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균 이후에도 곤궁한 청년 현실은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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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 씨 사망 이후에도 청년들은 위험한 작업 현장에서 떨어지고, 깔리고, 끼이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1~9월 18~34세 청년 산업재해자 수는 1만 3129명이었다. 이 중 사망자 수는 91명이다. 지난해와 비교해 사망자는 비슷하고 재해자는 오히려 1500명 가량 늘었다(지난해 같은 기간 18~34세 청년 재해자 수 1만 1630명).
청년들은 김용균 씨와 비슷한 이유로 다치거나 죽어 갔다. 위험한 환경, 단독 작업, 안전 장치의 부재, 하청 구조 등등.
올해 7월 10일, 1년 차 27살 하청 노동자가 엘리베이터를 수리하다가 사망했다. 홀로 작업하다가 갑자기 상승한 엘리베이터와 벽 사이에 끼여 죽은 것이다.
9월 11일에는 31세 하청 노동자가 아파트 외벽을 청소하던 중 옥상의 로프가 풀리면서 중심을 잃고 추락사했다. 안전 감독을 하는 사람도 없었고, 별도의 구명줄도 없었다. 안전모조차 인증제품이 아니었다.
역대 최저 청년 실업률?
최근 청년 노동자 사망이 두드러진 곳은 배달업과 건설업이다.
플랫폼 산업 성장 이면에는 청년 노동자들의 죽음이 있다. 최근 3년간 일을 하다 사망한 18~24세 청년 중 44퍼센트가 오토바이 배달 중 변을 당했다. 그런데 정부가 ‘전속성’(하나의 기업에만 속해 일하는지 여부)을 기준으로 산재보험 적용을 판단하다 보니 플랫폼 노동자들은 산재보험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올해 4월 10일 수원의 한 건설 현장에서 특성화고 졸업생 김태규 씨가 5층 높이에서 추락사했다. 사측은 실족사라고 하지만 김태규 씨의 작업 현장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취직이 어려워지자 일용직에 종사하는 20대가 크게 늘고 있는데, 이들 중 많은 수가 자격증이나 기술 없이도 바로 투입될 수 있는 건설업 일용직으로 유입되고 있다.
이처럼 청년들이 열악한 일자리로 내몰리는 이유는 심각한 청년 실업과 관계가 있다.
취업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서 일단 열악한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뛰어드는 청년들이 많아졌다. 이렇게 일자리를 얻은 청년들은 참고 견디면서 좀더 안정된 일자리로 이직할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 위기 상황에서 이런 기대는 거듭 좌절되기 일쑤이다.
문재인은 산재를 줄이는 데서도, 청년들에게 안전하고 좋은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데서도 별로 한 일이 없다.
최근 문재인 정부는 2012년 이래 최저 청년실업률(7.2퍼센트)을 기록했다고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실제 청년 취업자 증가분의 대다수가 초단시간 노동자였다.
일자리의 질도 나아지지 않았다. 청년들 중 49.7퍼센트는 첫 일자리를 그만둔 사유로 “근로 여건 불만족”을 들었다. 첫 일자리의 임금이 월 200만 원 미만이었던 경우가 79퍼센트나 됐다.(통계청 2019년 5월 경제활동인구조사) 그나마 안정성과 임금이 보장되는 공기업과 공무원에 청년들이 쏠리는 이유다.
정부가 대표적 청년 일자리 정책으로 내세우는 청년추가고용장려금제도, 청년내일채움공제제도, 청년구직활동 지원금 등은 실업률을 줄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또한 정부가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청년들의 취업을 간접적으로 지원해 주는 정도다.
이런데도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일자리가 반드시 대기업과 공공기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며 중소기업 취업을 강조한다. 청년들에게 눈높이를 낮추라던 박근혜 정부의 방향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가 청년들에게 추천하고 있는 “청년친화 강소기업” 중에는 지난 3년(2017~2019년) 동안 과로사·과로 자살 산재가 벌어진 기업이 11곳이나 포함돼 있다. 과로사가 발생했지만 산재 인정은 받지 못한 곳까지 포함하면 그 수가 23곳으로 늘어난다.(신창현 더민주당 의원실)
이런 열악한 중소기업에 많이 몰리는 게 직업계고 학생들이다. 문재인 정부는 값싼 직업계고 인력을 필요로 하는 중소기업을 위해 “죽음의 현장실습 제도”를 부활시켰다. 고(故) 김동준, 김동균, 홍수연, 이민호 군 등 많은 청년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그 제도를 말이다.
이처럼 문재인 정부가 말로는 매번 “청년”을 들먹이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자, 청년들의 문재인 지지율이 급락했다. 특히 조국 사태로 문재인 정부 인사들의 실체가 드러난 시기에 냉소와 환멸이 컸다.
비정규직 정규직화가 청년의 취업문을 좁힐까?
그런데도 문재인 지지자들은 20대 청년들이 박탈감을 표현하자 이것을 보수적 반발로 몰아갔다. 특히 조국 임명 반대 시위를 벌인 학생들이 소위 학벌이 높다는 이유로 말이다.
하지만 그 학생들이 모두 특권층도 아닌데다가, 극소수 지배계급 부모들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자식에게 계급 특권을 물려주는 행위가 불공정하다고 느끼며 반발하는 건 정당하다.
지난 수년간 고학력자 실업도 늘어 왔다. 소위 높은 학벌을 획득하더라도 괜찮은 일자리를 얻기 힘들어 또다시 취업 관련 시험에 매달리는 청년들 비중이 높다.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며 20대 청년을 비난하자, 보수 우파들은 여기서 반사이익을 얻으려 애쓴다.
특히 공정성에 대한 청년들의 갈망을 이용해, 비정규직 정규직화 과정에서 비리와 부패가 만연했다는 거짓말을 퍼뜨리며 기존 노동자들과 청년 실업자를 이간질하고 있다. 공기업 등에 입사한 일부 청년 노동자들도 비정규직 정규직화가 공정하지 않다며 반발했다(공정성 문제에 대해서는 ‘문재인의 공정성으로 불평등이 해소될까?’〈노동자 연대〉 303호를 보시오).
그러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청년들도 많이 유입될 수 있는 열악한 일자리를 개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청년들에게도 이롭다.
괜찮은 일자리로의 취업문 자체가 좁다는 것은 청년 실업자 중 누군가는 저질 일자리로 가야만 한다는 걸 뜻한다. 김용균 씨도 한국전력에 정규직으로 취직하고 싶어 했지만 녹록하지 않았고 결국 하청업체로 취직해야 했다.
진정한 분단선은 청년 실업자와 기존 노동자 사이에 있는 게 아니다. 질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는 문재인 정부·기업주와 노동계급(다수 청년들도 노동계급의 일부이다) 사이에 진정한 분단선이 있다.
문재인의 잘못은 엉터리 비정규직 정규직화로 기존 노동자와 청년 모두의 조건을 개선하지 않는 것이다.
청년 실업자, 정규직, 비정규직이 함께 정부를 향해 질좋은 일자리를 확대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롭다.
자본주의가 청년 실업과 저질 일자리의 근본 원인
청년들이 위험하고 열악한 일자리에 내몰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본가들이 경제 위기 시기에 노동자들을 해고로 내몰고 더 불안정한 고용 형태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공격에 청년층은 특히 취약하다.
기업주들은 숙련도가 낮은 청년들의 신규 고용을 축소하고 기존 노동자를 쥐어짜는 게 비용을 절감하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1997년 경제 위기 전후 주요 대기업들의 채용 방식에도 변화가 있었다. 일단 전체 고용 규모와 함께 채용 규모가 대폭 줄었다. 또, 1996년에는 신규 채용이 전체 채용 규모에서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나 2002년엔 5분의 1로 감소했고 경력직 채용 비중이 늘었다.
더 근본적으로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경향’이 실업을 더 악화시킨다. 기업들은 이윤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 노동절약적 기술·기계에 계속 투자를 늘린다. 이제 더 적은 노동자로도 같은 양의 상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된 기업주들은 신규 채용을 줄이고, 기존 노동자를 해고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실업자를 “상대적 과잉인구” 혹은 “산업예비군”이라고 불렀다. “산업예비군” 중 일부는 취업이 상당히 불규칙적인 노동자 집단이다. 안정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저임금 아르바이트 자리를 전전하는 청년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지적했다. “과잉인구의 생산은 이미 취업한 노동자들의 축출이라는 훨씬 눈에 띄는 형태를 취하거나, 추가적 노동인구를 통상적인 통로를 통해 흡수하는 것이 더욱 곤란해지는 형태를 취한다.”
이런 산업예비군의 존재 덕분에 기업주들이 기존 노동자를 더욱 쥐어짜기가 수월해진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기존 노동자의 “과도노동”과 산업예비군의 “강요된 나태”는 동전의 앞뒷면이다.
취업한 청년 노동자들도 다시 실업 상태로 가지 않기 위해서 고된 노동을 감내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이윤을 위해 기존 노동자를 쥐어짜면서 청년들에겐 실업과 저질 일자리를 강요하는 정부와 기업주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에 반복되는 청년 노동자 죽음의 책임이 있다.
청년들의 저항
최근 세계 곳곳에서도 청년과 노동자들의 반란이 이어지고 있다. 청년들은 실업, 부패 등 자본주의가 낳은 폐해에 불만을 키워 왔다.
특히 홍콩에서 청년 수만 명이 거리 시위에 나섰다. 이들도 한국의 청년들처럼 높은 실업률과 닭장 같은 주거에 고통받았다.
레바논, 칠레, 볼리비아, 페루 등 반란이 확대되고 있는 나라들에서도 20~30퍼센트에 육박하는 높은 청년 실업률이 분노를 촉진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청년들의 반란은 노동계급의 저항을 자극하는 도화선이 되곤 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이윤에 타격을 미칠 수 있는 노동계급의 저항과 연결됐을 때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지금의 세계적 저항에서도 청년들의 거리 시위는 노동자 파업 등으로 이어지며 더 강력한 투쟁으로 발전할 잠재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