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공정하지 않다 ― 90년대생들이 정말 원하는 것》 :
20대 속죄양 삼기에 맞선 진보 청년들의 합리적 반론
〈노동자 연대〉 구독
조국 사태로 ‘공정성’이 최대 화두가 된 요즘, 《공정하지 않다 ― 90년대생들이 정말 원하는 것》(지와인 출판)이 진보 염원 청년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미 여러 권의 책을 내어 ‘청년 진보 논객’으로 유명한 박원익(필명 박가분)과 조윤호가 이 책을 함께 썼다.1 두 사람은 정의당 내 청년그룹 ‘진보너머’의 운영위원들이다.
이 책의 주제는 ‘20대는 어떤 세대이고, 그들이 바라는 공정성은 무엇인가’라고 요약할 수 있다. 저자들은 기성 세대와 진보·좌파의 상당수가 20대의 특징과 진정한 염원을 잘못 넘겨짚고 이들을 섣불리 매도해 왔다고 지적한다. 이런 오해와 달리 이 책은 20대가 처한 조건에서 출발해 그들의 불만과 바람을 왜곡 없이 이해하려 애쓴다. 물론 저자들 나름의 조언과 대안도 제시한다.
저자들은 이른바 ‘20대(남성) 개새끼론’이 유행한 지난해 말에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에 20대 남성의 문재인 정부 지지율이 급락하자, 이 현상을 20대(특히 남성)의 보수화와 그들의 ‘여성혐오’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현 정부 친화적인 언론들이 이를 주도했고, 진보·좌파의 상당수도 동조했다.
‘20대 보수화’론을 반박하다
이 책은 그런 주장이 별 근거가 없다고 지적한다. 지금의 20대는 박근혜 퇴진 운동에 참가해 “왕을 끌어내린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세대이다. “특히 20대 남성의 경우 문재인 정부 초기까지 다른 어떤 세대, 동일 세대의 여성들에 비해서도 진보 진영을 지지하는 성향이 강했다.” 그랬던 이들이 문재인 정부에 등 돌린 것은 “정부 정책이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도리어 ‘진보적’이지 않아서다. 즉 ‘공정하지 않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게다가 젊은 남성들이 보수 정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선 것도 아니다.”(47~48쪽)
서평자가 첨언하자면, 문재인 정부 지지로부터의 이탈은 (상대적 차이는 다소 있을지언정) 남녀 청년 모두가 보인 특징이었다. 20대 남성의 문재인 정부 지지 철회가 대규모로 벌어진 시기에, 20대 여성이 주된 참가자였던 불법촬영 반대 운동(“불편한 용기”)도 문재인 정부의 언행 불일치를 정면 비판했다.(관련 기사: ‘20대 남성의 낮은 문재인 지지율은 무엇을 보여 주는가’)
게다가 최근에는 조국 사태가 터져 청년들의 배신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 책은 조국 사태 이전에 씌어졌다. 하지만 조국 사태 때 청년들이 느낀 정서에 부합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촛불혁명으로 개혁정부가 들어선 이후에 이와 같은 일[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의 부동산 투기 논란 등 문재인 정부 관료들의 언행 불일치]을 겪게 되면 반발이 더욱 거셀 수밖에 없다 … 한쪽이 나쁜 놈들이라면 다른 한쪽은 위선자들[이다].”
교육이 어느덧 부 세습의 수단이 된 지 오래이고, 이는 청년들이 느끼는 ‘불공정’의 대표적 측면이라는 지적도 시의적절하다. 박원익은 조국 사태 초기에도 진영논리와 거리를 두며 계급 불평등이 본질적인 문제임을 지적한 입장을 냈다.
실제로 조국 정국 때 대다수 청년들은 ‘평등, 공정, 정의’를 내세운 정부에서도 여전히 계급 특권이 대물림되는 현실에 분노했다. 특히, 조국은 급진좌파 출신을 자처했고, 문재인도 개혁의 전도사로 내세웠던 인물이니, 그 ‘내로남불’이 더더욱 위선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청년들의 분노에 공감하고 화답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청년들의 분노한 목소리는 우파에 힘을 실어 주는 것으로 치부되고 외면당했다. 진보계 지도부들이 ‘민주당 vs 한국당’이라는 진영논리에 종속돼 문재인 정부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했고 비판을 삼갔다. 하지만 이는 우파를 되레 의기양양하게 만들고, 개혁의 동력을 갉아먹는 결과를 낳았다.
세대 갈등이나 성별 갈등은 ‘가짜 보스’
이 책은 청년 문제에 대한 흔하디흔한 접근법인 ‘세대 갈등론’이나 ‘성별 갈등론’(급진적 페미니즘의 가정처럼 남 대 여 프레임)에도 비판적이다. 저자들은 기성 세대와 청년 세대, 20대 여성과 남성이 함께 겪는 사회구조적 문제들에 주목해야 하고, 그 해결을 위해 세대와 성별을 넘어 연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려면 (게임 용어로) ‘최종 보스’, 즉 진짜 적이 무엇인지 알고 정확히 겨냥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배자들이 노동계급의 서로 다른 부분들을 이간질하고 진보·좌파의 상당수도 이런 이간질에 속아넘어가는 정치가 득세하는 상황에서, 세대간·성별간 공통점과 연대를 강조하는 것은 이 책의 큰 강점이다.
저자들은 윗 세대가 청년 세대를 착취한다거나 윗 세대가 청년들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은 양쪽 모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런 주장은 기성세대 내 불평등을 은폐하고, 정작 청년들이 겪는 고통은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들은 임금피크제나 쉬운 해고 등 정부와 사용자들이 추진하는 노동개악에 반대한다.
그간 진보·좌파 내에서 고령·고숙련·정규직 노동자 조건 방어에 소극적인 경향이 커지고 정규직 양보론이 득세해 왔다. 이것이 노동자들의 계급적 연대를 해칠 것을 우려해 온 서평자는 이 책의 논조가 반갑다. 〈노동자 연대〉는 나이, 고용 형태, 노동 조건 등이 달라도 노동자들은 같은 계급으로 연대할 수 있고 공통의 이익을 위해 그래야 함을 역설해 왔다. 그리고 이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 노력해 왔다.(대표적으로 《오늘날 한국의 노동계급 —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관점》(김하영, 책갈피))
청년 문제를 성별 대립 구도로 보는 관점에 대한 반론도 설득력 있다. 저자들은 이 대립 구도의 문제를 남성 청년들이 느끼는 불공정함과 연결시킨다. “젊은 남성들의 눈에 지금의 페미니즘 담론은 가부장제를 없애려고 하기보다 젊은 남성들에게 죄의식과 잠재적 가해자 프레임을 뒤집어씌우려 드는 대표적인 불공정 담론이다.”(83쪽)
공동의 문제
저자들은 남녀 임금 격차나 성별 분업, 임신·출산에 따른 경력단절, 여성 대상 범죄 등 여성 차별의 현실을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남 대 여 구도의 급진적 페미니즘이 여성 차별을 남성 개개인의 의식 탓으로 돌리는 것과 달리, 저자들은 여성 차별이 사회구조적 원인에서 비롯한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남녀 청년 노동자가 공히 겪는 문제이자 함께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도 지적한다.
가령, 장시간 노동이 만연한 상황은 임신·출산을 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안정적 일자리 유지에 불리한 동시에, 남성 노동자들에게는 과로의 부담을 전가한다.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의 정도가 심할수록 젠더 간 격차나 성역할 분리의 정도가 커진다. 또한 사회적 안전망 파괴는 여성을 폭력과 범죄에 더 취약하게 만든다. 따라서 (탈코르셋 운동이나 남성 인식 개선 캠페인보다는) 경제적 불평등을 줄이는 방향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나은 해결책이라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의 관점에서 봐도 공명하는 바가 크다. 마르크스주의는 성차별이 자본주의 착취 체제와 긴밀히 연관돼 있음을 밝혀 왔다. 이는 남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싸울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음도 이해하게 해 준다.
요즘의 진보 지식인들을 향한 저자들의 다음과 같은 개탄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과거에는 사회적으로 끔찍한 범죄가 발생하면 그 범죄 뒤에 있는 사회적인 구조를 이야기하려는 태도가 있었다. 실업의 문제라든가 지역공동체의 파괴라든가 한 개인의 실질적인 삶의 조건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를 파헤쳤다. 그러나 지금은 개인의 의식수준을 탓한다.”(178쪽)
이 대목을 보며 서평자는 3년 전 ‘강남역 사건’에 대한 진보·좌파 대다수의 반응을 떠올리게 된다. 자본주의가 가한 깊은 소외가 한 개인(범인)의 정신적·심리적 불안정과 범죄에 미친 영향을 살피기보다는 남성들의 ‘여성혐오’ 의식이 문제라며 남성 일반을 잠재적 가해자로 싸잡는 감정적 매도가 당시 여론의 주를 이뤘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영향력 제고에는 도움이 됐을지언정, 정작 여성 대상 범죄를 줄이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이 책은 20대 남성이 ‘여성혐오’적이라는 진보 내 흔한 주장에도 도전한다. 가령 저자들은 2018년 11월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조사 결과를 들어, 연령대가 낮은 남성일수록 오히려 가부장제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준다. 20대는 윗 세대와 달리 남녀의 고정된 역할 관념이 해체되는 과정 속에서 성장한 세대라는 것이다. 버닝썬 사건이나 김학의 사건 등 권력층 성비리 의혹에 대해서도 20대 남성 대부분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가해자를 처벌하길 원했다. 그런데도 마치 남성 일반이 이런 범죄의 공모자인 양 몰아가는 프레임(“남성 카르텔”)은 부당할 뿐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권력·자본 카르텔을 붕괴시키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134쪽)
부당한 매도
저자들의 지적처럼, 이런 부당한 매도가 반복될수록 평범한 젊은 남성들은 “돈 있고 힘 있는 놈들은 내버려두고 만만한 자신들만 두들겨 패는 것 같아 억울”할 수밖에 없다. 이 밖에도 진보 일각의 번지수 틀린 20대 남성 매도와 훈계에 당사자들은 반발해 왔다. 그런데도 “이런 반발을 두고 젊은 남성들이 보수적이고 혐오 문화가 강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면, 이들을 보수와 기득권 정치의 지지자로 밀어내는 일이 된다”고 저자들은 우려한다.
서평자도 “청년 보수화”론에 대해 우려한다. 특히, 조국 사태 때 노동계 대표 조직들(민주노총, 정의당, 민중당)은 계급 대물림에 대한 청년들의 반감에 반응하지 않고 조국 수호 편에 섰다. 이는 노동운동의 지지자가 될 수도 있는 상당수 청년들을 개혁 저항 세력으로 잘못 취급하며 사실상 오른쪽으로 떠민 것이었다. 물론 진보 염원 청년들의 사기가 아직 완전히 꺾인 게 아니므로, 앞으로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그들의 개혁 염원 정서는 급진화될 가능성도 여전히 있다. 이를 잘 이해하면서도 원칙 있는 좌파의 존재가 중요할 것이다.2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은 문재인 정부의 위선이나 급진적 페미니즘의 책망과 매도에 실망한 진보 염원 청년들을 보듬어, 우파에게 내치지 않는 긍정적 구실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잘못하지 않은 일에 사과하지 말자’
이 책은 청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들을 제공하는데,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다음 구절이다. “잘못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말자. 잘못한 것에 대해서만, 그 잘못의 정도에 맞게 책임을 지면 된다.” 이 내용은 저자들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썼다고 한다. 저자들은 토론이나 논쟁으로 해결할 일에 대해서도 공개 사과 대자보를 요구하는 ‘살풍경’이 심심찮게 벌어지는 대학가의 풍토에 문제의식을 나타낸다. 특히, 성 관련 문제에서는 도그마 같은 ‘피해자 중심주의’에 따라, 진상에 대해 논란을 벌이거나 정치적 이견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2차가해’로 몰리기 일쑤다.
“설령 부당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갈등 자체를 회피하고자 하는 집단적 심리가 발동하여 당사자에게 빨리 사과하라고 압력을 넣는다. 이렇게 되면 개인은 그 요구가 부당하더라도 굴복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동의하지 않은 채 강제되며, 공개적으로 망신 주는 게 목적인 ‘사과’는 더 이상 사과가 아니라 ‘낙인찍기’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당신이 남긴 마음에도 없는 사과문은 하지 않은 일을 했다는 증거가 되어 평생 당신을 따라다닐 수 있다.”(253~255쪽) 서평자도 이른바 ‘닥치고 사과’와 양심에 반한 사과의 문제점을 다룬 바 있어 공감이 간다.(《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논쟁》33장 참고)
특히, ‘누구 편이냐’를 먼저 정하기 전에 ‘양측 입장을 다 듣고 팩트가 무엇인지부터 챙기자’는 제안이 분별 있다. 저자들의 말처럼 “온라인 속보 경쟁의 시대에 처음 알려진 사실과는 다른 반전이 일어나는 경우를 수없이 겪”고, “온라인 박제와 조리돌림의 시대”에 죄를 뒤집어 썼을 때 이를 바로잡기 힘든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온라인 상의] 허상과 싸우지 말자. 실제 세계에 집중하자”, ‘누가 더 피해자인지 경쟁하지 말고, 서로의 고통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주목하자’는 제안도 지혜롭다.
여성 해방에 대한 러시아 혁명과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기여에 대해 이 책이 정확히 소개한 것도 반갑다. 오늘날 우파뿐 아니라 거의 모든 개혁주의자들이 흔히 이 부분을 곡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령, 저자들은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가 그 투쟁 이면에 벌어진 계급 분화를 보여 주지 못했다고 아쉬워한다. 당시 상류층 여성들은 일정한 재산을 가진 여성들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데 만족했다. 그 결과 1918년 영국에서는 부유한 여성들에게만 선거권이 주어졌다. 성인 남녀 모두에게 선거권이 주어진 것은 그로부터 10년이나 지난 뒤였다.
반면, 러시아에서는 이보다 한참 앞선 1917년에 노동자 혁명을 통해 남녀 모두에게 보통선거권이 보장됐다. 이때 러시아 혁명 정부는 세계 최초로 임신중절을 합법화했고 유급 출산휴가, 공동 탁아소 도입, 이혼 간소화, 동성애 차별 금지 등 (현재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도 이루지 못한) 급진적 조처들을 시행했다.(212~213쪽) 이런 역사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여성 해방의 긴밀한 연관성을 입증한다.
비정규직 정규직화의 ‘공정성’ 논란에 대해
한편 저자들이 20대를 친정부 세력의 부당한 매도로부터 방어하는 데 초점을 맞춰서인지 몰라도, ‘공정성’을 둘러싼 주요 쟁점의 하나인 20대 일각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반대’, ‘개인의 노력에 따른 보상’ 주장에 대해선 선명한 찬반 언급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저자들은 이런 20대의 태도에는 사회경제적 배경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20대는 경기 침체와 청년 실업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나마 괜찮은 일자리를 얻으려면 좁디좁은 취업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들에겐 1점이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차이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이들은 ‘공정한 시험’에 대한 믿음이 크고, 자신들이 힘들게 노력해 통과한 시험을 치르지 않은 비정규직이 자신들과 똑같은 정규직이 되는 건 불공정하다고 여긴다.(37~38쪽)
물론 남성-여성, 노인-청년,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연대를 강조하는 이 책 전반의 취지나 다음의 구절을 보면 저자들이 20대의 이런 태도에 그저 무비판적인 것 같지만은 않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서로를] “기득권 귀족 노동자” “노력도 안 하고 정규직 되려는 놈들”이라고 비난한다면 현실은 더 팍팍해진다.”(179쪽)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공정성”이라는 표어를 이용해 비정규직 노동자와 취업준비생 청년들을 이간질하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공약의 배신을 정당화하고 있으므로, 좌파는 이 문제에 대해 더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바닥을 향한 경쟁
왜 20대 상당수가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반대하게 됐는지는 서평자도 이해할 수 있다(찬성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주어진 조건이 각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들이 회피하지 않고 분명한 논지를 폈으면 좋겠다. 취준생 청년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반목할수록 바닥을 향한 경쟁만 남아,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전체 노동계급 청년들의 조건이 나빠질 뿐이다. 사실 현재의 공기업·공무원·교사 임용 시험은 업무에 필요한 능력과 큰 상관이 없다. 그저 누군가를 떨어뜨려야 하기에 만든 제도일 뿐이다. 게다가 임용 시험에 드는 커다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할 여력이 없어 비정규직으로 먼저 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청년들이 있다. 이들이 정규직처럼 ‘상시 지속 업무’를 하면서도 차별받는 건 정의롭지(공정하지) 않다. 이들이 수년간 현장에서 쌓은 경험과 노력도 보상받을 가치가 있다.4
공공부문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였던 고 김용균 씨나 구의역 김 군처럼 청년들이 차별받는 저질 일자리에서 희생되는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함께 정규직 신규 채용을 대폭 늘리기 위해 단결하는 것이 양쪽 모두에게 이익이다. 매우 부족한 의자를 놓고 노동자들끼리 싸우게 만든 정부와 사용자들에게로 분노와 투쟁이 향해야 한다.
계급사회인 자본주의 사회는 출발선 자체가 불평등하다. 그렇기 때문에 ‘노력에 따른 보상’이라는 정의 개념에도 한계가 크다. 시험이 그나마 공정한 제도라는 것은 착각이다. 입시 제도를 어떻게 바꾸든 결국 금수저들에게 유리하다. 부잣집 자녀들이 물려받은 제반 환경 자체가 경쟁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불공정하다. 마르크스는 ‘공정한 노동에 대한 공정한 임금’ 같은 것은 없다고 매우 강조했다. 노동자들에게는 생산수단 접근 기회 자체가 없고, 그들에겐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굶어죽을 자유 밖에 없다.”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사람들(자본가들과 국가 관료들)은 노동자들이 일한 것보다 훨씬 적은 보수를 준다. 이것이 바로 착취이자, 이윤의 원천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부격차 증대는 필연적이다. 이런 ‘게임의 룰’(생산관계의 불평등)을 둔 채 일부 절차의 개선만으로 공정성이 구현될 수 없다.
청년들의 대안 모색
이 책의 저자들은 미국에서 ‘민주적 사회주의’ 열풍을 일으킨 버니 샌더스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를 대안적 정치세력으로 소개하고 있다. 저자들의 이런 지향은 서평자가 추구하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부분적으로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개혁의 핵심 주체와 방법,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 내의 개혁이냐 자본주의 체제의 폐지냐 하는 문제 등에서 불가피하게 차이가 있다.5 저자들이 자본주의 자체보다는 “세습 자본주의”를 반대한다고 하는 것도 이와 관련 있는 듯하다.
또 하나, 저자들도 지적하듯 청년 내부의 계급 격차는 큰 데다 그들의 의식도 불균등하다. 그럼에도 저자들이 20대를 “청년세대계급”이라 칭하며 하나의 동질적 계급처럼 말하는 것은 모호하게 느껴진다. 이는 착취를 둘러싼 객관적인 사회관계를 중심으로 보는 마르크스주의의 ‘계급’ 개념과도 차이가 있다. 물론 세대마다 사회경제적 조건과 정치적 경험 차이를 반영하는 특징이 있다는 취지에는 동의할 수 있다.
총괄하자면, 이 책의 강점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진보·좌파 주류가 비계급적 진영논리나 남 대 여 프레임을 쫓느라 놓친 중요한 문제들을 이 책은 잘 짚고 있다. 이 책이 던진 문제의식을 디딤돌 삼아 청년들의 대안 모색이 발전하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어 보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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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익의 전작들에 대해서는 최미진의 다음 서평들을 참고하시오. ‘《포비아 페미니즘》 ― 페미니즘 일각의 문제점에 대한 통찰을 보여 주다’(〈노동자 연대〉 234호), ‘《우먼스플레인》, 《그 페미니즘이 당신을 불행하게 하는 이유》 ― 급진 페미니즘의 과도함에 대한 예리한 지적’(〈노동자 연대〉 2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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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글들을 참고하시오. ‘올해 노동자 투쟁은 우리에게 어떤 앞길을 가리키는가?’(김하영, 〈노동자 연대〉 304호), ‘조국 사퇴 이후 ― 진정한 개혁, 진정한 진보, 진정한 동력을 추구해야 한다’(김문성, 〈노동자 연대〉 3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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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진, 2017,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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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제교사의 정규직화를 왜 지지해야 하는지 쉽게 잘 다룬 자료로는 《우리도 교사입니다》(박혜성 기간제교사노조 위원장 지음, 이데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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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정의당을 아는 기초 이론 —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최일붕, 〈노동자 연대 173호), 《사회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부록 ‘사회주의의 두 가지 정신’(핼 드레이퍼, 책갈피)을 참고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