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스플레인》, 《그 페미니즘이 당신을 불행하게 하는 이유》:
급진 페미니즘의 과도함에 대한 예리한 지적
〈노동자 연대〉 구독
최근 몇 년간 뜨거웠던 젠더 이슈들을 소재로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주장과 관행을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책들이 올해 상반기에 나왔다. 이선옥 작가의 《우먼스플레인》, 박가분 등이 공저한 《그 페미니즘이 당신을 불행하게 하는 이유》가 그 주목할 만한 사례이다(이하 존칭 생략).[1]
페미니즘의 부상은 여성 차별이 여전히 이 사회에 아로새겨져 있다는 사실의 반영이자 그에 대한 정당한 반감의 표출이다. 또한 지난해 부상한 불법촬영 항의운동, 낙태권 운동, 미투 운동 등은 성평등 염원이 박근혜 퇴진 촛불 운동의 성공을 거치며 정치적 자신감을 얻었음을 보여 준다.
동시에, 그 이면에는 페미니즘 사상과 실천이 내포한 모순과 난점도 있다. 특히, 현재 한국 여성운동의 지배적 경향인 급진 페미니즘은 성장과 동시에 여성들의 높아진 의식과 분노를 표현하는 데 썩 좋은 정치적 무기가 아님을 드러냈다. 그래서 페미니즘 열풍 속에서도 한편에서는 그 적절성과 효과성에 대한 합리적 의구심, 과도함에 대한 불만이 자라났다.
특정 사상이나 운동이 절정기를 경과하면, 그간 간과됐던 난점과 과오에 대한 성찰이 이뤄지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는 소수만이 감지하고 경고했던 문제들이 재조명되거나 그 문제의식이 확산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두 책을 포함해 급진 페미니즘 또는 그 관련 개념에 대한 진보·좌파 필자들의 비판적 저작이 올해 연이어 나오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페미니즘의 공뿐 아니라 과, 장점뿐 아니라 약점도 다루며 여성해방의 전망을 추구해 온 사회주의자로서 서평자에게 이런 흐름은 반갑다. 급진 페미니즘의 과도함에 대한 중화제 구실을 하고 논의의 지평을 넓혀 주기 때문이다.
《우먼스플레인》, 《그 페미니즘이 당신을 불행하게 하는 이유》의 저자 이선옥, 박가분, 오세라비는 각자의 소속과 입장 차는 있지만 페미니즘의 재부흥이 시작된 2015~2016년부터 꾸준히 국내 페미니즘의 동향을 조사하고 문제제기를 해 왔던 저자들이다. 두 책은 그 누적된 결과물이다.
《우먼스플레인》은 인터넷에서 뜨거운 호응을 얻은 동명의 유튜브 방송을 정리해 엮은 책이다. 시사평론가 김용민이 이 방송을 진행했고 이선옥 작가가 이슈 설명을 맡았다. 《그 페미니즘이 당신을 불행하게 하는 이유》는 〈리얼뉴스〉 필진인 박가분·오세라비·김승한·박수현의 글들을 엮은 것이다. 박가분과 오세라비의 저작들의 경우, 각각 같은 주제를 다룬 전작들 ― 《포비아 페미니즘》(2017),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2018) ― 의 후속작이다.[2]
두 책의 저자들은 대체로 진보·좌파에 속한다. 이선옥은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를 비롯해 노동자의 애환을 다룬 글을 써 온 노동 르포 작가로, 2010년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다. 또한 민주노동당부터 노동당까지 오랫동안 노동계 정당에 몸담았다. 이처럼 오랫동안 좌파의 일원인 이선옥 작가가 “진보의 송곳”(필로소픽 출판사)이 되어 젠더 이슈를 비판적으로 다뤘으니, 진보·좌파 청년들의 주목을 끌 법하다.
박가분은 한때 진보신당-노동당 당원이었고, 지금은 정의당에 기반을 둔 청년 의견그룹 ‘진보너머’ 리더의 하나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박가분은 ‘진보너머’의 기본 입장을 밝힌 〈다수 청년을 위한 진보정치 선언문〉 작성에 참여했다. 그는 이 선언문에서 진보 청년들이 성별로 나뉘어 서로 반목하기보다는, 그들이 공히 겪는 사회 불평등에 맞서는 데 힘을 모으자는 적절한 제안을 했다. 그는 이런 비전을 대변할 진보 청년 정치인의 배출을 중시하는 듯하다.
노동당은 급진 페미니즘이 당 내에서 상당한 갈등과 분열을 일으켰던 곳으로, 그 생채기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런 분란을 몸소 겪거나 가까이서 목도한 저자들의 경우, 그 경험이 급진 페미니즘의 문제점에 대한 통찰력을 얻는 데 도움이 됐을 법하다.
두 책은 여성 차별을 부추겨 온 보수·우파가 아니라 진보·좌파 측의 페미니즘 비평서이다. 따라서 저자들의 문제의식을 단순한 ‘안티 페미니즘’이나 ‘백래시’(반동)로 치부할 수 없다. 특히 이선옥과 박가분은 그렇게 분류되기를 거부한다. 이 저자들의 구체적 실천과 입장을 봐도 그런 딱지를 붙이는 것은 부적절하다. 가령 박가분은 낙태 합법화와 국가의 낙태 지원, 성소수자의 가족 구성권을 지지하고, 여성 노동자들이 경력 단절로 인해 겪는 구조적 불이익에 반대한다. 이선옥은 여성과 노동 문제에 앞장선 여성 작가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저자들의 문제제기는 더 건설적인 진보·좌파 운동의 전망을 열기 위한 것으로 봐야 한다.
급진 페미니즘의 과도함이 부른 대중 정서 악화
박가분은 페미니즘에 대한 여론이 이미 2017년 말에 악화했다고 진단한다. 아이러니이게도,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스피커 구실을 해 온 〈한겨레〉의 자매지 《한겨레21》의 당시 기사(‘페미니즘, 반격을 맞다’)에서 이를 감지할 수 있었다고 그는 돌아본다.
그밖에 서울권 총여학생회(이하 총여)가 잇달아 학생투표를 통해 폐지된 일이나, 각종 여론조사에서 급진 페미니즘에 대한 여론이 악화됐다는 점도 그는 근거로 제시한다. 특히, 이런 여론 악화 추세에서 젊은 여성들이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가령 몇몇 대학에서는 (남학생보다 그 비율은 낮았을지언정) 여학생의 과반도 총여 폐지를 지지했다. 두루 알다시피, 폐지 전에도 총여는 그 존재감이 낮아 장기간 공석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지난해 11월 여성정책연구원이 수행한 여론조사에서도 미투 운동을 지지한 여성과 ‘탈코르셋 운동’(급진 페미니즘 특유의 강한 도덕주의가 특징이다)을 지지한 여성 사이의 지지율 격차가 크게 나타났음도 박가분은 지적했다.[3] 미투 운동에 대한 24세 이하 여성의 지지율은 90퍼센트였던 반면 ‘탈코르셋 운동’에 대한 지지율은 56.9퍼센트였다.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상황에 위기의식을 느끼면서도 원인을 그들 외부에서만 찾아 왔다. 20대(특히 남성)의 보수화, 20대 남성의 여혐 성향 등등. ‘경제 위기와 청년 실업으로 인한 경제적 불만이 배경’이라는 설명이 가미되더라도 결국 이른바 “20대 개새끼론”과 유사한 결론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박가분은 이런 식의 20대 남성 속죄양 만들기가 별 근거 없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페미니스트들의 다음과 같은 표리부동이 신뢰 상실을 재촉한 주범이라고 본다.
첫째, 일련의 문화계 인사의 성폭력 고발 사건이 무고로 밝혀진 사실. 뒤에서 더 다루겠지만, 2016년 ‘#00계 성폭력’ 폭로 중 몇 건은 온라인 상의 무책임한 폭로와 이를 진실 검증 없이 기정사실화하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왜 위험한지 경종을 울렸다.
둘째, 이른바 ‘호주국자 사건’이 준 충격. 워마드 회원으로 알려진 유튜버 ‘호주국자’는 남자 아동 대상 성희롱 게시물을 올려 호주 현지에서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이처럼 ‘여성을 옹호한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약자에 대한 혐오 발언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신물이 났다.
셋째, “페미니즘 완장”을 차고 행한 연예인 대상 마녀사냥과 조리돌림. 아이유, 유아인, 김민희, 재작년 사망한 종현 등이 그 제물이 됐다.(68~70쪽)
박가분은 총여 폐지의 배경도 20대 우경화에 따른 ‘백래시’로 치부할 수 없다고 본다. 그보다는 다음과 같은 주·객관적 요인의 결합이 작용했다고 본다. 여성의 대학 진학률 증가에 따라 더는 여학생이 소수자가 아니게 된 점(객관적 요인), 급진 또는 분리 페미니즘 노선에 따른 총여의 실천이 확장성의 한계에 부딪힌 점(주관적 요인). 이는 동국대 총여 폐지 발의 학생들이 밝힌 이유(‘학내 갈등 조장과 통합 저해’, ‘실질적 운영 성과 및 소통 부재’, ‘총여학생회 사법 기관화 및 정치 세력화’ 등)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런 패착을 돌아보지 않고 총여 폐지 여론을 그저 ‘여혐’으로만 치부한 것은 총여 폐지 찬성률을 되레 높이는 구실을 했다.(92~96쪽)
이선옥은 ‘여혐’ 프레임이 실패한 최신 사례로 2018년 말 ‘이수역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룬다.[4] 당시 사건의 진상이 확인되기도 전에 많은 언론들은 앞다퉈 ‘여혐 대 남혐’의 구도로 이 사건을 보도했다. 이선옥이 상기시키듯이, 녹색당 신지예 씨는 이 사건을 “명백한 여성혐오범죄”라고 규정했고, 분리적 페미니스트인 윤김지영 교수도 “탈코르셋 한 여성에 대한 한국 남성의 전면 공격,” “여성 혐오의 결정체”라고 규정했다. 이 모든 주장이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남성들에게 맞았다’는 두 여성의 말만 믿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이 무색하게도 두 여성의 말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탈코르셋’이 다툼의 이유도 아니었고, 경찰이 늑장 출동했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혜화역 (불편한 용기) 시위에서 만난 것으로 알려진 두 여성이 옆 테이블 손님에게 ‘한남 커플’이라며 시비를 건 것이 발단이었다고 한다.
사실 사건의 진상이 무엇이건 애초에 한낱 개인들의 술집 시비에 불과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명 페미니스트들과 그들의 말을 받아쓴 선정적 언론들에 의해, 그저 주사에 불과한 “저잣거리 시비가 사회이슈가 되는 세상”(이선옥)이 된 것이다. 이처럼 사소한 일조차 크게 부풀리고 대중을 경솔하게 낙인 찍는 일이 자주 반복될수록 페미니즘에 대한 신뢰가 깎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사태에 책임 있는 페미니스트들, 남성 지식인들, 언론 등은 누구 하나 자기 성찰을 보여 주지 않았다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이선옥은 또한 페미니스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했고 그만큼 많은 논란과 반발을 낳은 “여성 혐오” 개념의 핵심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꼽는다. 첫째, 개념의 오남용. 둘째, “여혐은 있어도 남혐은 없다”는 이중잣대. 셋째, 혐오 발언에 시민권을 부여해 준 진보진영.
이선옥은 혐오 개념의 오남용 사례의 하나로 유아인의 “애호박” 발언 논란을 든다.[5] 성차별적 함의가 없는 유아인의 댓글이 ‘여성 혐오’로 부풀려져 각종 친페미니즘 언론에서 조리돌림 당하고 심지어 한 대학 페미니즘 동아리 포스터에서 “강간 문화”의 상징으로까지 매도당했다.
박가분도 이 사례를 다루면서 이렇게 지적한다. 유아인의 애초 발언보다, 그가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한남 짓” 지적에 굴복하지 않고 “메갈 짓 말라”고 응수한 게 “벌집[넷 페미니스트 진영]을 건드렸다”. 하지만 박가분은 “[유아인의 반응이야말로] 기실 언중의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평했다. “타인의 일상적인 대화에서 범죄 프레임을 씌우고 일상적인 논의를 봉쇄하는 넷 페미니즘의 자폐적인 화법에 대한 피로감이 남녀를 불문하고 널리 확산됐다.” ‘돌직구’가 아닐 수 없다.
케이블TV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두고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여혐 드라마’라고 비난한 일은 이선옥이 주목한 또 다른 사례다. 드라마 내용이 공개되기도 전에 20대 여성과 40대 남성이 사귈 거라 넘겨짚으며 그런 설정 자체에 불쾌감을 쏟아낸 것이다(‘왜 20대 여성이 40대 남자를 위로해야 하냐’는 것).
하지만 정작 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은 연인이 아니었고, 오히려 극빈층 가족의 고달픈 현실과 계약직 노동자의 설움을 다루어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런데 설사 젊은 여성과 중년 남성의 연애를 다뤘다 해도 그게 왜 비난거리가 되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반응은 급진 페미니즘 일각에서 종종 나타나는 불필요한 반발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이선옥과 박가분은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종종 휘두르는 ‘정치적 올바름’ 문제도 제기한다. 차별적 함의나 의도가 없는 대중 문화와 사소한 농담에까지 작위적 잣대를 적용해 대중을 훈계하고 이런 행위들에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찾는 관행은 역효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특히, 문화·예술 창작자들이 불필요한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들어 창작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
이선옥은 다음과 같은 유물론적 지적도 추가한다. “사회적 지위를 평등하게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이 약자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지, 대중문화와 예술이 사람을 표현하는 방식 때문에 약자가 불행한 게 아니[다].”
서평자가 보기에 이선옥의 이런 통찰은 마르크스주의 언어관과도 맞닿는 부분이 있다. 유물론자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차별 받는 집단을 비하하는 언어(“깜둥이”, “변태”, “계집년” 등)에 반대한다. 하지만 언어 때문에 차별이 생기는 게 아니라, 차별의 물질적 현실이 존재하기에 차별적 언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차별의 증상에만 집착해 개인들의 라이프스타일 공격하기를 주된 실천으로 삼기보다는, 차별을 낳는 물질적 근원(개별 가족에 떠넘겨진 양육·돌봄 부담, 계급 불평등과 착취)에 도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대안이다.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이중잣대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세상의 거의 모든 게 ‘여혐’의 증거라고 몰아붙이지만(이선옥의 책에서는 “만물여혐설”로 소개된다), 정작 페미니즘 진영의 남성 비하나 과도한 낙인 찍기는 무해한 저항의 수단인 양 추켜세워 왔다. 두 책의 저자들은 이런 이중잣대를 예리하게 들춰낸다.
익히 알려졌듯이, 메갈리아-워마드에서는 한국 남자들을 “한남충”으로 비하할 뿐 아니라, 남성 성소수자들(“똥꼬충”, “게이충”), 남성 어린이(“한남유충”), 남성 장애인(“윽엑”, “장애한남”), 산업재해를 당한 남성 비정규직(“태일해”), 트랜스젠더(“젠신병자”)에 대한 혐오와 조롱 어린 언사가 종종 벌어졌다. 또한 남성 일반을 적대시하고 배척하는 데 동의하지 않거나 ‘탈코르셋’을 실천하지 않는 여성들에 대해서도 남성 성기에 빗대어 ‘흉자’(흉내 자0), ‘명자’(명예 자0)라고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페미니즘 지지 여성의 일부까지도 등 돌리게 했다.
그런데도 저명한 페미니스트 지식인들은 ‘남혐은 없다’거나 ‘미러링이니까 괜찮다’며 이런 행위를 두둔했고, 심지어 여성운동의 효과적 전술인 양 미화하기도 했다. 〈한겨레〉, 〈경향신문〉 등의 자유주의적 언론들은 이런 주장에 돛을 달아 줬다.
짐작할 수 있듯이, 여기에는 과장과 왜곡도 가미됐다. 가령 저명한 여성학자 정희진은 “메갈리아는 일베에 적극적으로 대항한 유일한 당사자”라며 메갈리아에 대한 무비판적 옹호를 정당화했다. 하지만 이선옥과 박가분이 상기시키듯이, 메갈리아 탄생 전인 2012년에 이미 일베에 대한 남녀 커뮤니티의 연합 ‘공격’(‘일베 대첩’)이 있었다. 이는 일베 따위가 남성 전체의 의식과 삶의 태도를 대변하는 게 전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준다. 사실, 일베는 배설적인 넷우익일 뿐이다. 하지만 메갈리아-워마드는 일베뿐 아니라 남성 일반을 무차별 적대했다. 그리고 일부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마치 미러링이 소라넷 폐지를 이뤄낸 것처럼 말하지만, 정작 그 성과는 국제 청원과 캠페인, 모금, 국회의원 압박 등의 운동 방식 덕분이었다고 이선옥은 바로잡는다.
그렇다면, 기성 페미니즘 진영은 왜 메갈리아를 무비판적으로 추어올렸을까? 박가분은 여기에 주류 여성단체들의 이해관계가 작용했다고 본다. 이와 관련해 그가 최근에 쓴 한 칼럼[6]의 다음과 같은 논지는 통찰력 있다.
주류 여성단체 지도자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 그 정부에 입각하는 등 제도권에 진출해 정책 수립에 영향을 미치는 ‘성주류화 전략’을 실행해 왔다. 성주류화 전략은 자문·교육‧연구 등 각종 명목으로 여성계에 예산을 할당하는 근거였다. 이 점에서 그 전략은 단순한 운동의 실천지침을 넘어, 운동 자체를 재생산하는 물적 토대가 됐다. 하지만 이는 여성운동의 관료화, 관성화 등 모순을 낳았다. 특히, 여성운동 진영이 배출한 고위 관료들과 정치인들이 여성 노동자들의 요구에 무관심하거나 때로 심지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자 여성운동은 위기를 겪게 됐다. 한명숙 전 총리에게 면담을 요구한 KTX 여성 노동자들이 전원 연행된 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여기까지는 노동자연대가 주목하는 바와 일맥상통한다. 박가분은 여기에 최근의 현상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접목시켰다.
“[성주류화 전략이 위기에 봉착한 가운데] ‘메갈리아’는 여성운동 진영의 눈에 하늘이 내린 절호의 기회처럼 보였다.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의 젊은 여성 이용자 사이에서 확산된 남성혐오 정서에 편승해서 다수의 젊은 여성을 여성운동 진영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한 것이다. 그 결과 한국여성재단을 비롯한 다수의 여성단체가 주관한 ‘2016년 여성대회’에서 메갈리아를 ‘3세대 여성주의 운동’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준’하는 데 이르렀다. 또한 지난 5월에도 나윤경 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메갈만큼의 화력을 낸 세력이 이전엔 없었다는 거예요. 우리 모두 메갈에게 빚을 지고 있어요’라고 발언하며 메갈리아를 두둔한 바 있다. 이처럼 메갈리아-워마드 신드롬은 … 주류 여성운동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 이들의 담론적·이데올로기적 후원 아래 확대 재생산된 사건이다.”
오세라비는 2015년 8월 메갈리아 커뮤니티가 개설되기 직전에 이미 여성민우회가 ‘여성혐오 근절 캠페인’을 선언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한국에서 회자된 적이 없던 ‘여성혐오’라는 키워드를 처음 던진 것은 주류 여성단체인 민우회였다는 것이다. 오세라비는 그 뒤 메갈리아가 20대 총선을 앞두고 소라넷 폐지 운동에 협력한 여성운동 출신 민주당 의원 진선미에게 1200만 원의 후원금을 모아 준 일도 상기시킨다.
오세라비는 주요 여성단체 간부들이 남 대 여의 이분법적(즉, 급진적) 페미니즘을 주창하는 것이 이들의 사회 상층부 진출 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여성단체 상층부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이 사회적 약자임을 방패로 내세우는 동시에, “남성은 죄다 악당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들의 인지도와 지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들이 민주당, 심지어 바른미래당의 의원이나 정부 관료로 진출한 구체적 사례들을 열거하며 오세라비는 이렇게 지적했다. “이들 여성 정치인들의 공통점은 당선권 내 비례대표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으로 직행하는 것이다. 여연[한국여성단체연합]의 상임대표를 지내면 비례대표 국회의원은 떼어놓은 당상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여성이 고위직에 오른다 해서 그 과실이 곧 대다수 (노동계급과 서민층) 여성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세라비는 이렇게 반문한다. “유리천장을 뚫은 소수 여성의 성공이 페미니즘의 실현이고 그것이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일인가?” 물론 유리천장은 구조적 여성 차별의 결과이므로 무너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서평자가 보기에 노동계급 여성에게는 그 이상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사실 고위직에 진출하는 소수의 여성단체 지도자들과 달리, 노동계급 여성과 남성들은 급진 페미니즘의 남 대 여 프레임에서 얻을 게 없고 도리어 불필요한 갈등으로 피해를 보기도 한다. 저항을 통한 조건 개선을 위해 서로 단결해야 한다는 점에서 보면 말이다.
남 대 여 이분법의 주요 난점
이 책의 저자들은 급진 페미니즘의 남 대 여 구도가 작위적이고, 남녀 대부분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가령 박수현은 섹스 칼럼니스트로 유명세를 탄 페미니스트 은하선이 급진 페미니즘의 핵심 전제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다음의 칼럼을 소개한다.
“남성: 다리와 다리 사이에 덜렁거리는 살덩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온 우주로부터 환대받는 존재. (중략) 촉망받는 남성이라면 성범죄자가 되더라도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게 지장이 없도록 온 인류가 힘써준다. 태어남과 동시에 무료 자동 가입한 남성 연대에서 온 힘을 다해 도와주러 올 것이기 때문이다. “(〈한겨레〉, ‘거시기 사전’, 2017.7.27)
이는 곧 남성은 특권을 누릴 뿐 아니라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한데 뭉쳤다는 말이다. 게다가 이 ‘남성 연대’는 생물학적 본성처럼 타고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수현은 이렇게 말한다. “이 음모론에 가까운 수사를 지지하는 증거는 지구상에 없다.”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남성 일반을 잠재적 강간범이자 특권층 취급하는 주장을 반박해 왔다. 특히, 남성은 동일체이긴커녕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남성 중 특권을 누리는 자들은 극소수다. 노동계급의 현실로 눈을 돌리면, 여성 노동자들이 “독박 육아”를 하고 경력 단절과 저임금으로 고생하는 이면에 남성 노동자들은 흔히 여성보다 더 긴 출퇴근 시간과 살인적 노동시간, 더 빈번한 산업재해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범죄에 대해서도 남성들은 동일체가 결코 아니다. 특히, 최근 지탄의 대상이 된 ‘장자연 사건’, 버닝썬 사건 같은 권력형 성범죄는 권력과 재력을 가진 소수의 특권층 남성이 저질렀고, 덕분에 이들은 수사기관의 비호까지 받았다. 하지만 노동계급 남성들은 그런 권력을 공유하고 있지 않을뿐더러, 대부분은 여성과 함께 분노했다. “강간 문화,” “남성 강간 카르텔” 등 남성 일반을 잠재적 성범죄자나 동조자로 싸잡아 매도하는 용어가 전혀 부적절한 이유다.
이처럼, 모든 남성들에게 원죄 의식을 강요하면 당연히 반발을 부르기 마련이다. 오히려 남성과 여성이 모두 계급으로 나뉘어 있고, 이것이 사람들의 사회적 삶에서 핵심 기준선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이 훨씬 더 현실적이다. 바로 이 때문에 여성·남성 노동자가 같은 계급으로 연대할 잠재력과 이해관계가 설명되는 한편, 남녀 지배계급과는 정반대의 이해관계를 갖게 되는 것도 설명된다. 문재인 정부의 개혁 배신에 맞서 싸우는 남녀 노동자들의 연대가 최신 사례이다.
급진 페미니즘의 성별 이분법은 남성을 싸잡아 ‘잠재적 가해자’로 만드는 한편, 여성을 ‘잠재적 피해자’로만 취급하는 난점도 있다. 오세라비는 이렇게 일갈한다. “페미니즘 운동에는 피해자 DNA가 흐른다. 1그램의 이론에 1톤의 피해의식이 담겨 있다. 여성은 언제나 약한 존재여야 하고 일과 섹스에 있어 자주성과 자율성이 없는 존재로 만든다.”
마르크스주의자들도 급진 페미니즘의 ‘피해자 담론’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피해자 담론’은 여성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질 수 있고, 정치적 평가(비판이든 지지든)도 수용할 수 있으며, 사회 변화나 성의 관계에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일 수 있음을 간과한다. 이런 수동적이고 피해자성이 강조된 여성상이 여성운동의 지향점이라면 여성해방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이와 달리, 오늘날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사회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바꿀 능력과 힘이 있다. 그 힘은 오늘날 자본주의가 여성의 노동 없이는 굴러갈 수 없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자본주의 체제는 여성을 배척하고 주변화시켜 운영되는 게 아니라, 여성을 임금 노동에 끊임없이 끌어들여 착취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 과정에서 노동계급 여성은 노동계급 남성과 같은 이해관계와 잠재력을 공유하면서 연대를 구현할 수 있다. 물론 노동계급의 단결이 늘 자동적이지는 않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자들은 사용자들과 그 정부, 그 언론의 온갖 이간질과 분열 위험에 맞서 연대를 구축하는 구실을 해야 한다.
박가분은 차별 반대 운동 내에서 영향력이 큰 정체성 정치도 비판한다. 그는 노동계급 공통의 덕목을 중시했던 과거 좌파의 전통에 향수를 표하며 좌파가 “계급성”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그의 정체성 정치 비판의 세부 내용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정체성 정치 비판과는 다소 차이점도 있지만).[7]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체성 정치의 장단점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다뤘다(가령 《정체성 정치는 해방의 수단인가?》(섀런 스미스 지음, 노동자연대)). 정체성 정치는 같은 형태의 차별을 받는 개인들은 모두 단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기초로 한다. 이런 정치가 생겨난 배경에는 성별, 인종, 민족,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 종교 등에 따라 특정 집단이 체계적으로 차별 받는 자본주의 사회의 고통스런 현실이 있다. 정체성 정치는 같은 피차별 집단 내의 공통된 정의감과 분노로 사람들을 모을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그래서 정체성 정치는 차별 반대 운동의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정체성 정치는 각종 차별과 억압의 근원이 계급 사회라는 점은 놓치게 만드는 난점이 있어, 차별 폐지로 나아가는 데 한계를 드러낸다. 또한 노동계급을 각종 ‘정체성’으로 갈라놓아, 계급 공통의 이해관계와 그에 기초한 연대를 구축하기 어렵게 만드는 파편화의 위험이 있다. 동시에, 정체성 정치는 같은 피차별 집단 내에서는 계급을 가로질러 협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계급에 따라 차별의 정도가 판이할 뿐 아니라, 차별에 맞설 이해관계가 다른데도 말이다. 지배계급의 일원이 어떤 차별을 받든 우리는 차별에 맞서 그를 방어해야 하지만, 그들에게는 구조적 차별을 통해 얻는 계급적 이득(노동계급에 대한 이간질과 이를 통한 각개격파, 효과적 착취)이 비할 바 없이 더 중요하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8]
‘피해자 중심주의’와 ‘성인지 감수성’
두 책의 저자들은 성범죄와 관련한 급진 페미니즘의 과도함과 부작용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특히, 박가분은 무책임한 ‘성폭력’ 피해호소와 성급한 낙인 찍기로 삶이 망가진 당사자들을 심층 인터뷰했다.(‘잘못 운영된 ‘인권’ 제도는 어떻게 ‘괴물’이 됐나’[고故 송경진 교사 자살 사건], ‘SJ레스토랑 사건,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가’ 등)
박가분은 이를 통해 무분별한 ‘성폭력’ 폭로의 위험성과 교훈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또한 섣불리 성범죄자라는 주홍글씨를 새기지만 정작 진실에는 관심 없고 심지어 사실이 드러나도 책임지지 않는 진보·좌파 일각의 풍토를 비판한다. 이 책에 나온 사례를 읽다 보면, 사실 검증 없이 피해호소인의 말만으로 유죄를 단정하고 사실의 입증이나 합리적 문제제기조차 봉쇄하는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가해’(‘2차피해’) 관행이 각 사례에서 문제가 됐음을 알 수 있다.
박가분이 다룬 사건들의 상당수는 2016~2017년 사이에 벌어졌다. 이는 강남역 사건 이후 ‘여성 혐오’ 담론이 일약 유행하며 남성을 성범죄의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던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박가분의 설명을 보면, 애초에 진상도 불분명한 사건이 부풀려진 데는 급진 페미니즘을 한껏 수용하고 높이 띄웠던 일부 진보·좌파의 섣부르고 무리한 개입이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중 특히 안타까운 것은 전북의 한 중학교에서 벌어진 고(故) 송경진 교사 사건이다. 최근 광주교육청이 ‘수치심을 느꼈다’는 일부 학생의 말만으로 배이상헌 교사의 성평등 수업을 성범죄로 몰아 직위해제 하고 경찰에 수사의뢰한 일이 일어난 터[9]라, 이 사례가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박가분은 송 교사의 부인인 강하정 씨를 인터뷰했다. 그에 따르면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2017년 4월, 한 여학생이 야간 자율학습에 빠진 이유를 둘러대려다 치기 어린 거짓말을 했다.(‘송 교사가 짝궁의 허벅지를 만지고 나에게는 폭언을 했다.’) 그런데 평소 송 교사와 사이가 심히 안 좋던 교사가 학생들의 잡담만 듣고 곧장 경찰과 지역 교육청에 신고했다. 설상가상으로, 〈뉴시스〉는 지역 교육청에 공식 보고도 되기 전에 송 교사의 ‘성추행 사건’으로 이를 기사화했다. 이로 인한 낙인 효과는 돌이킬 수 없었다. 학교 측과 지역 교육청, 학생교육인권센터의 대처도 부조리의 연속이었다. 송 교사는 진상조사 절차도 없이 학생들과 즉시 격리됐고, 곧이어 직위해제됐다.
경찰은 당사자 학생을 조사해 보고 정작 일찌감치 내사종결했다. 이 모든 게 오해에서 비롯한 거짓말이었다고 당사자 학생이 실토했고, 학부모와 학생, 졸업생이 송 교사 탄원서를 조직했다. 그럼에도 해당 교육청은 어쨌건 ‘학생들과 부적절한 신체 접촉이 있음을 확인했다’며 강제 전보와 징계 절차를 추진했다. 학생들이 그 신체 접촉들은 폭력이나 성적 의미가 전혀 없었다고 밝혔지만 교육청은 이를 무시했다. 학생들의 탄원서가 ‘어른들에 의해서 오염됐다’는 것이다. 탄원서 제출 자체가 “2차피해”라는 교육청 관계자의 위협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송 교사는 좌절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가분이 이 사건을 “전북 학생인권교육센터의 무리한 실적주의, 교육감의 조직보위 논리 등이 낳은 비극”이라고 보는 이유다.
한편, 이선옥은 안희정 재판과 ‘곰탕집 사건’ 재판 등을 계기로 크게 논란이 된 법원의 ‘성인지 감수성’ 개념 도입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한다. ‘감수성’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공정성과 엄밀함이 생명인 사법부의 판결 근거로 도입한다면 증거재판주의가 형해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선옥은 안희정 재판에서 논란이 된 ‘성인지 감수성’이 이미 그전부터 대법원 판례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런 추세가 확대되는 것을 우려한다.
이선옥의 지적처럼, ‘성인지 감수성’은 정의가 명확한 법률용어는 아니다.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대체로 사회에서 불거지는 여러 문제에 대해 성차별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민감성을 가리키는 의미로 통용된다. 대법원은 양성평등기본법을 근거로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했지만, 양성평등기본법 역시 ‘국가기관 등은 양성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당위를 명시했을 뿐이다.
물론 이런 개념이 애초에 도입된 이해할 만한 사회적 배경은 있다. 사법부는 성범죄에 대한 성차별적이고 보수적인 잣대를 들이대어 여성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린 전력이 많다. 가령 저항이 현저히 곤란한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만 성폭력으로 인정되는 ‘최협의설’이 이전까지 통용돼 왔다. 또한 기계적이고 보수적인 피해자 상을 정해 놓고 그에 맞지 않으면 성급하게 피해자답지 않다고 단정하거나, 사건과 무관한 고소여성의 행실 따위를 문제 삼아 그 여성에 대한 편견을 조장해 온 어두운 역사가 있다. 그런 성차별적 관행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런 보수적 관행에 반대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고, 관련 법·제도 개선을 지지해야 한다.
하지만 이선옥의 주장처럼,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단지 사회운동의 구호로 사용하는 것을 넘어) 사법 재판의 근거로 도입하게 될 때는 만만찮은 부작용이 우려된다. 특히, 여성운동 일각에서는 ‘진술이 엇갈릴 때는 고소여성의 진술을 우선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 개념을 사용하거나, 이를 근거로 성범죄 고소여성의 진술 신빙성을 평가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이는 ‘성범죄 이후의 반응은 여성마다 다 다르므로 피해자다움이란 없다’는 주장과도 상통한다.
하지만 성범죄 고소여성의 진술이나 사건과 관련 있는 이후 행적 등에서 그 진술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증거가 있다면 이를 간과해선 안 된다. 여성의 진술을 뒷받침할 증거(당사자들과 참고인들의 진술, 정황, 물증 등)와 여성 진술의 일관성, 정합성, 남김없이 진술하는지 등도 종합적으로 따져봐야 한다. 이를 거부하는 것은 사건의 실체 파악을 어렵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 되면 무고한 사람이 성범죄자로 낙인 찍히는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10] 최성호 경희대 철학과 교수가 쓴 신간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가》는 이 복잡다단하고 균형이 필요한 문제에 대해 합리적 기준점을 제시하고 있어 참고할 만하다.
‘성인지 감수성’ 개념의 느슨함과 모호함은 당사자 진술 외에 증거가 불충분하거나 회색지대가 있는 성범죄 재판에서 특히 문제의 소지가 커진다. 증거의 뒷받침이 없거나 부족할 때 고소여성의 진술에 손들어 줘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곰탕집 사건’ 판결이 이런 경우에 속한다.
물론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비교적 소수일 수 있다. (중범죄일 경우에는 극소수일 테지만 경미한 범죄일 경우에는 상당한 소수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앞서 언급한 고故 송경진 교사의 사례처럼, 잘못 새겨진 성범죄자 낙인은 엄청난 고통을 안겨 준다는 점을 무시해선 안 된다. 게다가 국가기구의 형벌권 행사는 전과가 남아 낙인 효과가 매우 크고, 피고인의 생계에도 큰 지장을 주며, 그 가족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오판의 가능성을 더더욱 경계해야 한다.
한편 이선옥은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를 안희정 재판에도 적용한다. 특히 여성단체들이 ‘위력의 존재가 곧 행사’라며, 1심 재판부가 그 둘을 구분한 것 자체를 ‘성인지 감수성 없다’고 규탄한 것을 비판한다. 이 지적은 일리 있다. 위계 관계에 있는 유력 인사와 그의 비서 사이에도 연인 관계나 합의에 의한 성관계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력의 행사 여부는 사건마다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이 자체를 거부하는 일각의 견해는 기계적이다.
하지만 이선옥이 안희정 1심 재판부의 성폭력 무죄 판결을 두둔한 것은 안희정에게 불리한 정황 증거들을 간과한 듯하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선옥은 고소여성 김지은 씨의 문자 메시지(성폭행을 당했다는 시점 이후에 지인에게 안희정에 대한 존경과 애착을 나타낸 문자를 뜻하는 듯) 등이 그의 진술의 신빙성을 크게 떨어뜨린다고 보는 듯하다. 분명 해당 문자 메시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판결 전문을 살펴보면, 안희정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가 위계 성폭력에 대해 지나치게 보수적 잣대를 적용한 문제점이 발견된다. 성관계에 위력이 작용했음직한 정황들이 여럿 있어 안희정의 결백을 단정할 수는 없다.(그 정황들의 자세한 내용은 110여 쪽에 달하는 안희정 사건 1심 판결 전문을 상세히 분석한 〈노동자 연대〉 신문 기사 ‘안희정 성폭력 무죄 판결 비판 ― 가해자가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라면 피해자가 두려워했음직하다’를 보시오.) 또한 1심 판결을 뒤집은 2심 재판부가 ‘성인지 감수성’만으로 유죄 판결을 내린 게 아니라는 점도 봐야 한다. 2심 재판부는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함과 동시에, ‘유죄의 인정은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력을 가진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는 증거주의 원칙도 판단 근거로 삼았다.
그밖에, 성범죄 관련 제도나 법안들(성범죄 무고죄 수사 유예 지침, 비동의 간음죄 신설 등)에 대한 이선옥의 구체적 주장에도 다소 난점이 있다.[11] 하지만 증거주의를 무시한 급진 페미니즘의 주관주의적 성범죄 개념을 법적으로 도입하는 것에 대한 이선옥의 예리한 경고는 진보·좌파가 귀담아 들어야 하는 부분이다. 이선옥도 언급했듯, ‘성범죄에선 유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해도 된다’는 박노자 교수 식의 ‘피해자 중심주의’가 곳곳에서 부작용을 일으켜 왔기 때문이다.
저자들의 통찰력
그 밖에도 두 책은 더 많은 사건과 쟁점들을 담고 있다. 그중 상당수가 흥미로운 토론거리이지만, 그 모든 내용들에 대한 견해를 이 서평에서 일일이 다 밝히는 것은 과욕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두 책을 직접 읽어 보기를 권한다.
다만, 저자들이 다룬 몇몇 쟁점에 대해서는 강조점과 균형 면에서 동의되지 않는 점들도 있다. ‘혜화역 시위’에 대한 태도는 그 한 사례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이 보기에도 그 시위를 주도한 분리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의 주장과 구호, 조직 방식에는 온갖 난점이 존재했다. 남성 일반과 모든 조직에 대한 배타성, 어떠한 정치적 평가도 거부하는 비민주성과 소수 ‘이너서클’ 중심의 불투명한 조직 방식 등등. 저자들의 지적처럼, 워마드 한 회원의 홍대 남성 누드모델 불법촬영도 옹호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그 시위에 연인원 수십만 명이나 되는 여성들이 참가한 것은 그저 주최 측이 퍼뜨린 여성용 데마고기에 따른 게 아니었다. 주최 측의 정치적 주장과 전술만으로 그 운동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운동 참가자들의 사회적 구성과 진정한 염원이 무엇인지가 핵심 준거가 돼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젊은 여성이 불법촬영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과 국가의 방치는 실질적인 문제다. 무엇보다 이 시위의 근저에는 젊은 서민층과 노동계급 여성들이 느끼는 사회구조적 성 불평등에 대한 정당한 불만이 깔려 있었다. 이런 객관적 차별의 실체가 없었다면 그런 대규모 운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들이 과도하다고 비판하는) “문재인 재기해”라는 냉정한 구호에 깔린 불만도 균형 있게 봐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번지르한 말과 달리 성차별 개선에 실제로는 소홀했으므로 여성 청년들이 느낀 실망감은 정당했다. 배신감은 지금 더 깊어지고 있다. 따라서 문재인을 강력 성토한 건 그 시위의 장점이었지, 단점이 아니었다. 문재인 정부에 친화적인 주류 여성계가 애초 메갈리아를 칭찬했던 태도와 달리 ‘혜화역 시위’와는 거리를 둔 이유도 문재인 정부를 강력 비판한 그 운동의 전투성 때문이었다.
한편 다른 저자들과 달리, 오세라비는 페미니스트들의 과도함을 비판하는 데서 너무 나아가 여성 차별의 현실 자체를 부정하다시피 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최근 오세라비가 전향 우익인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과 일부 공조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은 특히 우려스럽다.[12]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책들의 강점은 분명하다. 급진 페미니즘의 과도함과 부작용을 분석하는 데서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 책들은 성별 이분법적 페미니즘이 지배적 경향을 이루는 한국의 여성운동과 진보·좌파의 풍토 속에서 간과됐거나 봉쇄당한 논의를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이런 강점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어 볼 가치가 있다.
그리고 두 책의 저자들이 던진 문제의식을 발판으로, 여성 차별에 맞서는 효과적인 전략과 전망 논의가 발전하게 되기를 바란다.
[1] 이 밖에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가》(최성호 지음, 필로소픽), 《페미니즘인가 여성해방인가 ― 사회주의에서 답을 찾다》(김민재·이지완·황정규 지음, 도서출판 해방)도 주목할 만하다. 각각 급진 페미니즘의 과도한 성폭력 개념과 페미니즘 이론을 분석적으로 비판한 신간들이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참여연대 전 공익법센터 소장)의 ‘미투 운동이 극복해야 할 ‘피해자 중심주의’’(《계간 문학동네》 2018년 여름호)도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합리적 문제제기가 돋보이는 논문이다.
앞의 두 책에 대해선 다음의 별도 서평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가》 ― 성폭력 문제에 대한 철학자의 신중하고 논리적인 분석’(최미진, 〈노동자 연대〉 294호), ‘《페미니즘인가 여성해방인가 ― 사회주의에서 답을 찾다》 ―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의 장점이 돋보이는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정진희, 〈노동자 연대〉 294호). 박경신 교수의 위 논문은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거쳐 〈노동자 연대〉 웹사이트에 재게재됐다(https://ws.or.kr/recommendation/21449).
[2] 박가분의 전작에 대한 최미진의 서평은 ‘《포비아 페미니즘》 ― 페미니즘 일각의 문제점에 대한 통찰을 보여 주다’(〈노동자 연대〉 234호)를 참고하시오.
[3] ‘탈코르셋 운동’의 정치와 난점을 자세히 다룬 글로는 ‘탈코르셋 운동 어떻게 볼 것인가?’(차승일, 〈노동자 연대〉 268호)를 참고하시오.
[4]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수역 주점 사건 논란이 간과하고 있는 것’(최미진, 〈노동자 연대〉 267호)을 참고하시오.
[5]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유아인과 페미니즘 논쟁’(정진희, 〈노동자 연대〉 232호)을 참고하시오.
[6] 박가분, ‘래디컬 페미니즘의 혐오 전략, 왜 실패했는가 1’, 〈리얼뉴스〉 2019-7-10.
[7] 다만 그가 유럽 극우의 당선이나 진보 진영의 각종 패착을 주로 정체성 정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연결고리가 다소 불충분해 보인다.
[8] 이에 대해선 영국의 사회주의자 유리 프라사드의 ‘인종, 계급, 정체성’(〈노동자 연대〉 293호)을 참고하시오.
[9] 자세한 내용은 노동자연대 성명(2019.8.10자) ‘광주시교육청은 배이상헌 교사 수사의뢰·직위해제 철회하라’를 보시오.
[10]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논쟁》(최미진 지음, 2017, 책갈피)을 보시오.
[11] 이견의 세부적 내용을 여기서 다 다룰 순 없으므로 다음의 글들을 참고하시오. ‘비동의 간음죄의 쟁점들 ― ‘여성의 No는 No’ 원칙이 확립돼야 한다’(최미진, 〈노동자 연대〉 262호), ‘검찰 성폭력 수사 매뉴얼 개정 ― 수사기관에 대한 여성들의 정당한 분노가 반영되다’(정진희, 〈노동자 연대〉 251호)
[12] 이에 대해서는 ‘하태경의 ‘워마드 폐쇄법’은 역겨운 백래시 ―오세라비의 무분별한 동조도 문제’(최미진, 〈노동자 연대〉 279호)를 참고하시오.
최근 오세라비의 우경화가 한층 더 두드러진 상황을 반영해 관련 내용을 개정했다.(2019년 12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