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공정성으로 불평등이 해소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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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사태를 계기로 우리는 공정성을 역설하는 정부·여당 인사들의 위선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친문 인사들은 조국의 법무장관 임명에 분노한 청년들을 비난했다. 하지만 조국과 민주당 인사들에게 많은 청년들이 큰 환멸을 느낀 것은 당연했다. 가난한 집 자녀들은 구의역 김군 또는 김용균 씨처럼 비참하게 죽어간 반면, 조국의 딸은 ‘부모 찬스’로 쉽게 일류대 진학에 성공했다. “학부형 인턴십 프로그램” 같은 합법적 제도의 도움을 받으며 말이다.
청년들의 분노가 비록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경쟁의 룰이 지켜지지 않는 것에 항의하지만, 사실은 이런 계급 불평등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는 것이다.
조국이 사퇴한 이후 문재인은 청년들의 불만을 달래려 공정성이라는 가치를 강조하고 나섰다. 10월 22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문재인은 “공정성”이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언급했다. 사람들의 분노에 물타기를 하고, 그것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려고 말이다.
이번 시정연설에서 문재인이 가장 강조한 것은 사실 경제 성장(즉, 이윤 증대)이었다. “공정이 바탕이 돼야 혁신”도 가능하다는 말은 결국 “혁신” 성장, 즉 신자유주의적 경제 성장을 위해 공정한 경쟁이 필요하다는 시장주의적 진술인 것이다.
게다가 비열하게도 “공정과 관련한 다양한 의제”로 “노조의 고용세습”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을 언급했다. 조국 문제로 불거진 것은 계급 불평등에 대한 분노였는데, 애먼 노동자들에게 공격의 화살을 돌린 것이다.
한국당과 우파들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노조의 ‘고용세습’이 있었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얼마 전 감사원의 감사 결과를 보면 실제 채용 비리는 없었다.(관련 기사 : ‘감사원 비정규직 채용비리 감사 결과 발표 — ‘누더기 정규직화’ 이상은 꿈꾸지 말라는 경고, 〈노동자 연대〉 300호)
그런데도 정부는 반(反)노동 공조를 위해 우파들에게 타협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처럼 공정성이라는 표어를 이용해 진정한 계급 문제를 가리고 노동계급 내부를 이간질하는 문제는 문재인 정부 들어 반복돼 왔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취업준비생 청년들을 이간질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공약의 배신을 정당화한 것이 대표 사례다.
정규직의 임금을 깎는 정책(직무급제)도 공정성의 이름으로 추진하고 있다.
군 대체 복무안을 후퇴시킨 핑계도 병역 의무의 공정성이었다.
정부는 임용고시 준비생의 불만을 핑계로 학교 비정규 교·강사들의 정규직화를 막았다. 하지만 정작 취준생들의 눈물을 쏟게 만든 것은 정부가 신규 임용 수를 대폭 줄인 일이었다.
이런 ‘공정한’ 이간질이 먹힐수록 기업주들만 이롭고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악화될 뿐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는 둘 간의 공정성 문제가 전혀 아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은 동반 등락 추세를 그린다. 대기업 정규직의 임금 상승폭이 제한될수록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의 임금도 인상을 억제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지고 그 결과로 기업주들만 이익을 본다.
진정한 분단선은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 사이에 그어져 있다. 공정성 문제 제기의 핵심에 사실은 계급 불평등 문제가 있음을 분명히하면서 정부의 기만을 폭로해야 한다.
자유주의적 정의론의 한계
조국 사태로 최근 공정성이라는 말이 화두가 됐지만, 공정(과 정의)을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 상당한 견해차가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이 쟁점을 둘러싸고 역사적으로 상이한 견해들이 충돌해 왔다.
공정성과 정의를 말하는 견해 중 오른쪽에는 시장주의적 정의론이 있다. ‘개인의 노력은 보상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공적(功績)주의’나, 로버트 노직처럼 개인의 재산권과 시장주의를 절대시하는 자유지상주의적인 경향이 이에 속한다.
1990년대 초 영국 노동당이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며 더욱 우경화하는 과정에서 시장주의적 정의론이 강화됐다. 예를 들어, 나중에(2007년) 영국 총리가 된 노동당의 고든 브라운은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는 경향이 “공적이나 노력”을 무시한다고 비난했다.(《평등》, 알렉스 캘리니코스, 울력, 106p)
복지 정책을 후퇴시키는 신자유주의적 공격이 진행될 때 이런 정의 개념이 이용됐다. 복지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 ‘무임승차’ 하고 있다며 복지도 일을 해야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이른바 ‘생산적 복지’ 또는 ‘노동연계복지’)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노무현·문재인 정부의 근로장려세제가 일과 복지를 연계시킨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적 복지 정책의 하나이다.(관련 기사 : ‘경사노위 산하 위원회 ‘취약계층 소득보장’ 합의 — 기업주들에게 유리한 신자유주의 복지 ‘개혁’’, 〈노동자 연대〉 260호)
한국에서 지난 몇 년간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둘러싼 논쟁 과정에서도 ‘개인의 노력에 따른 보상’이라는 측면이 강조된 주장을 접할 수 있었다. 가령 교사나 공무원이 되기 위해 수십 대 1, 많게는 수백 대 1의 경쟁을 뚫어야 하는 상황에서 취준생들과 공기업·공무원 정규직 신입사원들 사이에 비정규직 정규직화 반대 여론이 일었다. 정규 교사가 기간제 교사의 정규교사화를 반대한 핵심 논거도 임용고시 합격 여부였다. 반대자들의 논리는 간단했다. ‘시험 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시험 준비를 위한 나의 노력은 보상받아야 한다.’
그런데 노력에 따른 보상이라는 정의 개념에는 큰 한계가 있다. 계급사회인 자본주의 사회는 출발선 자체가 불평등하기 때문이다. 시험제도가 그나마 공정한 제도라는 것은 착각이다. 문재인은 정시를 강화해서 공정성을 높이겠다고 했지만, 대입에서 수능 비율을 높여도 강남과 자사고, 특목고 학생들이 유리하다. 부잣집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공부에 집중하기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사교육 등을 통해 도움도 많이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도를 어떻게 바꿔도 금세 부잣집 자녀들에게 유리하게 된다.
또, 노력에 따른 보상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 하더라도 금세 스스로의 논리에 발목이 잡힐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력은 보상받지 않아도 되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적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 그 일을 해 온 사람들이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해서 그 일자리에서 안정적인 조건을 얻을 자격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부분 차별 속에서도 맡은 일을 책임 있게 해 오며 검증된 사람들이다. 세월호에서 끝까지 아이들을 구하다 안타깝게 죽음을 맞은 담임 교사 중에 기간제 교사도 있었듯이 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우리의 노동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냐’며 울분을 터뜨리는 것은 정당하다.
이처럼 출발선이 다르다는 점과, 보상할 가치가 있는 노력은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데서 생기는 문제 때문에 철학자 존 롤스는 “공적에 대해 보상해 준다는 생각은 실행 불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존 롤스의 정의론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라고 일컬어지는데, 시장 지상주의에 반대하는 개혁주의 진영에서 지지를 받는다. 물론 존 롤스의 정의론도 기본적으로는 개인이 시장에서 자유를 추구할 권리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그는 “차등의 원칙”을 도입해서 부분적으로 개혁적 정책을 도입할 가능성을 열어 둔다.
차등의 원칙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최소 수혜자에게 득이 될 때만 허용된다는 원리이다. 물론 이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만일 사회적 불평등이 경제 성장을 추동해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득이 된다면(일종의 낙수효과가 있다면) 그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 롤스의 주장은 급진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만약 낙수효과가 없다면 그 불평등은 허용돼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 롤스의 주장은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복지정책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해석돼 왔다. 이는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 정책이나, 입학이나 취업에서의 장애인할당제·여성할당제 등을 추진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존 롤스 식의 개념도 현실에서는 잇달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의 틀 안에서 개혁을 절충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국이 존 롤스의 정의론 지지자였다는 것이 얄궂다. 조국의 말이 어떻든 간에 고위 공직자로서의 실천에서 그는 결코 진정한 개혁을 추진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공약을 후퇴시킬 때, ‘줬다 뺏기’로 최저임금을 개악할 때, 규제프리존법 같은 ‘민영화’ 정책을 추진할 때, 부동산 폭등을 막기에 턱없이 부족했던 시장 친화적 규제책을 추진할 때 그는 그저 동조했을 뿐이다.
불평등을 개선하고 사람들의 삶을 전진시키려는 진보적 개혁 시도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이윤 논리와 끊임없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지금처럼 경제가 침체해 있는 상황에서는 그 시장 편향성이 더욱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와 공정성은 결국 양립할 수 없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진정한 정의와 공정성은 자본주의 체제와 양립할 수 없다. 시장주의적이거나 시장주의에 타협하는 정의관으로는 진정한 정의를 구현할 수 없다.
문재인은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 그러나 이 중 첫 단추인 기회의 평등조차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실현될 수 없다. 조국과 나경원의 자녀들이 얻은 혜택에서 보듯이 말이다. 이는 우리가 사는 사회가 계급에 따라 조직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공정 경쟁’을 위한 제도를 만들더라도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기회 자체가 불평등하게 분배되기 때문이다.
이 모순이 가장 분명한 영역이 노동시장이다.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은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결코 “자유롭고 공정한 교환”이 아니다.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사람들(자본가들이나 정부 관료들)이 노동자들을 고용해, 노동자들이 일한 것보다 훨씬 적은 보수를 준다(착취). 이것이 바로 자본가들이 가져가는 이윤의 원천이다. 이런 상황은 노동자에게 생산수단 접근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먹고 살려면 그는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본가가 요구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에게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가 없다. 개별 사용자를 선택할 수 있지만 사용자 계급 전체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공정한 노동에 대한 공정한 임금’ 같은 것은 없다고 매우 강조했다.
결국 기회의 불평등이 결과의 불평등을 낳는다. 오늘날 극소수의 수중에 부가 집중되고 빈부격차가 증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생산관계의 불평등을 그대로 둔 채 형식적인 경쟁 절차들을 손본다고 해서 공정성이 구현되지 않는다.
사회가 (불평등한) 계급으로 나뉘어 있으므로 역사와 계급을 초월한 윤리는 없다. 도덕과 윤리는 항상 구체적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공정성과 정의도 누구에게 유리한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자본가에게 자유란 노동자를 착취하고 자신의 재산을 불릴 자유를 뜻한다. 하지만 노동자에게 자유는 자기와 자기 피부양자들의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판매할 ‘자유’를 뜻할 뿐이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는 취업한 노동자들이 과로사로 죽어가지만 다른 쪽에서는 실업과 해고로 일자리가 없고, 소외가 만연해 자살이 늘어간다. 고시원에서 가난한 청년들과 일용직 노동자들이 죽어가도, 값싼 양질의 공공임대 주택을 짓기 위한 예산보다 민간 임대사업자들에게 더 많은 돈을 퍼준다. 누구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수년에서 수십 년 억울한 옥살이를 하지만, 누구는 죄를 지어도 온갖 힘있는 사람들이 처벌받지 않도록 도와 준다(유전무죄 무전유죄).
이 모든 일들이 누구에게는 ‘정의’이지만 누구에게는 ‘부당함(차별)’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이윤 논리가 존재하는 한 이와 같은 계급 차별과 불평등은 사라질 수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 문제를 보지 않고 공정성을 개인 간 관계의 문제로 축소하게 되면 부당성의 진정한 본질을 놓치게 된다.
지배자들은 항상 피차별자들이 근본적인 체제 문제를 보지 못하고, 개인들이 서로 반목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당시 영국에서 이주민이었던 아일랜드 노동자와 영국 노동자들이 반목하는 것을 두고 그것이야말로 “자본가 계급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비밀”이라고 했다. 지배계급은 그런 반목을 의식적으로 부추기며 이용하는 것이다.
이런 지배자들에 맞서 노동계급과 차별받는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단결과 투쟁,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의이다. 그것만이 모두에게 유리하게 정의로운 결과를 안겨 주는 사회를 낳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투쟁에 바탕해 자본주의 시스템을 제거해야 한다. 착취와 이윤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 따라서 계급이 없어진 사회에서야 진정한 공정성(정의)이 가능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사회의 상을 구체적으로 그리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사회주의에서의 핵심적인 분배 원리는 서술한 바 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분배하는 (사회주의) 사회가 그것이다. 착취가 없고, 민주적이고 계획적으로 운영되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생산력이 모두의 복리를 늘리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이용될 것이므로, 진정한 평등도 가능할 것이다.
오늘날 조국 사태를 보고 분노하며 공정성을 바라는 청년들의 정서에는 정당한 분노와 바람이 담겨 있다. 아직은 이 청년들이 자본주의라는 게임의 룰을 문제 삼기보다는 게임의 룰이 지켜지지 않는 것에 항변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이 정서는 더 급진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자본주의는 애초에 약속한 룰을 지킬 수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이비 진보 세력에게 지금 실망한 청년들이 장차 어떤 정치적 대안으로 향할 것인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혁명적 좌파는 자본주의 체제의 수혜자(수호자)들에 맞서 노동계급의 투쟁을 (결국 노동자 혁명으로까지) 전진시키는 방향으로 더 많은 연대와 지지가 모이도록 분투해 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