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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흉상 철거:
모두가 공유하는 역사적 전통에서조차 좌파를 찍어내는 윤석열 정부

육군사관학교가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를 강행한다.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청산리 등 가장 성공적이었던 항일 전투를 지휘해 초창기 항일 무장 독립 투쟁 전체(좌우 모두)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을 30년 전에 없어진 소련 공산당 가입 전력이 꼴 보기 싫으니 치워버리겠다는 것이다.

홍범도 장군이 러시아 혁명 정부와 연대하고, 사회주의를 지지한 것은 옳고 명예로운 일이다

광복절 직후에 벌어진 난데없는 역사전쟁은 윤석열 정부의 강경 우익 본색의 일환이다.

이미 7월 초에 국가보훈부 초대 장관 박민식이 친북 독립운동을 재심사하겠다고 한 바 있다. 북한 국가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에 대해 친북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은 결국 좌파적 민족 독립운동을 도려내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한국 군부와 육군사관학교는 모두 그 뿌리에 있는 ‘미군정’과 ‘친일파’라는 키워드를 지울 수 없다. 건국 이후 3공화국(1962~1972) 때까지 국방부 장관 10명 중 8명이 일본군 장교 출신이거나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 출신이었다. 법무부장관은 12명 중 9명이 일제 판검사 출신이었다. 제헌의회 의원 중 잠깐이라도 독립운동에 발을 담궜던 이는 전체 209명 중 68명에 불과하다.

홍범도 깎아내리기가 자기 고백처럼 들리는 이유다.

하지만 정부가 공식적으로 좌파 상징을 밀어내는 것은 국가 전반의 우경화를 노리는 것이므로 냉소로 넘길 일이 아니다.

윤석열 정부의 강경 우익적 역사 해석은 홍범도처럼 일관된 반제국주의 투사, 노동계급 투사의 삶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친제국주의·친자본주의 인생의 가치를 올리는 효과를 노린다.

8월 31일 국회 연설에서 국무총리 한덕수는 해군의 최신 잠수함인 홍범도함의 이름까지 바꾸겠다고 했다. 군 최정예 무기의 이름을 대통령 지시와 군의 동의 없이 총리가 독단으로 바꾸겠다고 할 수 없을 것이므로 이 발언의 배후는 윤석열이다.

윤석열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 운동이었습니다. ... 우리의 독립운동은 주권을 회복한 이후에는 공산 세력과 맞서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내는 것으로, 그리고 산업 발전과 경제 성장, 민주화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독립운동을 포함한 한국 현대사 전체를 우익 정치와 자유시장 경제 지향이라는 프레임으로 다시 쓰고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한국 지배계급의 친일·친미 경력과 지향을 포장하고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을 그들의 공으로 돌리는 데 안성맞춤이다.

또한 서방(미·일) 제국주의를 지원하기 위한 한미일 안보 협력 강화 노선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국방부는 그 속내를 이렇게 표현했다.

“[육사 내 흉상 모델은] 6·25전쟁 영웅, 한미동맹의 가치와 의의를 기리는 방향으로 재정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국가보훈부 장관 박민식이 광주광역시의 정율성 기념공원 추진을 갑자기 공격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율성은 광주 출생 작곡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일제 때 중국 공산당에 가입해 항일 운동을 했다. 중국의 대표적인 군가들이 그의 작품이다. 잊혀진 독립운동가였던 그는 한중 수교 이후 중국과의 우호 친선의 한 징표로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우파 정부들도 정율성 기념을 반대하지 않았던 이유다. 그런데 이제는 정율성 기념이 정부 노선과 공식적으로 모순되기 시작한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강경 우익 본색이 역사전쟁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출처 대통령실

홍범도와 소련 공산당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이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고, 1921년 자유시 참변에 책임이 있어서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의 침략에 대비해 자유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장교 육성이라는 육사의 정체성”에 홍범도 흉상이 걸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범진보 측의 주된 반박 논리는, 당시 연해주·만주에서는 러시아 혁명 정부의 도움이 필요했고 공산당 가입은 그런 필요를 위한 실용적인 고육지책이었다는 것이다.

일리 있으나 꽤 회피적이다. 홍범도는 어릴 때 머슴 생활도 했던 노동자 출신으로 최고 실력을 자랑하는 포수 출신이기도 하다. 한일 병탄 이전에 이미 간도와 함경북도 북부를 무대로 항일 무장 투쟁을 시작한 홍범도는 1918년 창당한 한인사회당(이동휘가 주도한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입당설이 있을 정도로 당시에 이미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과 가까웠다.

홍범도는 러시아 혁명 정부와의 연대를 중시했으며, 1927년 러시아 공산당 가입 이후 평생 당적을 유지했다. 그러니 홍범도가 진짜 사회주의자는 아니라고 봐야 한다는 변호론은 그 의도와 무관하게 수세적이고 군색해 보인다.

만주·연해주에서의 불가피성으로 변호하는 논리는 또한 한반도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에 가입한 독립운동가들의 선택을 일관되게 변호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런 변호론은 공산주의를 선택한 것은 지지받기 어렵다는 암묵적 가정을 전제한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홍범도와 동료 독립운동가들이 당시 러시아 혁명 정부와 연대하려 하고, 또 사회주의를 지지해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옳고 명예로운 일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스탈린 반혁명(1928년) 전의 러시아 혁명 정부가 진지한 독립투사들을 지원해 그들의 신뢰를 얻었다는 것은 러시아 혁명 정부의 명예이기도 하다.

제국주의 전쟁이었던 제1차세계대전을 끝낸 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18년 독일 혁명이었다. 러시아 혁명 정부는 노동계급 국제주의를 표방하며 러시아 제국의 옛 소수민족들에게 민족자결권을 선포했고, 그 영역을 넘어서는 피억압 민족의 해방 운동을 지지·지원했다.

한국 독립운동 안에서도 1918년부터는 사회주의 계열이 생겨난다. 1919년 3·1 운동은 그 과정을 가속화했다.

그 결과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공들여 소집한 1922년 극동민족대회에 자국 내 운동을 대표할 만한 사람들로는 조선, 중국, 몽골에서 온 참가단이 꼽혔다.

특히, 이 시기 한국의 독립 운동은 러시아 혁명 지도자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었다.

첫째, 레닌과 트로츠키는 한인 공산당 조직들을 통해 직접 거액의 자금과 사람을 지원했다. 무엇보다 러시아 혁명 자체가 한국인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고 고무했다.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차단하려고 미국의 윌슨도 민족자결권을 말했지만, 그것은 제1차세계대전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미국은 동료 승전국 일본을 지지해 조선의 독립 염원은 외면했다.

둘째, 제1차세계대전 승전 강대국들(14개국)이 러시아 혁명을 파괴하려고 반혁명적 군사 개입을 감행했다. 일본은 간섭군의 일원으로 연해주와 시베리아를 침략하고 만주를 위협했다. 러시아 혁명과 한국의 독립운동, 중국의 항일 투쟁 등은 공동의 적에 맞서야 했다.

셋째, 한인 사회주의자들은 당시 이미 조선의 지배층과 평민들 사이에 일제의 식민 지배에 대한 이해관계가 다름을 깨닫고 있었다. 초기 한인 사회주의자들이 당시 일제의 강점을 민족적 수치의 문제가 아니라 반제국주의 문제로 인식하고 따라서 러시아 혁명과 조선 독립, 세계적 변혁이 서로 연관돼 있다고 본 문헌들이 존재한다. 러시아 혁명 정부와 한인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노동계급 국제주의가 식민지 민중에게 어떻게 희망이 될 수 있는지를 실천으로 입증하려고 했다.

레닌과 스탈린

스탈린의 시대에는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홍범도 본인으로 치면,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한국 참가단 중에서는 당시 유일하게 레닌과 트로츠키와 (그 둘의 요청으로) 동시 면담을 하고 찬사와 환대, 지지와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1928년 반혁명의 지도자 스탈린에게서는 짐짝 취급을 받았다.

스탈린은 자국 보호를 우선하고 대러시아 국수주의를 부활시켰다. 그 결과 일본을 자극할까 봐 극동의 항일 투쟁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다. 독일과 일본의 협공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중국에선 공산당을 국민당에 복종케 해 재앙을 낳았다. 소수 민족 탄압의 일환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홍범도는 카자흐스탄으로 연해주 한국인들과 함께 강제 이주를 당해 고생스런 노년을 보내게 된다.

노년의 카자흐스탄 시절 등을 다룬 자료들을 보면, 홍범도는 여전히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다. 레닌에게 선물 받은 권총을 평생 애지중지했다는 증언도 있다. 독일의 소련 침공 직후에는 70대의 나이에도 항독 전투에 참전하겠다고 자원까지 한다. 홍범도가 러시아 국가의 성격 변화에 대해 명료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레닌 생전의 볼셰비즘 전통에 매료돼 사회주의 신념을 유지했다고 보는 게 온당할 것이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스탈린 체제의 악행과 폐습, 변질을 이용해 레닌주의와 사회주의 전통 전체를 비방하는 것이 우파의 전매특허라는 점이다. 레닌 시대와 스탈린 시대의 차이는 지도자 개성의 차이 문제가 아니다. 실천이 판이했고, 딛고 선 계급 기반이 전혀 달랐다.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 사이에는 “피의 강물”이 흘렀다.

윤석열 정부와 우파가 홍범도가 레닌과 협력한 것이 도덕적·정치적 흠결이라도 되는 양하는 것은 의도적인 거짓말이다. 홍범도 등 당시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국제 사회주의로 기운 것, 러시아 혁명이 이들의 신뢰를 얻은 과정이나 초기에 이룩한 진보는 피억압 대중의 관점에서 대단히 명예로운 역사이다.


자유시 참변: 러시아 공산당과 홍범도에게 책임이 있나?

1921년 자유시 참변을 교조적인 러시아 공산당이 사악하게도 한국인 독립군을 속여서 무장해제시키고 학살한 듯이 말하는 것은 왜곡이다.

자유시 참변은 불행히도 러시아 혁명 정부측과 독립군이 일본군에 밀리던 상황을 배경으로 한인 사회주의자들끼리 주도권 다툼으로 분열하면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1918년 창당된 한인사회당은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로 분열해 1921년 각각의 고려공산당을 창당한다.

당시 만주(간도)·연해주를 무대로 한 한국 독립군들은 일본이 청산리 전투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을 감행하자 불가피하게 북쪽으로 후퇴한다. 러시아 극동 정부도 백군을 도운 일본군에 밀려 후퇴한다. 독립군들은 러시아령 자유시에 모여 군대 통합을 하기로 한다.

그런데 러시아 극동공화국은 자유시 입성시 일단 무장을 해제할 것을 요구한다. 일본군이 러시아령 내 한인 독립군을 문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전세가 불리한 상황에서 숨 돌릴 시간을 갖자는 계산이 있었던 듯하다.

당시 모스크바의 러시아 정부와 공산당 중앙의 방침은 조선 독립군들이 통합을 이루고 러시아 영토 내에 머물면서 적당한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지체되는 통합을 힘으로 해결해선 안 된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상하이파가 주도하던 일명 사할린 의용군(대한의용군이라고 함)은 무장 해제 요구를 거부했다. 비사회주의 계열 부대들도 무장 해제 요구를 놓고 분열했다. 상하이파의 무장 해제 거부는 코민테른 극동국과 이르쿠츠크파가 주도해 만든 사실상의 통합 지휘부(고려군정의회)의 지도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결국 고려군정의회 지휘부가 무리한 강제 진압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적어도 수십 명이 죽고 900명 가까운 독립군이 체포됐다.

홍범도는 자유시 입성 때는 군대 통합이 급선무라고 여겨 이르쿠츠크파의 요구에 협조했지만, 양측 모두의 분열주의에 비판적이었던 듯하다. 기록에 따르면, 자유시 참변 이듬해 열린 극동민족대회 때 레닌·트로츠키와 가진 면담에서 홍범도는 양측 모두에게 문제가 있다면서도 이르쿠츠크파의 책임이 더 크다며 체포된 병사들의 선처를 요청했다고 한다.(이후 병사들이 석방됐다고 한다.)

코민테른은 이후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를 모두 해산시키고 1년여 동안 직접 관여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레닌 사후, 1927년 트로츠키마저 공산당에서 쫓겨나면서 코민테른이 정치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파의 흑색선전과 달리 러시아 공산당과 홍범도 양자는 자유시 참변에 책임이 없다. 자유시 참변은 좌파 내 분열주의의 해악을 보여 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