진한 ‘평화 합의’를 두고 가자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나오지만 2023년 10월 7일에 시작된 폭풍의 후과는 혹독할 것이다.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인 수만 명을 학살하고, 수십 만 명을 굶주리게 하고, 모든 가자 주민의 생활 환경을 파괴했다.
트럼프는 이런 만행을 포상했다. 트럼프는 가자지구를 호화스러운 기업 식민지로 만들어, 노회한 전범 토니 블레어를 끼고 그곳을 친히 지배하겠다는 욕망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이스라엘-하마스 휴전 합의의 기초가 된 트럼프의 “20개 조항 구상”에는 “전후” 가자 통치 구상이 그저 넌지시 언급된다. 그러나 9월 29일 언론에 유출된 문서는 ‘가자 국제 과도 당국’(GITA)의 윤곽을 제시한다.
아랍 국가들과 유럽 국가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참여가 보장된다는 눈가림으로 그 추악한 계획을 덮으려 했지만, 드러난 계획에 따르면 그 참여는 전적으로 허상에 불과하다. 트럼프의 구상에 나오는 팔레스타인인 “전문 관료”는 그 문서에서 “서비스 수행 부서”로 언급된다. 절박한 가자 주민들과 진짜 통치자들 사이에서 완충재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이 식민 지배 판타지에서 진정한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토니 블레어를 의장으로 하는 GITA 국제 이사회다. 그들은 이 기구를 ‘고위 통치 위원회’로 명명했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해서 세운 꼭두각시 기구의 이름을 빼닮은 명칭이다. 유출된 문서에 따르면 GITA 국제 이사회에는 “적절한 자격을 갖춘 팔레스타인인이 적어도 한 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서 작성자들은 그게 누구일지 거명조차 하지 않는다.
지난 2년 동안 사태가 왜 이렇게 전개됐는지 이해하려면 1982년 8월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벌어진 일을 봐야 한다. 그 뜨겁고 분노스러운 나날에 수많은 팔레스타인 전사들이 레바논을 떠났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스러진 동지들의 시신을 뒤로한 채 마지막 작별 인사로 허공에 총을 쏘았다.
1982년 이스라엘의 공격은 당시 레바논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군사·민간 기간 시설을 초토화시켰다.
당시 이스라엘이 자행한 대학살은 여러 면에서 이번 학살만큼이나 극심했다. 그리고 두 사례 모두에서 이스라엘은 중동 세력 균형의 격변을 이용해 득을 보려고 어마어마한 살상과 폭력을 자행했다.
1982년의 학살은 당시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과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이 오래 전부터 계획한 것이다. 그 계획은 이스라엘이 1967년 ‘6일 전쟁’으로 장악한 서안지구, 동예루살렘, 가자지구를 영구 점령지로 전환하려는 전략의 일부였다.
1981년 베긴은 극우 시온주의 지도자 제브 자보틴스키의 무덤에서 “대(大)이스라엘 서부[요르단강 서안 전역]가 다시는 분할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1982년의 공격을 촉발한 사건은 무엇이었나?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전사들이 감행한 작전과 같은 거대한 사건은 결코 아니었다.
그 계기는 영국 주재 이스라엘 대사 슐로모 아르고프에 대한 암살 기도였다. 미수에 그친 그 시도를 감행한 것은 아부 니달 조직(ANO)이었다. 아부 니달 조직은 이라크 정권의 지원을 받는 문제투성이 조직이었고 PLO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의 숙적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는 베긴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베긴은 이렇게 일축했다. “아부 니달이고 뭐고 전부 다 PLO다.”
19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시리아를 상대로 승리하자 미국은 이스라엘에 막대한 군사·경제 원조를 쏟아부었다.
이스라엘은 미국 제국주의의 중동 경비견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이스라엘은 역내의 잠재적 경쟁국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할 능력이 있었고, 이는 중동 정권들의 경제·사회 정책을 미국에 이로운 방향으로 트는 데서 중요한 지렛대가 됐다.
예컨대 이집트는 1967년 전쟁 패배의 직접적 결과로서, 오늘날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일단의 정책들을 다른 국가들보다 일찍 받아들였다. 그때 도입된 자유 시장적 조처들의 목적은 이집트 경제를 외국인 투자에 개방하고 산업 생산과 복지를 위한 정부 지출을 줄이는 것이었다.
미국 제국주의 주도 세계 질서의 핵심 기관들이었던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은 이후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를 더 압박했다. 1977년 사다트는 식량 국가 보조금을 대폭 삭감했다. 이는 격렬한 거리 항쟁을 촉발했고 사다트 정권은 그 항쟁을 간신히 버텨냈다.
사다트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 더 많은 정치적 양보를 하는 것으로 대처했다. 사다트는 예루살렘을 방문해 베긴을 만났고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을 맺겠다고 선언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집트라는 가장 강력한 역내 동맹 세력을 잃었다.
이스라엘과 역내 경쟁국들의 이러한 세력 균형 변화가 1982년 레바논에서 벌어진 참극의 중요한 배경이었다.
1979년 이란에서 대중 혁명이 일어나 친미 왕정을 타도했다. 대중 시위와 파업, 작업장 위원회(“쇼라”)가 두드러진 혁명 초기 국면에는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위한 기회가 열린 듯했다.
이는 미국의 중동 지배력 전반에 타격을 주고 그것을 일시적으로 약화시켰다.
따라서 베긴과 샤론의 공세적 군사 정책은 이스라엘의 주인인 미국 제국주의의 중동 지배가 약화되는 것에 대한 대응이었던 것이다. 그것의 일환으로 이스라엘은 1981년 이라크의 핵 반응로를 폭격하고 이듬해 레바논을 침공했다.
이스라엘 국가는 서방 제국주의 열강의 중동 경비견이라는 자신의 핵심 기능을 다시금 확인시켜 줬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아이들과 레바논 아이들의 그을린 시신으로 중동 내 국가 간 시스템의 균형을 재조정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폭격은 단지 PLO만 겨냥한 게 아니었다. 이란과 이라크에 본보기를 보이려는 것이기도 했다. 두 국가는 당시 미국의 통제를 벗어날지도 모르는, 중동 패권의 잠재적 도전자로 등장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과 호메이니가 이끄는 새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서로 전쟁을 벌여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이처럼 1977~1982년 중동에서는 역내 강국들의 불안정한 세력 균형의 재편 과정이 진행됐다. 이것이 오늘날 가자에서 벌어진 참극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서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망명중인 PLO의 국가 건설 프로젝트는 아랍 정권들의 지원에 크게 의존했다.
PLO는 그 정권들로부터 외교 상대로 인정받고 군사적·재정적 지원을 받는 대가로 그 나라들에서 벌어지는 계급 투쟁에 관여하지 않는 “비개입” 정책을 약속했다. 그에 따라 PLO는 팔레스타인인들과 레바논·시리아·요르단 노동자·빈민들의 공동 투쟁을 외면하고 심지어 적극 제동을 걸기도 했다.
이것은 ‘두 국가 해법’ 원칙을 받아들이는 것과 연결됐다. 역사적 팔레스타인의 일부에서만 국가를 세우는 것으로 운동의 목표를 한정한 것이다.
그러나 1982년 베이루트에서 벌어진 일이 입증했듯이 “비개입” 정책은 함정이었다. 그 정책 탓에 팔레스타인 운동은 이스라엘의 전쟁 기구와 대결하는 역내 강국들의 책략에 의존하게 됐다.
오늘날 미국 제국주의의 대항자를 자처하는 역내 강국들은 1982년 때 그랬던 것처럼 신뢰하기 어려운 동맹으로 드러났고, 팔레스타인인들을 혼자서 싸우게 내버려 뒀다.
‘저항의 축’이 와해된 것이 정확히 그런 사례다. ‘저항의 축’은 이란 정권의 지도하에 가자지구의 하마스, 레바논의 헤즈볼라,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예멘의 후티를 결집시킨 동맹이었다.
그 동맹은 이스라엘과 미국에 맞서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반영했다. 그러나 그 동맹의 근본 목표는 이란 정권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이라크와의 전쟁[1980~1988년]에서 패배한 뒤 이란 정권은 인내심을 갖고 어렵게 중동 내 영향력을 어느 정도 재건했다.
‘저항의 축’은 하마스가 압도적 군사적 열위에 있는 상황에서 평형추 구실을 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2023년 10월 7일 이후 거의 1년 동안 아무런 응징을 받지 않은 채 가자지구를 파괴할 수 있었고 2024년 9월에는 헤즈볼라 지도자를 살해했다. 2024년 12월 아사드 독재 정권이 붕괴하자 시리아군 사령관들은 옛 정권을 지탱하는 데서 핵심 구실을 한 이란 장성들을 사살했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공습해 이란에 머물던 하마스 지도자들을 살해하고 이란 핵 시설도 타격했다.
‘저항의 축’의 핵심 국가인 이란과 시리아의 취약성은 단지 미국이 지원하는 이스라엘의 군사적 우위 때문만이 아니었다.
2022년 이란에서는 경찰이 지나 마흐사 아미니를 살해한 것을 계기로 대체로 청년 여성들이 주도한 항쟁이 분출했다. 이란 국가는 이를 잔혹하게 진압해 국내에서 지지를 잃었다. 이는 이란 지도자들이 체면을 구기고 가자를 방치하게 된 핵심 요인이었다.
1982년 이후의 경험이 역사적 팔레스타인 땅의 일부에 국가를 세운다는 노선에 관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 노선이 PLO와 마찬가지로 하마스에게도 함정이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국가는 팔레스타인 억압을 ‘관리’하기 위해 인종 분리 체제(아파르트헤이트)와 인종학살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했다.
이번에 자행된 가자지구의 파괴는 둘 사이 균형의 유혈낭자한 재조정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극우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당시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을 죽이거나 내쫓지 못한—역자] “과업을 마무리”하기를 꿈꿨다.
1990년대에 체결된 오슬로 협정은 동예루살렘, 서안지구, 가자지구를 영토로 하는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지향하는 방안처럼 제시됐다.
그러나 애초부터 그 협정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자결권을 진정으로 실현할 단계들을 밟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평화 프로세스’는 이스라엘이 점령지[동예루살렘과 서안지구, 가자지구]의 ‘안보’ 통제를 거의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게 해 줬다.
이스라엘이 정착촌을 건설해 더 많은 영토를 병합하는 동안 팔레스타인 당국(PA)은 점령지를 감시·통제하는 것을 도왔다.
아이러니이게도, 국가를 인정해 줄 것이라는 거짓 약속을 가장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은 하마스였다.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은 그 대가를 처절하게 치렀다. 2006년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입법 의회 선거에서 승리했다. 유럽연합 외교관들마저 “투명하고 공정하게 치러졌다”고 칭찬한 선거였다.
그러나 PA의 평화로운 ‘권력’ 이양은 이뤄지지 않았다. 미국이 파타와 쿠데타를 공모했기 때문이다. 그후 일련의 사태가 전개되고 나서 하마스는 1년 후 가자지구를 통치하게 됐다.
서안지구의 파타 당국과 가자지구의 하마스 당국이 경쟁하는 ‘세 국가’ 상태에서 득을 본 것은 역사적 팔레스타인 땅에서 주권을 계속 행사한 이스라엘뿐이었다.
이스라엘이 명문화한 법률 체계는 근본부터 인종차별적이다. ‘요르단강부터 지중해까지’ 유대계 이스라엘인은 나머지 모든 사람들에 대한 법적 우위를 보장받는다.
팔레스타인 억압을 관리하기 위해 오슬로 체제를 설계한 자들은 오늘날 이스라엘 국가 안팎에서 점차 부차화됐다.
인종 분리 체제와 인종학살 사이를 오가는 이 치명적 진자 운동을 끝낼 진정한 대안이 있을까? 있다. 그러나 그런 대안을 찾으려면 자본주의에서 국가의 성격이 무엇이고 국가 간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팔레스타인인들 자신의 투쟁이 유익한 교훈을 준다. 2021년 5월 ‘단결 인티파다’를 보자. 그것은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체에서 총파업을 일으키자는 호소를 중심으로 일어난 항쟁이었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인들도 대중 동원에 참가했다. 그들은 1967년 ‘국경’ 안팎에서 팔레스타인인 거주지에 대한 강탈이 심화되는 것에 항의하는 시위와 파업에 동참했다.
‘단결 인티파다’는 아파르트헤이트 국가의 인종차별을 드러낸 동시에 어떻게 그것이 계급과 얽혀 있는지를 드러냈다.
그 항쟁은 아래로부터의 투쟁으로 차별과 착취 시스템을 마비시킬 잠재력을 보여 줬다.
이스라엘의 건설 현장이 마비되고 일부 지역의 교통과 의료 서비스가 차질을 빚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의 힘만으로는 시온주의 국가를 위기에 빠뜨릴 수 없었다.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에서 팔레스타인인의 비중은 절반을 간신히 넘고, 팔레스타인인들은 하이테크 부문이 우세한 이스라엘 경제의 가장 수익성 높은 부문에서 배제돼 있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실현하려면 인접국에서 아래로부터의 혁명적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특히 이집트에서 그런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이집트 압델 파타 엘시시 정권이 인종학살의 조력자 구실을 했다는 사실은 GITA 계획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계획은 “이집트와의 안보 협력”을 수도 없이 언급하고, GITA 본부가 이집트의 도시 알아리시나 카이로에 설치될 수도 있다고 시사한다.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집트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이 함께 반란을 일으켜 이집트 정권을 타도할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국가란 무엇이고 어느 계급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를 명료하게 이해해야 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이 겪은 배신의 역사는, 차별과 착취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싸우는 운동이 함정을 피하려면 어떤 국가에 대해서도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운동의 목표를 그저 국가로 인정받고 “국가들의 클럽”에 끼는 것으로 제한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에 결코 이롭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제시하는 조건에 따른 국가 인정이 함정이라면, 자결권은 어떠한가?
이에 관해서도 팔레스타인인들의 경험은 그저 주권의 외관을 얻어내려는 싸움보다 더 풍부한 것이 있음을 보여 준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자결권을 위한 투쟁이란 생존에 필요한 것을 확보하기 위한 자율성을 쟁취하는 투쟁을 뜻할 수 있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보건 노동자들과 민간 방위대, 교사, 강사, 언론인, 농민, 제빵사, 건설 노동자 등의 끈질기고 독립적인 정신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들은 폭격과 기아 속에서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해 왔다.
그들은 파타의 노란 깃발이나 팔레스타인 좌파의 붉은 깃발, 하마스의 초록색 깃발 아래에 있을 수도 있고 어느 주요 분파에도 속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와 관계없이, 팔레스타인인들이 벌인 가장 강력한 대중 투쟁의 중심에는 언제나 팔레스타인인들의 자기 조직화가 있었다.
그런 저항들이 벌어진 것은 그들이 죽기를 바라서도 아니고, 죽이기를 바라서는 더더욱 아니다.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인 시인 라피프 지아다흐가 말했듯이 팔레스타인인들은 아이들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삶을 가르친다.”
존재를 위한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은 자기 결정의 한 형태이자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을 고무했다. 부정의에 맞선 자신들의 투쟁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러한 버전의 “평범한 사람들”은 정치인들이나 게릴라 지도자를 위한 보병 부대로 전락하지 않고, 자기 나름의 계급적 요구를 갖고 있다.
조직된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피착취·피차별자들의 운동은 자본주의 국가에 맞설 수 있고 세계를 변화시킬 힘이 있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성취할 대안적인 길은 유럽에서도 힐끗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평범한 사람들”의 자기 결정이 이스라엘의 인종학살을 지속시키는 국가의 힘을 돌파할 수 있다는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지난 몇 주 동안 이탈리아를 뒤흔든 총파업이 그것의 고무적 사례다.
인종학살에 대한 거세지는 분노가 경찰 탄압에 대한 분노와 결합돼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항만 노동자들이 이스라엘로 가는 해상 운송을 저지하고 거대한 시위가 도시를 마비시켰다.
팔레스타인인 활동가들이 그 과정에서 핵심 구실을 했다.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자신들의 청년 운동을 조직하고 노동자 운동의 급진적 부분과 협력해 과감한 형태의 투쟁을 확산시켰다.
이탈리아에서와 같은 규모의 운동이 낳는 자기 활동은 변화와 저항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팔레스타인인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표현을 빌리면 그러한 가능성은 “이 세상에도 삶을 보람 있게 하는 것이 있다”는 희망의 씨앗을 품고 있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투쟁할 가치가 있다.
우리는 가자 주민들에게 맹세한다. 그들이 복종을 거부하며 재각인시킨 자기 결정에 담긴 정의와 해방의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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