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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 회계 공시:
노동조합의 집단행동과 투쟁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시도

고용노동부가 주춤했던 노동개악에 다시 시동을 걸고 있다. 경기 전망이 어두워지면서 위기감이 커진 듯하다. 광범한 반발에 부딪혀 숨 고르기를 했던 “주69시간 개악안”에 대해 11월에 심층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추진할 개악 내용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10월부터는 1000명 이상의 노동조합이 회계 공시를 하지 않으면 그동안 조합원들에게 환급했던 1년간 납부했던 조합비 일부 세액공제를 하지 않겠다고 한다.

상급단체-산별노조-산하조직으로 편제된 경우 해당 조직들은 모두 회계 공시를 해야 환급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민주노총 소속 금속노조 소속 A지회(조합원 1000명 이상)의 경우에 상급단체인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그리고 A지회 모두 회계 공시를 해야 세액공제가 가능하다. A지회가 공시하더라도 상급단체나 산별노조가 공시하지 않으면 세액공제는 불가하다.(A지회가 공시 의무가 없는 조합원 1000명 미만이라도 마찬가지다.)

고용노동부가 제시한 회계 공시 사항에는 노동조합의 재무 상태뿐 아니라 1년 동안의 수입과 지출 사항을 포함한다. 정부가 노동조합의 재정 사용을 들여다보고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조합원의 알 권리?

고용노동부는 “조합원의 알 권리”를 근거로 노동조합 회계 공시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미 현행 노조법은 노동조합의 정기 회계 결산과 그 공표, 조합원의 요구가 있을 때 노동조합이 그 내용을 열람하게 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도 고용노동부가 조합원 권리를 이유로 들어 회계 공시를 시행하려 하는 이유가 뭘까?

노조에 대한 조합원의 권리 강조 논리는 과거 미국이나 영국 정부가 노동조합을 공격할 때 써먹었던 논리다. “노동자에게는 노동3권을 행사하지 않을 네 번째 권리가 있다”(1947년 미국 태프트-하틀리법)고 말하면서 말이다.

영국 대처 정부는 1988년 노동법 개악 때 조합원 개인 권리를 강조하면서 노조 재정 문서 열람권을 부여했다.

그런데 조합원 개인의 권리 강조는 재정 문제에 멈추지 않았다. 대처 정부는 동시에 쟁의행위 불참을 이유로 노조로부터 징계를 당하지 않을 권리, 조합비 일괄공제를 거부할 권리도 법으로 정했다.(《대처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영국노동조합운동의 대응》,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결국 정부가 조합원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며 노리는 것은 노동조합의 집단행동 약화다. 조합원과 노조 지도부를 대립시켜 노조 지도부를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개별 조합원 권리와 집단행동을 대립시켜 집단행동을 약화시키려는 것일 뿐이다. 노동계급적 윤리를 약화시키려는 것이다.

10월 5일 노동조합 회계공시 제도 시행 관련 브리핑 ⓒ출처 고용노동부

고용노동부는 노동조합 회계 공시에 대해 노동조합의 민주성과 자주성을 공고히 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민주성과 자주성은 국가의 간섭과 통제로부터 독립적일 때 가능한 것이다. 그래야 조합원들의 자주적 집단행동을 위한 기구로서 구실을 더 잘 할 수 있다. 집단행동을 약화시키면서 노조의 자주성과 민주성이 강화될 수 없다.

집단행동 약화

노동조합 회계를 국가 시스템에 공개하는 것 자체도 집단행동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조합이든 사회운동 단체든, 좌파 조직이든 돈은 집단행동의 중요한 기반이다.

노동조합의 재정은 쟁의행위나 집회, 다른 부문 노동자와의 연대 등 집단행동 자체에 들어가는 비용 충당뿐 아니라 투쟁 과정에서 해고되거나 투옥, 또는 벌금이 부과되는 경우 해당 노동자를 지원하는 데도 중요하다.

그런데 만약 노동조합의 지출 등이 국가 시스템에 공시된다면 사용처에 대한 정부나 우파 언론 등의 통제와 간섭이 용이해진다.

이미 지난해 〈조선일보〉는 조합비가 강경 투쟁, 불법 파업, 반미 정치 선동, 폭력에 쓰인다고 비난했고, TV조선은 공무원노조 해고자 생계비 지원을 문제 삼았다. 올해 6월 국세청은 전국공무원노조의 해고자 지원금과 관련해 세무 조사를 실시했다.

조합원 개인 권리 강조와 국가기구의 노조 재정 개입 확대는 다음과 같은 재앙적(노동계급 내 연대를 파괴하는 데 이용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1984~85년 영국 광원 파업 당시 전국광원노조(NUM) 일부 지부 조합원들이 불법 파업에 대한 조합비 사용, 전국선원노조(NUS)의 일부 조합원이 광부 파업 연대 기금 지원을 문제 삼으며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이들의 청구를 인용했다.(“노동조합 재정투명성 확보방안”, 한국노동법학회)

거부

10월 5일 민주노총은 노동조합 회계 공시에 대해 “노조 때리기”라고 비판하며 “조합원 개개인의 다양하고 소중한 의견을 듣고 일치성을 높이기 위한 토론을 시작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내부에서 전면 거부, 전면 공시, 일부 공시 등의 안을 두고 토론한다고 한다. 고용노동부의 목적은 작업장에 기반한 집단행동이라는 노동계급의 가장 중요한 투쟁 능력을 약화시키려는 것이다. 정부의 시도를 좌절시키도록 회계 공시 압박을 전면 거부하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