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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역사교과서 최종본:
제국주의를 변호하고 노동자·민중의 저항을 왜곡·축소하다

1월 31일 교육부가 국정 역사교과서 최종본(이하 최종본)을 공개하면서 ‘참여형 교과서 개발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최종본은 지난해 11월 공개된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이하 검토본)과 마찬가지로 기초적인 사실 오류가 수두룩한 데다 무엇보다 문제가 된 핵심 주장인 ‘대한민국 수립’, ‘박정희 미화’ 등의 입장을 그대로 고수했다.(검토본 비판은 ‘국정 교과서의 역사 왜곡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노동자 연대〉 189호를 보시오.)

지배자들의 '역사 전쟁'은 현재의 계급 전쟁을 위한 포석.

최종본과 함께 공개된 국정 역사교과서 편찬심의위원들은 국정 역사교과서 집필자들과 마찬가지로 뉴라이트 인사들이 핵심을 차지했다.

그중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이기동은 제주 4·3항쟁을 ‘공산폭도’에 의한 폭동이라고 주장해 문제를 일으켰던 인사다. 동북아재단 이사장 김호섭은 뉴라이트의 선봉대 격인 한국현대사학회 이사였고 교학사 교과서 옹호에 앞장섰던 자다. 교과서분석연구회 대표 김동순은 기존 검정 교과서가 ‘좌편향’됐다며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결국 최종본은 ‘뉴라이트가 집필하고 뉴라이트가 심의한’ 역사교과서라는 비판을 들을 만하다.

제국주의 옹호

교육부는 검토본에 대한 비판 의견을 반영해 최종본을 만들었다고 강변한다. ‘제주 4·3사건’ 서술의 경우 상당한 수정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종본도 제주 4·3항쟁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이 저지른 학살과 만행을 제대로 다루지 않을 뿐 아니라, 제주 4·3항쟁을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로 축소·왜곡한다.

그러나 제주 4·3항쟁은 해방 후 한반도 남쪽에 광범하게 존재했던 진정한 해방과 독립에 대한 대중적 염원의 연장선으로 봐야 한다.

4·3항쟁 1년여 전에 제주도에서는 미군정에 대한 광범한 분노에서 비롯한 노동자 파업이 있었다. 이 파업에는 제주 군정청 한국인 관리 60~75퍼센트와 1백56개 기관·단체가 참가했다. 금융·교통·제조업·교육·식량배급 등이 마비됐다. 미군 방첩대(CIC)는 ‘제주도의 총파업이 남한 전역의 파업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는 시금석일 수도 있다’고 지적하며 강경 진압을 주문했다.

1947년 4월 미군정은 ‘극우주의자’ 유해진을 제주도지사로 임명했다. 미군정의 후원 아래 유해진은 우익 단체인 서북청년단을 동원해 ‘광범한 테러 행위’를 벌였다.

이런 탄압에 대한 누적된 분노가 4·3항쟁의 배경이었다. 항쟁은 혹독한 탄압으로 고립돼 분쇄당했다. 공식적으로 3만 명가량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당시 제주도지사는 미국 정보기관에 6만 명이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제주도민 대여섯 명 중 한 명 꼴로 죽었고 절반 이상의 마을이 파괴됐다.

해방 후 일어난 공장 자주관리 운동,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을 진압하며 대소 ‘반공 전초기지’를 세우고자 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해가 제주도의 비극을 가져왔다.

제국주의가 일으킨 문제는 단지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제주해군기지와 사드 배치 문제가 그렇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그렇다. 최종본은 ‘위안부’ 문제를 단지 과거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축소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한일 위안부 합의’가 동북아 지역의 패권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미국 주도의 한·미·일 삼각동맹을 위해 돈 몇 푼으로 ‘위안부’ 문제를 덮어 버리려는 의도로 추진된 것을 보더라도 ‘위안부’ 문제는 현재의 문제이기도 하다.

최종본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적 도구라 할 만하다.

반(反) 노동자적 관점

최종본의 ‘박정희 찬양’도 여전하다. 최종본은 새마을운동이 ‘관 주도’로 진행돼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첨가했을 뿐, 여전히 새마을운동을 이 나라(특히 농촌)를 ‘잘살게 만든 개혁운동’으로 추켜세운다.

하지만 새마을운동은 급속한 자본축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는 농촌의 불만을 억눌러 도시의 반정부 분위기가 농촌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농촌의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근면, 자조, 협동’ 등 노동력 동원을 강조하는 구호가 강조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농민 쥐어짜기는 도시에 의한 농업 지배라는 자본주의적 발전 논리에 따른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도시의 계급들이 단순히 똑같이 득을 본 것은 아니었다. 농촌의 새마을운동은 도시의 ‘공장새마을운동’으로 이어져 노동자들에게 장시간 노동과 내핍을 강요했다.

이런 억압과 통제가 노동자들의 저항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70년대 끈질기게 벌어진 노동자들의 투쟁은 1979~80년에 경제·정치 위기를 배경으로 급속하게 늘어났다. 1979년 부마항쟁 직후 경기도 지역의 공장들 70퍼센트에서 파업이 벌어졌다. 1980년 봄 4개월 동안에만 그 전년도 내내 벌어진 파업보다 8배 많은 파업이 벌어졌다.

이렇게 급속히 증가하는 노동자 운동을 제압하고 다시 착취와 억압의 박정희 체제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 전두환과 신군부였다.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이라 할 만한 전두환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억눌러 위기에 빠진 남한 자본주의를 지켜 내고자 했다. 이것을 막아선 선두에 광주 민중이 있었다.

따라서 최종본이 5·18 광주 민중항쟁에 대해 전남대생의 시위를 과잉 진압하면서 벌어진 일쯤으로 묘사하고 도청에서의 유혈 진압도 협상 실패로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인 듯 설명하는 것은 완전한 왜곡이다.

극심한 폭압에도 전두환은 노동계급의 저항을 잠시만 막을 수 있었을 뿐이다. 광주 민중항쟁 진압 후 잠시 가라앉았지만 노동계급은 19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현재 한국 지배자들은 전두환이 정권 초에 맞서야 했던 노동계급과는 질적으로 달라진 상대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국정 역사교과서 연구학교 정책 폐기하라

교육부는 2018년에 국정교과서와 검정교과서를 혼용해 사용하되 올해는 연구학교를 지정해 국정 역사교과서를 시범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교육부는 연구학교 지정을 거부하는 교육청을 제재하겠다고 협박하고 연구학교 신청 기간을 늘렸다. 그러나 지금까지 연구학교를 신청한 학교는 없다. 박근혜 퇴진 운동이 여전히 강력하고 국정 역사교과서에 대한 반감이 크기 때문이다.

교육부와 우파들은 연구학교를 반대하는 교육감과 전교조가 학교의 ‘선택권’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들의 눈에는 거의 0퍼센트의 채택률로 사장된 교학사 교과서의 악몽이 아른거릴 것이다.

대표적인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 운동 단체인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이하 저지넷)는 연구학교 지정을 반대하는 한편, 국회 교문위를 통과한 ‘국정교과서금지법’을 조속히 법사위와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퇴진 운동의 힘

‘국정교과서금지법’은 시급히 통과돼야 마땅하다. 하지만 법사위원장이 국정 역사교과서를 찬성하는 바른정당 권성동이고 소위원장이 박근혜 탄핵 반대 선봉에 있는 새누리당 김진태인 것을 감안하면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기회주의적 행보를 예삿일로 하는 민주당이 범여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직권상정과 본회의 통과를 추진할지도 의심스럽다.

사실 교육부가 올해 국정 역사교과서 전면 시행 입장에서 물러선 것은 거대한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의 힘 때문이었다. 대중 운동의 힘이 고집불통으로 보이던 교육부에 강한 타격을 가했다.

교육부가 그토록 옳다고 우기던 ‘대한민국 수립’ 주장에서 후퇴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도 인정한다고 해서 우파들에게서도 욕을 먹는다. 지배자들의 공통 의지가 반영된 국정 역사교과서를 양보할 수 없지만 대중 운동의 압력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교육부의 처지가 반영된 것이다.

얼마 전 저지넷 한상권 상임대표는 “국정 교과서가 무너지려면 황교안 체제도 같이 무너져야 한다”고 옳게 지적했다. 박근혜 없는 박근혜 정부의 수장인 황교안과 그가 추진하는 적폐들을 끝장낼 수 있는 힘은 박근혜를 궁지에 몰아넣은 대중 운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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