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트럼프, 미국 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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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9일에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사례를 추가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백악관을 떠난 지 600일 가까워진 지금도 그는 여전히 미국 정치의 중심에 있다.
지금 트럼프는 2021년 1월 6일 미국 극우의 국회의사당 난입에 관한 의회 조사를 받고 있다.
이 의회 조사는 민주당이 주도하는 것으로, 트럼프를 형사 기소해 대선 재출마를 가로막고 극우의 정권 탈환 계획을 좌절시키고자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할 듯하다.
반(反)트럼프의 기수를 자처하는 공화당 하원의원 리즈 체니는 와이오밍주(州) 예비경선에서 트럼프 측 극우 성향 후보에게 대패했다.
이는 트럼프와 극우의 세력을 보여 준 상징적 사건이지만, 유일한 사례는 아니다. 한 조사를 보면, 올해 공화당 예비경선 당선자 470여 명 중 250명이 2020년 11월의 대선 결과를 바이든에게 “도둑맞은” 것으로 여긴다.
바이든 정부하에서도 트럼프와 극우가 끝장나기는커녕 활개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을 저지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위기를 토양 삼아 성장한 극우
미국 극우는 미국과 세계의 경제 위기와 미국 지배계급의 대응을 발판으로 성장했다.
2007년 미국 주택 대출 시장의 거품이 꺼지면서 수십만 가구가 거리로 나앉았다. 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2008~09년의 공황을 거쳐 지금도 계속되는 세계경제 위기로 이어졌다.
사회적 불평등은 날로 심각해졌다.
공화당은 대중의 분노를 이용해 민주당을 공격했지만, 대중의 고통은 모르쇠했다. 공화당은 오바마의 꾀죄죄한 전국민 단일건강보험(‘오바마케어’)을 누더기로 만들었다.
이런 권력층에 대한 환멸 때문에, ‘1퍼센트에 맞선 99퍼센트’를 구호로 내건 ‘점거하라’ 운동이 분출했다(관련 글 ‘미국 ‘점거하라’ 운동의 의의’, 《마르크스21》 12호).
하지만 오른쪽에서도 운동이 등장했다.
2008년에 공화당 안팎에서 부상한 우익 운동 ‘티파티’는 자잘한 인종차별적 우익, 기독교 우익, 극우 단체들이 모인 느슨한 연합 조직이었다.
그러나 티파티는 이전까지 정치 무대의 바깥에 있던 극우의 발판이 됐다. 티파티에 진입한 극우는 기독교 우익 단체들과 결탁해 공화당 기층을 잠식하며 세를 불렸다.
티파티의 공약에는 미국 우선주의(‘고립주의’)의 요소들과 함께, 규제 완화와 민영화 같은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요소도 많았다. 우익 대자본가 코크 가문 같은 자들도 티파티를 후원했다.
이들을 묶어 주는 공통 분모는 인종차별이었다. 미국이 중동에서 제국주의적 전쟁을 치르면서 발전시킨 무슬림 혐오와 이주민 천대가 대표적이다.
공화당 권력자들은 극우를 경멸했지만 경제 위기의 책임을 돌리고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극우의 언사를 한껏 이용했다. 이 때문에 극우의 역겨운 주장이 공식 정치에서 논의될 만한 견해로 취급될 수 있었다.
오바마와 민주당은 여기에 전혀 만만찮게 도전하지 않았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하에서도 인종차별은 더 심해졌다. 오바마 정부하에서 경찰의 흑인 살해를 규탄하는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M) 운동이 처음 시작됐을 때, 오바마는 중무장 병력을 동원해 이 운동을 탄압했다. 오바마에 대한 대중의 환멸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기꾼 억만장자 도널드 트럼프가 극우의 “버서” 운동*의 대변자 행세를 하며 정치 운동을 시작했다.
트럼프와 ‘투 트랙’
트럼프는 오바마 정부에 대한 대중의 환멸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취임한 트럼프는 반동적 정책들을 추진했다. 무슬림 혐오는 부시·오바마 정부 시절에도 있었지만, 트럼프는 취임 직후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 온 이주민의 입국을 아예 행정명령으로 금지하기까지 했다.
미국 지배계급 주류는 트럼프가 역대 최대로 부자 감세와 기업 부양책을 펼 때는 트럼프의 반동을 얼마든지 용인했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미국 제국주의가 구축한 세계 질서를 트럼프가 교란시킨다는 것이었다.
트럼프는 우익 유권자층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자기 방어에 이용했다.
트럼프는 극우에게 그들이 활개칠 공간과 자신의 전국적 인지도를 제공하고 극우의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2017년 파시스트가 반(反)파시즘 시위 참가자를 살해했을 때, 2020년 극우가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M) 시위대에 총격을 퍼부었을 때 트럼프는 이를 비호했다.
극우도 트럼프를 이용했다. 트럼프 덕에 반동적 정치가 더 공공연해지자, 극우는 활동 방식을 더 적극적으로 바꿨다.
이전까지 극우의 주된 전술은 공화당 내 ‘우려하는 시민들’ 행세를 하는 것이었지만, 이제 거리 행진과 폭력으로 자신들의 극우 면모를 공공연히 과시하기도 하는 ‘투 트랙’ 전술을 썼다.
트럼프가 재선에 도전하며 주류 권력층과 결정적으로 반목하는 상황을 이용해, 미국 극우는 전국적 조직망을 갖춘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 안에는 아직 소수이지만 노골적인 파시스트들도 섞여 있다.
그 사례 중 하나가 ‘프라우드 보이스’다. 원래 ‘프라우드 보이스’는 1930년대 나치를 몽상하던 미미한 집단들의 느슨한 연계에 불과했지만, 트럼프 임기가 끝날 때쯤에는 전국 10여 개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 폭력 시위를 조직할 만큼 성장했다.
‘프라우드 보이스’는 또한 1월 6일 국회의사당 난입을 주도한 핵심 단체 중 하나다. 이 난입은 트럼프의 권좌를 부지한다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특정 상황에서 극우가 정치의 중심으로 단숨에 진입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관련 기사 ‘트럼프가 위험천만한 극우 운동을 일으키다’).
바이든에 대한 환멸을 이용해 기반을 다지다
바이든은 취임 직후 양극화 극복, 경제 인프라 재건, 미국 자본주의의 경쟁력 제고를 목표로 하는 야심찬 경제 정책을 표방했다. 하지만 사회적 불평등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바이든 정부가 투입한 자금 대부분이 기업 지원에 돌아갔다. 예컨대 바이든의 기후 위기 대응 재정 지출은 셰일가스 시추 기업과 전기차·수소차 생산 기업을 위한 보조금에 쓰였다.
바이든 정부의 몇몇 서민 지원책도 부족한 수준이었다. 예컨대 최근 바이든은 대학생 학자금 대출을 탕감하겠다고 발표했다. 공화당과 주류 언론들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거라며 맹비난했다. 하지만 소득 수준에 따라 미국인 약 3분의 1은 신청 대상에서 아예 제외되고 나머지도 심사를 거쳐 걸러낸다.
게다가 바이든은 이를 위해 필요한 예산의 겨우 30퍼센트만을 마련했을 뿐이다.
바이든은 트럼프의 악명 높은 정책 몇몇을 유지·확대하기도 했다. 예컨대 트럼프의 인종차별적 이주민 통제 정책과 악명 높은 탄압 기구 이민세관단속국(ICE)을 온전히 보존시켰다.
이런 이유로, 바이든 정부 지지율은 취임 6개월 만에 30퍼센트대 초반으로 떨어져 2022년 2사분기가 끝날 때까지 반등하지 못했다(〈CNBC〉).
불만
중첩된 위기와 그에 따른 고통은 극우들에게 다시 기회가 됐다. 이들은 트럼프 시절 익힌 두 전술(위에 언급된 ‘투 트랙’) 모두를 한껏 이용했다.
2020년 11월 선거를 치르면서 ‘트럼프주의자들’은 공화당 내 최대 분파가 됐다. 극우는 연방의원단 수준에서는 압도적이지 않지만, 공화당의 여러 지역당(특히 남부와 중서부)을 장악했다.
극우의 직접행동도 바이든 정부하에서 오히려 늘었다. 미국 시민단체 ‘충돌 지역·사건 데이터 프로젝트’의 조사를 보면, 미국 남부에서 극우 단체들이 이주민·유색인종을 상대로 일으킨 폭력 사건이 2021년 1월에서 2022년 3월 사이 13배나 늘었다.
트럼프는 “좌파 민주당”을 비난하고 “진짜 미국인들”의 친구를 자처하며 극우에게 전국적 초점을 제공하고 있다.
트럼프가 집권기에 남긴 결정들이 바이든 시기 극우의 성장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 사례 하나는 미국 연방대법원 구성이다. 트럼프는 집권기에 극도로 보수적인 판사 셋을 연방대법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이전의 진보적 판결 일체를 되돌리려는 기독교 우익의 오랜 소망을 반영한 것이었다.(관련 기사 ‘알렉스 캘리니코스 논평: ‘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는 무엇을 보여 주는가’)
이렇게 구성된 연방대법원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해 여성의 낙태권을 공격했을 뿐 아니라, 팬데믹 방역 조처(마스크 착용 의무)를 부분 위헌 판결했고, 미국 환경청(EPA)의 온실가스 배출 규제 권리를 제약했다.
바이든과 민주당은 국가기관의 수사를 이용해 트럼프를 압박하려 한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트럼프가 (피해자 코스프레 하며) ‘아웃사이더’, 권력층의 적을 자처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 있다. 그에 고무돼 극우가 기층에서 운동과 조직을 건설하는 것을 바이든은 저지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민주당과 미국 국가는 극우 부상의 토양인 중첩된 위기를 해결하고 노동계급·서민을 구제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
좌파적 도전은 어디에?
지난 10년 동안 미국에서 극우만 성장한 것은 아니다.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M) 같은 대규모 대중운동, 버니 샌더스 돌풍을 일으키고 좌파 의원들을 당선시킨 민주사회주의 운동(DSA)도 벌어졌다.
BLM 운동은 거대하게 부상했지만, 트럼프에 맞서 바이든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민주당 차악론의 대안을 제시할 정치가 부족했다. 바이든이 BLM 운동의 주요 요구 모두에 공공연히 반대했는데도 말이다.
DSA, 곧 민주사회주의 운동이 그런 정치를 제공할 수 있는 세력으로 여겨졌다. ‘점거하라’ 운동과 버니 샌더스 대선 도전의 수혜자로 성장한 미국 민주사회당은 트럼프 임기 동안 당원 수가 수천 명에서 9만 5000명까지 늘었고, 오카시오-코르테스 등 진보파 의원들을 당선시켰다.
그러나 DSA의 성장은 현재 벽에 부딪혀 있다. DSA의 당원 수는 6만 9000명까지 떨어졌다.
DSA는 기층 대중운동에 효과적 정치를 제공하고 운동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선거와 민주당 내 정쟁에 몰두하는 문제점을 드러냈다.
극우가 활개치고, 전쟁이 벌어지고, 낙태권이 공격받는 동안 DSA는 기층의 대중 행동을 거의 호소하지 않았다. DSA가 가장 집중한 활동은 11월 중간선거 예비경선을 위한 민주당 선거인단 모집이었다.
그러면서 DSA는 무원칙한 타협도 거듭해 왔다. 제국주의 문제에서 특히 그렇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DSA는 전쟁 즉각 종식과 미국의 나토 탈퇴 및 제국주의적 확장 중단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런데 민주당에서 오카시오-코르테스를 비롯한 DSA 소속 의원들이 미국의 러시아 제재와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에 일제히 찬성표를 던졌을 때 DSA는 개입하지 않았다.
지난해 9월 오카시오-코르테스가 이스라엘 ‘아이언돔’에 대한 재정 지원 증액에 반대하지 않았는데도(관련 기사 ‘미국 좌파 의원 오카시오-코르테스, 왜 이스라엘 군사 지원에 반대표 안 던졌나’) DSA는 당의 ‘간판 스타’를 비판하지 않았다.
DSA는 의회와 국가기관을 통해 변화를 이뤄야 하고, 그러려면 민주당을 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관련 기사 ‘미국 민주사회당(DSA)의 민주적 사회주의’)
그러나 극우와 공화당 우파 사이에는 인종차별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대자본가 정당인 민주당과 좌파 정치운동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다. 오히려 민주당은 오랫동안 공화당에 대한 차악을 자처하며 대중운동을 순치시켜 왔다. 대자본의 이해관계를 거스르지 않도록 운동을 단속하는 구실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 급진 좌파들은 오랫동안 민주당을 “사회운동들의 무덤”이라고 비판해 왔다.
민주당을 변화의 수단으로 여기고 초점으로 삼다 보면 이런 길들이기 압력에 휘둘리게 된다. 하지만 물가가 급등하고 전쟁이 계속되며 바이든 정부가 환멸을 사는 지금 좌파적 반대가 건설되지 않으면, 트럼프와 극우가 서민 정서의 대변자인 양 행세하는 데에 득이 된다.
다른 길도 있다. 바이든 정부하에서도 투쟁이 있어 왔다. 인플레이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2021년 가을에는 파업이 급증하고 노동조합에 대한 지지가 늘기도 했다.(관련 기사 ‘미국에서 파업 물결이 시작되고 있는가?’)
연방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를 규탄하고 우익들의 낙태권 공격에 맞서 벌어진 지역 운동들도 그런 투쟁의 사례다.
국가기관과 민주당에 몰두하는 정치가 아니라 바로 이런 투쟁들을 키우고 연결·심화시키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정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