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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레닌주의①: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았는가?

노동자연대는 5월 16일부터 6월 13일까지 ‘21세기 레닌주의’ 연속 공개 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다(자세히 보기). 레닌주의에 대한 오해가 세간에 상식처럼 퍼져 있는 가운데, ‘21세기 레닌주의’에서는 레닌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보고 오늘날에도 적용 가능한지를 토론한다.

이 글은 그 첫 번째 주제인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았는가?’에서 발제자 이수현 씨의 발표와 정리 발언을 녹취한 것이다. 이수현은 《레닌 평전 2~4》(토니 클리프, 책갈피)의 역자이다.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았다는 주장의 대표적 논거들을 하나씩 검토하는 방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레닌이 처음부터 매우 권위주의적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레닌은 권력욕의 화신이었고 전체주의 성향을 가진 독재자 지망생이었다는 것이죠.

둘째는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전신인 볼셰비키 당을 만든 사람이 바로 레닌이었다는 것입니다. 레닌이 만든 볼셰비키 당은 소수 지식인들의 비민주적이고 음모적인 전위 정당이었고, 이 당이 나중에 스탈린주의 공산당으로 이어졌으므로 레닌과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의 원조라는 주장입니다.

셋째는 1917년 10월 혁명은 사실 레닌이 사주한 소수의 음모적 쿠데타였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10월 혁명에서는 노동계급의 대중 행동, 즉 파업이나 바리케이드 전투 같은 대중 투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10월 ‘쿠데타’와 1930년대 스탈린 독재 사이의 연속성을 입증하는 역사적 증거가 있는데, 레닌과 볼셰비키 당이 집권한 직후부터 매우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권위주의적 행동 사례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거론됩니다. ① 레닌은 10월 혁명 직후 사회혁명당이나 멘셰비키 당 같은 다른 사회주의 정당들과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하자는, 이른바 다원주의적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처음부터 일당 독재를 추구했다. ② 1918년 1월 제헌의회를 강제로 해산시켜 버렸다. ③ 레닌과 볼셰비키 정부는 1917년 12월 ‘반혁명과 사보타주에 맞서 투쟁하는 전 러시아 비상위원회’, 이른바 체카를 만들었는데, 이 기구가 나중에 게페우(GPU, 국가정치보안부)로, 그 뒤에는 내무인민위원부로 진화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스탈린 시대의 공포정치를 자행했다. ④ 1918년 이후 레닌과 볼셰비키 정부는 노동자들의 산업 통제를 없애 버렸다. 그들은 이 노동자 통제를 노동자 민주주의 조처라고 그토록 강조했는데, 그것을 스스로 부정해 버린 셈이다. ⑤ 1917년 12월 부르주아 자유민주주의 정당인 입헌민주당(카데츠) 금지를 시작으로, 1919년쯤에는 다른 정당을 모두 불법화하고 일당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 ⑥ 1921년 3월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했고, 더 나아가 볼셰비키 당 내에서도 분파를 금지해서 민주적 토론과 논쟁을 억압했다. 이런 일들은 레닌이 살아 있을 때 일어난 일이다. 즉, 이런 역사적 사실로 볼 때 레닌과 스탈린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10월 혁명으로 수립된 이 체제가 거의 고스란히 1930년대 스탈린의 일당 독재 국가로 이어졌고, 1991년 소련이 붕괴할 때까지 그대로 존속했다는 것입니다. 스탈린 시대에 탄압 수준이 좀 더 강해지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 사이에 근본적이거나 질적인 변화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직접적 논거라기보다는 약간 간접적인 정황 증거입니다. 레닌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나 조직이 권력을 장악한 모든 나라에서 나타난 결과는 본질적으로 똑같았다, 즉 일당 독재의 경찰 국가 체제 수립으로 귀결됐다는 것입니다. 동유럽, 북한, 중국, 쿠바 등이 모두 레닌주의자들의 작품인데, 그 결과는 스탈린의 소련과 똑같았다는 것이죠.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로 이어졌다는 논거는 대체로 이렇게 여섯 가지인데, 가장 마지막 것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반박하기가 가장 쉽기 때문입니다. 쿠바를 제외하면, 그 모든 나라에서 정치적 지도부는 권력 장악 이전부터 이미 철저하게 스탈린주의화한 정치 조직들이었습니다. 쿠바는 아예 스탈린주의 조직도 아니었죠.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그 나라들은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은 사례라기보다는 스탈린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은 사례입니다. 쿠바는 스탈린주의도 아닌 것이 스탈린주의로 귀결됐고요.

러시아 혁명 당시 연설하는 레닌

레닌은 처음부터 독재자 지망생이었나?

그럼 다시 돌아가 첫째 논거인 레닌이 권력욕의 화신이었다는 주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아일랜드 사회주의자 존 몰리뉴는 레닌을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도 설득력이 없고 비역사적이라고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레닌이 그토록 권력 지향형의 인물이었다면, 사회주의 정치 활동에 투신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레닌은 17살 때 자기 형이 차르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권력을 추구했다면, 투옥과 시베리아 유배 등을 각오해야 하는 사회주의 정치 활동에 투신하기보다는 오히려 차르 체제에 편입·편승하는 게 훨씬 더 현실적인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맥락은 다르지만 우리는 권력욕의 화신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다카기 마사오, 박정희입니다. 박정희는 일제 강점기에 출세하려고 일본군 소속 만주군관학교를 들어가서 우등으로 졸업했습니다. 졸업식에서 박정희는 “대동아 공영권을 확립하는 성전에서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 하고 맹세했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남로당에 가입해 군사부장까지 했습니다.(박정희의 형 박상희도 1946년 대구 민중항쟁 때 경찰에게 사살당했죠.) 그러나 박정희는 1948년 여수·순천 항쟁 때 군대 내 좌익의 명단을 넘겨주고 저는 살아서, 나중에 5·16쿠데타로 권력을 잡았습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권력욕의 화신다운 모습입니다.

그리고 만약 레닌이 권력 지향형 인물이었다면, 그는 혁명 이후에 볼셰비키 당 지도부 내에서 제거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볼셰비키 당은 소수 음모가들의 비민주적 정당이었나?

둘째 논거를 살펴보겠습니다. 볼셰비키 당은 비민주적인 소수 지식인 음모가들만의 정당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레닌주의나 러시아 혁명을 지지하지 않는 학자들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데이비드 레인이나 레너드 샤피로 같은 보수적 학자들조차 볼셰비키 당이 노동계급 속에 뿌리내린 대중 정당이었다고 인정합니다. 예를 들어, 러시아 혁명 당시 러시아의 산업 노동계급은 300만 명 정도였는데, 1917년 2월 혁명 직전에 볼셰비키 당원은 2만 명 이상이었습니다. 300만 명 중 2만 명이라고 하니 얼마 안 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노동계급이 1700만 명이라는 한국에서라면 볼셰비키 당은 당원이 수십만 명에 이르는 정당이었을 겁니다. 그만큼 볼셰비키 당은 노동계급 속에 뿌리내린 대중 정당이었습니다.

당내 민주주의 문제를 보면, 볼셰비키 당은 레닌이 말 한 마디로 좌지우지한 정당이 아니었습니다. 레닌이 볼셰비키 당 내에서 소수파였던 상황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1905년 혁명 직후 차르는 ‘두마’라고 하는 신분제 의회를 설치했습니다. 이 신분제 의회 선거에 다른 사회주의 정당들은 참가했습니다. 그러나 볼셰비키 당 내 다수파는 혁명적 정신이 과했던 나머지, 왜 그따위 선거에 참가하느냐고 반대했습니다. 오직 레닌만이 두마 선거에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표결에서 졌습니다.

1917년 4월 레닌이 그 유명한 ‘4월 테제’를 발표했을 때, 볼셰비키 당 선임 당원들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레닌은 거의 혼자였고, 나중에 기층 평당원들과 당 외부의 노동계급·수병들의 지지 덕분에 볼셰비키 당의 견해를 돌려 세울 수 있었습니다.

1918년 초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을 체결할 때도 레닌은 소수파였습니다. 레닌은 처음부터 이 조약을 체결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부하린을 비롯해 당내 다수는 혁명가들답게 혁명 전쟁을 해야지 무슨 강화조약이냐며 반대했습니다. 레닌이 이를 극복하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볼셰비키 당이 처음부터 비민주적이고 획일적인 정당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둘째 논거도 역사적 검증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1917년 10월 혁명은 소수의 쿠데타였나?

셋째 논거, 즉 10월 혁명 때 파업도 없었고 바리케이드 전투도 없었다는 것은 일단 사실입니다. 적어도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농반진반으로 무장 봉기 과정에서 죽은 투사들의 수보다 나중에 세르게이 에이젠시테인이 〈10월〉이라는 영화를 찍을 때 사고로 죽은 사람의 수가 더 많았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10월 혁명은 거의 무혈 봉기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러시아 혁명사》라는 불후의 명작을 썼고 10월 봉기를 조직한 트로츠키가 이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바로 10월 25일 무장 봉기 전에 이미 10분의 9 정도는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무장 봉기 직전 러시아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 수병들, 대중의 압도 다수는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상태였습니다. 케렌스키가 이끈 임시정부는 볼셰비키가 다수파가 된 소비에트를 제거하기 위해서, 소비에트의 군사적 기반인 페트로그라드 수비대를 전방으로 보내는 이동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산하의 군사혁명위원회는 그 명령을 무효화시켰습니다. 군사혁명위원회가 임시정부의 명령을 무효화한 순간에 이미 무장 봉기가 시작된 셈이었다고 트로츠키는 말했습니다. 임시정부의 명령을 듣는 무장력이 없어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페트로그라드 수비대는 케렌스키의 명령을 따르는 순간 자기들은 전쟁터로 가서 곧 죽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페트로그라드 수비대는 정말로 죽느냐 사느냐는 문제를 두고 임시정부가 아니라 노동자 소비에트의 명령을 따르기로 작정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임시정부에 등을 돌렸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군대의 압도 다수가 볼셰비키 편으로 넘어가 버렸기 때문에, 볼셰비키가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총을 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어디 어디 가서 점령하시오 하면 거의 점령이 되는 그런 분위기였던 거죠. 그래서 무장 봉기 과정에서 굳이 유혈 충돌이 벌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달랐습니다. 페트로그라드에 견줘 모스크바는 상대적으로 노동계급이 작고, 조직력이 약하고, 의식도 후진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볼셰비키 지도부가 분열해 있던 것도 무장 봉기를 조직하는 데서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물론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지도부도 분열해 있었지만 레닌이나 트로츠키 같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무장 봉기 조직이 훨씬 더 수월했습니다.) 그래서 모스크바에서는 10월 24~25일에 가서야 군사혁명위원회가 조직됐고, 무장 봉기 과정에서 약 일주일간 시가전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사상자가 많았습니다. 10월 혁명이 무혈 혁명이었다는 것도 자세히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10월 혁명이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은 볼셰비키 지지자들만의 주장도 아닙니다. 볼셰비키에 적대적이었던 멘셰비키 역사가 수하노프는 10월 무장 봉기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와 병사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레닌의 정적이었던 마르토프도 해외에 있던 멘셰비키 지도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진 것은 승리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봉기”라고 했습니다.

왜 레닌과 볼셰비키 정부는 초기에 권위주의적 행동을 했는가?

넷째 논거는 좀 까다롭습니다. 왜냐하면 그 근거들이 실제로 역사적 사실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레닌은 사회주의 연립정부를 구성하지 않았습니다. 제헌의회를 강제로 해산시켰습니다. 볼셰비키 정부가 만든 체카가 적색 테러를 자행했습니다. 레닌과 볼셰비키 정부는 노동자 통제를 스스로 폐기했습니다. 다른 정당들을 불법화하고 일당 독재를 확립했습니다. 1921년 3월에는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을 진압했고, 당내 분파도 금지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레닌과 볼셰비키 정부가 왜 그렇게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했을까 하는 물음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가장 흔하고 대중적인 ‘공인’된 설명은 앞에서 말한 첫째 논거와 비슷합니다. 레닌의 권위주의적 개성 때문에 그런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레닌이 진짜로 독재자의 야욕을 드러냈다면, 주위 사람들이 그를 충분히 제지할 수 있었고 심지어 제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혁명 초기에 레닌의 말이 무조건 관철되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 레닌의 주장대로 실행되지 않은 경우도 많았고 레닌이 틀린 말도 많이 했습니다. 예를 들어, 레닌은 10월 무장 봉기를 페트로그라드가 아니라 모스크바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레닌 말대로 했다면 피를 더 많이 흘렸을 가능성이 큽니다.(물론 그가 당시 지하에 숨어 있을 때라 실제 상황을 잘 모르기는 했습니다.) 트로츠키는 레닌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봉기를 페트로그라드에서 시작했습니다. 또, 트로츠키는 무장 봉기를 볼셰비키 당이 조직해야 한다는 레닌의 주장도 무시하고 소비에트의 합법성과 권위로 무장 봉기를 더 깔끔하게 조직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 체결 때도 레닌은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는 데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결국 그의 주장이 관철됐는데, 그것은 레닌의 권위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조약 체결을 거부했더니 독일군이 러시아 영토로 쭉 밀고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강화조약을 안 맺을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리고 내전 때 군사 전술을 둘러싸고도 레닌은 트로츠키 등 볼셰비키 지도자들과 견해가 달랐습니다. 당시 내전에서는 네 가지 전선이 있습니다. 동부 전선, 남부 전선, 서부 전선, 서북부 전선이었습니다. 각 전선의 전술을 여기서 자세히 다룰 수는 없습니다.(이에 대해서는 토니 클리프가 《레닌 평전》 제3권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고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각 전선의 전술에서 레닌은 하나 맞고 세 개 틀렸습니다. 반대로 트로츠키는 하나 틀리고 세 개 맞았습니다.

레닌과 볼셰비키가 점차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하게 된 이유를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레닌의 성격보다는 볼셰비키 당의 이데올로기 자체가 문제였다는 주장입니다. 이 또한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볼셰비키의 러시아 혁명 전략은 처음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수립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러시아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다가오는 혁명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두고 논쟁이 있었습니다. 레닌과 볼셰비키의 처음 입장은 ‘프롤레타리아가 헤게모니를 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혁명이 일어나 성공하더라도 그 혁명은 곧바로 사회주의로 나아가지 않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지 않겠지만 노동계급이 주도력을 발휘하는 혁명일 것이라는 입장이었습니다. 약간 모호한 구석이 있는 주장인데, 어쨌든 볼셰비키의 이데올로기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의 즉각적 권력 장악을 처음부터 예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볼셰비키의 이데올로기가 원래부터 권위주의를 지향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또,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본질에 관한 레닌이나 볼셰비키의 개념에도 일당 독재는 없었습니다. 레닌 자신의 글이나 말을 보면, 레닌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의회의 다수당이 정부를 구성하듯이 소비에트 국가에서도 국가 권력은 소비에트 대회에 있고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이루는 정당이 정부를 구성할 것이라고 봤습니다. 즉,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소비에트 선거를 통해 다수당이 바뀌면 정부가 바뀔 것이라는 게 레닌의 주장이었습니다.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은 근거도 바로 1917년 10월에 열린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볼셰비키 당이 다수당이었다는 사실이라고 레닌은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레닌의 개성 탓도 아니고 볼셰비키 당의 이데올로기 탓도 아니라면, 왜 레닌과 볼셰비키는 혁명 초기에 권위주의적인 행동을 했을까요? 제가 보기에 그것은 당시 상황의 압력 때문이었습니다. 불가피했다는 거죠. 레닌과 볼셰비키가 그런 행동을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추구했다기보다는 등 떠밀리는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례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① 사회주의 연립정부 구성 거부. 앞에서 말했듯이, 레닌은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소비에트 내 사회주의 정당들이 함께 정부를 구성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앞에서 말한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도중에 다른 사회주의 정당들 ― 사회혁명당 우파와 멘셰비키 등 ― 이 10월 무장 봉기를 반대하면서 스스로 대회장을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물론 트로츠키의 말이 약간 심했던 것처럼 들리기는 합니다. ‘당신들이 있어야 할 곳은 역사의 쓰레기통이니까 쓰레기통으로 가라’는 식으로 말했죠. 그래서 사회혁명당 우파와 멘셰비키가 역사의 쓰레기통을 찾아서 나가 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이 무장 봉기를 반대하며 소비에트 대회에서 뛰쳐나가 버렸어요. 그러니까, 레닌이 사회주의 연립정부를 구성하고자 했어도 같이할 정당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사회혁명당 좌파는 무장 봉기를 지지하고 같이했기 때문에, 그들과는 연립정부를 구성할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시간이 좀 지난 뒤에 볼셰비키 당은 사회혁명당 좌파와 함께 정부를 구성했습니다. 그러다가 바로 몇 달 뒤인 1918년 3월 사회혁명당 좌파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 체결에 반대해서 뛰쳐나갔습니다. 그들은 뛰쳐나가자마자 자신들의 주특기인 테러와 암살로 돌아가서, 러시아 주재 독일 대사인 미르바흐 백작을 암살했고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암살하려 들었습니다. 즉, 사회혁명당 좌파조차 볼셰비키가 그냥 놔둘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린 것입니다. 사회주의 연립정부 구성 실패는 레닌과 볼셰비키의 선택이었다기보다는 상대방들이 거부한 요인이 컸습니다. 물론 앞에서 말했듯이, 소비에트 민주주의에 대한 레닌의 견해 — 소비에트 대회의 다수당이 정부를 구성한다 — 도 분명히 있었지만요.

또 한 가지 기억할 사실이 있습니다. 레닌이 양보와 타협도 했다는 것입니다. 볼셰비키 내 우파들이 사회주의 연립정부 구성만이 살 길이라고 계속 주장하면서 레닌과 트로츠키를 압박했고, 레닌은 ‘그래, 그럼 당신들 하자는 대로 한 번 해 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협상단이 사회혁명당 우파와 멘셰비키를 만났는데, 그들이 내놓은 조건이 어처구니없었습니다. 정부에서 레닌과 트로츠키를 빼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볼셰비키 우파조차 그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서 협상이 결렬됐습니다.

② 제헌의회 해산. 1918년 1월 레닌과 볼셰비키는 제헌의회를 해산시켰습니다. 여기에는 이론적 문제가 있어요. 레닌 자신이 말했듯이, 소비에트가 제헌의회보다 더 고차원적인 민주주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동계급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지하는 혁명가라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을 시기상조의 역사적 오류로 봤던 멘셰비키나 농민 사회주의를 표방한 사회혁명당은 소비에트와 제헌의회의 차이를 보지 못하고 계속 제헌의회를 주장했습니다만, 노동계급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제헌의회라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당연히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더 고차원적인 민주주의 형태입니다.

또, 제헌의회가 10월 무장 봉기로 성립한 체제에 반대하는 반혁명 세력이 집결하는 일종의 코드명 같은 것이 될 수 있었고, 그래서 계속 놔둘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도 있습니다. 실제로 1918년 1월에 제헌의회가 해산되고 나서 5월 이후 내전이 본격화했을 때,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바로 제헌의회가 반혁명 세력의 깃발이 됐습니다. 그러므로 레닌이 제헌의회를 위와 같이 평가하고 해산한 것은 정치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옳았습니다.

③ 체카의 적색 테러. 체카가 적색 테러를 자행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를 따지고 보면, 백색 테러와 볼셰비키의 고립 때문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적색 테러 같은 억압 조처를 시행하지 않을 때 무슨 일을 당할 수 있는지를 바로 옆 나라인 핀란드에서 목격했습니다. 1918년 핀란드에서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노동자들이 봉기를 했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8000명 이상이 처형당하고 8만 명 이상이 투옥당했는데, 그중 1만여 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볼셰비키 처지에서는 ‘우리가 혁명 이후 제대로 승리하지 못하면 저 꼴 나겠다’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한 것이죠.

남쪽에서는 우크라이나 사례가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유대인이 많은 지역이었는데, 1919년에 백색 테러로 유대인 15만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당시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13명 중 한 명 꼴로 살해당한 것인데, 이것은 나치 독일이 자행한 1930년대 홀로코스트의 원조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또, 볼셰비키 지도자인 볼로다르스키나 우리츠키 같은 사람들이 암살당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레닌도 1918년 9월에 암살 미수로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당시 레닌은 총알을 두어 발 맞아서 혼수상태에 빠졌고, 며칠 동안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습니다.

역사가 E H 카는 1919년 가을 즈음 볼세비키 정부의 운명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당시 볼셰비키가 통치하는 지역이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주변으로, 어떤 사람의 표현으로는 옛 모스크바 대공국 시절의 영토에 불과한 지역으로 좁아졌습니다. 그때는 반혁명 세력들이 기고만장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절체절명의 상황, 생사존망의 갈림길에서 볼셰비키는 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싸움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무자비하고 가혹하고 인정사정 없는 행동들을 하게 됐습니다.

④ 다른 정당 불법화와 일당 독재 확립. 입헌민주당·사회혁명당·멘셰비키 같은 다른 정당들을 탄압한 것도, 그 정당들이 정도 차이는 있지만 내전에서 백군을 지지하거나 반(反)소비에트 무장 행동에 가담했기 때문입니다. 내전에서는 그런 적대 행위를 하는 세력들을 불법화하고 탄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⑤ 노동자 통제 폐지. 내전으로 경제가 붕괴하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원심력이 강해지면서, 노동자 통제 기구인 공장위원회나 노동자위원회들이 협소하게 자기 공장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레닌이나 볼셰비키의 원래 구상과 달리, 이 기구들이 노동자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기 힘든 상황이 됐습니다. 일단 내전에서 이겨야 노동자 통제든 노동자 민주주의든 실현될 수 있을 텐데, 공장에서 노동자위원회가 전쟁 승리 노력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방해가 되는 쪽으로 기능하는 것을 계속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죠. 그래서 레닌과 볼셰비키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노동자 통제 조처들을 하나씩 폐기했습니다.

이 상황은 당시 노동인민위원이었고 나중에 1921년에는 노동자반대파로 활동하는 실랴프니코프가 1918년 3월에 노동자 통제가 현장에서 어떤 문제를 낳고 있는지를 평가한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공장 노동자들이 생산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모든 작업에 말 그대로 제동을 걸고 있다.” 노동자 통제가 생산의 걸림돌 구실을 하면서 내전 승리를 어렵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볼셰비키로서는 그것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생산을 지속해서 내전에서 이기려고 했다는 겁니다.

⑥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 진압. 지금까지 설명한 조처들은 내전 와중이라는 상황의 압력 때문이었다고 인정하더라도, 내전이 끝난 다음의 일들도 상황의 압력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바로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 진압과 볼셰비키 당내 분파 금지 조처입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전이 끝난 다음에도 볼셰비키 정부에 가해지는 압력이 완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엄혹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러시아 인구의 압도 다수인 농민 처지에서는 더는 강제 곡물 징발을 당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내전이 한창일 때는 농민들이 불만이 있더라도 볼셰비키 정부와 적군(赤軍)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농민들에게 중요하고 필요했던 것은 토지였습니다. 러시아 10월 혁명이 지주·귀족을 몰아낸 덕분에 농민들이 땅뙈기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 만약에 반혁명이 승리하면 옛 지주·귀족들이 돌아와서 10월 혁명으로 얻은 조그만 땅뙈기나마 다시 빼앗길 게 뻔했습니다. 그래서 농민들은 내전 와중에는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볼셰비키 정부와 적군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죠. 그래서 곡물을 징발당하더라도 지주·귀족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쨌든 다행이라는 생각에서 볼셰비키 정부를 지지해 줬는데, 내전이 끝난 뒤로는 지주·귀족이 돌아올 가능성이 사라졌고, 그래서 이제 더는 곡물을 빼앗기지 않아도 되겠다고 농민들은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전이 끝날 즈음부터는 강제 곡물 징발에 반대하는 농민들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나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체카의 보고서를 보면, 1921년 2월에만 118건의 농민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다음 달인 3월에 크론시타트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때의 크론시타트 수병들은 1917년 10월 혁명에서 최선봉에 선 수병들이 아니었습니다. 1917년 10월의 크론시타트 수병들은 내전 과정에서 전선에 나가 싸우다가 많이 희생됐습니다. 1921년 즈음에 크론시타트에 들어온 수병들은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온 농민들의 자식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자기 고향의 부모 형제들이 일으키는 농민 반란의 영향을 받아서 1921년 3월에 들고 일어선 것이죠. 그러니까, 볼셰비키 정부는 내전 때는 반혁명 지주·귀족과 싸웠다면, 이제는 혁명의 성공과 정권 유지의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는 ‘노농 동맹’ 자체에 균열이 일어나는 위험한 상황에 직면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볼셰비키로서는 이런 상황의 압력이 훨씬 더 헤쳐 나가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⑦ 당내 분파 금지. 농민 반란은 볼셰비키 당 내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다른 정당이 다 금지되고 사회의 정치적 창구가 볼셰비키로 단일화되다 보니까 농민 반란의 압력이 고스란히 볼셰비키 당 내로 반영됐고, 그래서 1921년 3월 10차 당대회가 열리기 전 몇 개월 동안 볼셰비키 당 내에서 엄청나게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논쟁의 핵심 쟁점이 노동조합과 노동자 국가의 관계가 어때야 하느냐는 것이어서 ‘노동조합 논쟁’이라고도 불립니다. 크게 세 파로 나뉘어서 논쟁이 벌어졌는데, 자세한 내용은 《레닌 평전》 제3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레닌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볼셰비키 당의 분열이 지속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이 쪼개지면 농민 반란을 막지 못할 것이고, 결국 반혁명이 승리하는 길을 열어 주게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느꼈고, 그래서 두 가지 조처를 취합니다.

하나는 농민들에게 양보하는 것이었습니다. 크론시타트 수병들의 반란이 진압되긴 했지만, 문제의 뿌리가 농민 반란이었고 농민들의 가장 큰 불만이 강제 곡물 징발이었으므로, 곡물 징발을 중단하고 신경제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볼셰비키 당이 더 분열하지 않도록 당내 분파를 금지한 것입니다. 이 역시 상황의 압력에 밀린 일이었던 것이죠. 물론 나중에 당내 분파 금지를 원칙으로까지 격상시키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는 레닌의 의도도 아니었고 레닌주의와도 상관 없는 것입니다.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단절성

지금까지 저는 레닌과 볼셰비키 정부가 혁명 초기에 한 권위주의적 행동이 상황의 압력에 따른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옹호론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가피성 주장만으로는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주장을 결정적으로 논박할 수 없습니다. 스탈린주의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는 제대로 된 분석이 있어야 합니다.

러시아에서 스탈린주의 관료가 성장하게 된 것은 객관적인 두 가지 사회적 요인이 상호작용한 결과입니다. 하나는 러시아 노동계급이 약화하고 탈진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혁명이 국제적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고립되는 바람에 러시아 내부에서 시작된 변질 과정을 가속시킨 것입니다.

안 그래도 경제적 후진국이었던 러시아에서 세계대전과 내전을 거치며 경제가 붕괴하자 혁명의 주역이었던 노동계급이 약해지고 탈진한 끝에 사실상 해체됐습니다. 그 공백을 메우며 성장한 것이 스탈린주의 관료 집단입니다.

이런 관료적 퇴보 과정을 저지할 유일한 길은 다른 나라에서 혁명이 승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혁명이 일어났어요. 독일 혁명이 일어났고, 헝가리 혁명이 일어났고, 이탈리아에서는 붉은 2년이 있었고, 아일랜드 봉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곳에서 혁명이 패배했습니다. 그러자 소련 내에서 스탈린을 필두로 한 관료들은 국제 혁명의 전망을 포기하고 일국 사회주의론을 주장하게 됐고, 이것이 러시아 혁명의 변질을 더 가속시켰습니다.

스탈린은 당내 권력 투쟁 과정에서 처음에는 당내 좌파인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를 제압했고, 나중에는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도 가세한 통합반대파를 제압했으며, 마침내 1928년에는 부하린, 리코프, 톰스키 등 당내 우파도 제압했습니다. 스탈린은 이렇게 좌우파를 모두 제압하며 자신의 독재적 권력을 구축하고 나서 강제 농업 집산화와 급속한 공업화로 나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위로부터 혁명’, ‘제3의 혁명’이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러시아 사회의 질적 변화, 근본적 변화, 체제 변화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1920년대 말 이후 소련 사회의 성격에 대해서는 토니 클리프의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책갈피, 2011)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스탈린의 독재 권력 구축, 급속한 공업화, 강제 농업 집산화, 이 세 가지가 반혁명 과정인 이유는 기본적인 사회경제관계가, 마르크스주의 용어로 말하면 사회적 생산관계가 완전히 변모했음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관료가 새 지배계급으로 탈바꿈했고,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위한(즉, 소비를 위한) 생산에 바탕을 둔 경제가 서방과의 경쟁적 자본 축적을 위한 경제로 바뀐 것이죠. 경쟁적 자본 축적은 자본주의 체제의 고유한 동역학인데, 1928년 이후의 소련 경제는 서방과의 경쟁적 자본 축적이 추진력 구실을 하는 경제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스탈린의 독재 수립과 제1차 5개년 계획의 추진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를 부활시키는 반혁명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위로부터 혁명’이라고 부르든 ‘제3의 혁명’이라고 부르든 이른바 스탈린 ‘혁명’은 1917년의 노동자 혁명이 최종 패배하고 국가자본주의 형태로 자본주의가 부활하는 경제적·사회적 변화 과정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탈린주의는 레닌주의의 연속이 아니라 반혁명적 부정(否定)인 것입니다.


정리 발언

제가 예전에 거리에서 가판을 하고 있었는데 지나가시던 할아버지 두 분이 “아니 요즘에도 마르크스, 레닌 이런 책을 파나? 마르크스, 레닌이 죽은 지 언제인데” 하고 말했습니다. 제가 웃으면서 “공자는 죽은 지 2500년이 지났는데도 마르크스, 레닌보다 책이 훨씬 더 많이 나오고 저도 가끔 봅니다” 했습니다. 그랬더니 ‘침묵은 금이다’ 하는 격언을 실천하시길래 저도 더 말하지 않았습니다.

몇 년 더 있으면 레닌이 죽은 지 100년이 됩니다. 그때 이후로 세상이 많이 바뀐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또 바뀌지 않은 것도 있죠. 일단 이 사실만으로도 레닌을 볼 이유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 중요하게는, 존 몰리뉴가 얼마 전에 《오늘날을 위한 레닌》(Lenin for Today)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한 말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레닌을 다시 말하는 이유는 사실 오늘날의 혁명 때문이다. 지금도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 폭력, 착취, 차별 등에 시달리며 살아 가고,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 때문에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이런 사회에 사는 우리에게는 혁명이 필요한데, 그 혁명은 노동계급 혁명일 것이다. 그 혁명이 노동계급 혁명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현재 사회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노동계급 혁명이 성공한 사례는 러시아 혁명뿐이다. 바로 이 혁명을 승리로 이끈 레닌에게서 우리는 배울 게 많을 것이므로, 레닌주의는 여전히 의미가 있고 적절하다.’

저는 몰리뉴의 이 말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한 분도 지적했지만, 이 토론장 밖에 나가면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았다는 게 상식입니다. 정치적 상식이죠. 그것이 이 사회의 표준적 견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바람직한 자세는 ‘몰상식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식보다는 양식이 더 중요하다고 그람시가 말했으므로 우리는 자신감을 갖고 대처할 수 있습니다.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았다는 ‘상식’을 비판하는 핵심 이유는, 오늘날 혁명이 일어나도 또 그렇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나 두려움과 관련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몰리뉴가 위안을 주는 말을 했는데, 그것을 소개하고 마칠까 합니다.

첫째, 러시아 혁명 이후 생산력이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에서도 가장 낙후하고 후진적인 나라였고, 전체 인구 1억 6000만 명 중 산업 노동계급은 300만 명밖에 안 되는 나라였습니다. 그만큼 노동계급이 불리한 상황에서 혁명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레닌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러시아는 혁명을 일으키고 성공하기는 상대적으로 쉬워도 혁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는 힘들다. 서유럽은 혁명이 성공하기는 힘들 수 있어도 유지하기는 더 쉬울 것이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날 세계적 생산력 발전 수준은 훨씬 유리합니다.

둘째, 몰리뉴는 이게 더 중요하다고 했는데요, 국제 노동계급이 당시보다 규모도 훨씬 크고 훨씬 강력하고 상대적으로 더 잘 조직돼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데올로기적 혼란 면에서는 약점도 있겠지만, 객관적 조건은 더 유리합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생산의 국제적 통합이 100여 년 전보다 훨씬 더 발전돼 있어서, 혁명의 국제적 고립 위험이 러시아 혁명 때보다 훨씬 덜하고, 그래서 오늘날 한 나라에서 노동자 혁명이 일어난다면 국제적 확산과 전파의 가능성은 더 크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 말을 위안 삼고 여러분과 함께 투쟁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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