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정부의 노동개악 시도와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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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은 “인기가 없어도” 노동·연금·교육 개악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노동 개악이 먼저라고 했다. 그만큼 기업주들에게 다급하고 절박하다는 것이다.
윤석열 노동 개악은 노동시간 유연화, 고용 유연화, 임금 체계 개편, 쟁의권 약화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 목표들은 모두 임금 억제로 연결된다.
노동시간 유연화는 신규 채용 대신 기존 노동력을 더 활용하는 것이고, 파견제 개악도 직접 고용에 따른 부담을 줄이는 것이다.
임금 체계 개편도 자동 인상이 포함된 연공급제를 없애거나 약화시키는 데 핵심 목적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기업들의 고정지출(경직성) 비용을 최대한 줄이려는 것이다.
세계 경제 장기 침체, 미·중 갈등 격화가 야기한 공급망 재편 동참 압력 등 위기와 딜레마를 겪는 한국 기업들의 이윤을 보호하려고 노동자들을 최대한 쥐어짜려는 것이다.
이처럼, 윤석열의 노동 개악 드라이브는 단순히 “노조 혐오 정서를 이용한 지지율 올리기” 시도 따위가 아니다. 경제 침체 속에서 필사적으로 이윤을 보호하려는 기업주들과 그 친구들인 국가 관료의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민주당의 주요 기반도 본질적으로 같은 목적을 갖고 있다.
노사정위원회
1990년대 중반 이후 역대 정부는 모두 노동 개악을 “노동 개혁”이라고 포장하고, 가급적 노사정 대타협 방식으로 추진해 왔다. 노동계 온건파 지도자들은 대정부 협상력을 높인다며 이 논의에 참여했다.
그러나 실상은 이들이 정부의 노동 개악 추진에 들러리를 서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데도 타협이 제대로 되지 않아 정부가 날치기로 통과시키는 일도 흔했다.
김영삼은 노사정 대타협 방식에 실패하자 1996년 12월 26일 새벽 일방적 국회 날치기 방식을 동원했다. 노동법 개악을 위해 당시 막 출범해 합법화도 안 된 민주노총을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 끌어들였으나,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시간제(탄력근로제와 흡사), 파견제 등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김영삼 정권은 여당 단독으로 날치기 했다가 민주노총의 파업으로 정권 자체가 휘청이는 상태로 내몰리자 법안을 유예시켰다.
이 개악 법안들은 1997년 11월 IMF 공황 덕분에 집권한 김대중 정부가 설치한 노사정위원회에서 결국 통과됐다.
이 노사정위원회 회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양대 노총 지도부가 모두 참여해 합의한 회의가 됐다. 민주노총 지도자들조차 국가 경제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경제 회복을 위해 노동자들이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를 물리치지 못한 것이다.
1998년 초에 열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이 합의를 인정하지 않고 지도부를 사퇴시켰다. 하지만 단병호 당시 위원장이 이끌던 새 비대위 지도부는 개악 추진을 막으려는 파업 투쟁을 포기했다.
이후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하고 지금까지 20년이 넘도록 노사정위원회(지금의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복귀하지 않고 있다.
이후 노무현·이명박 정부는 노사관계 문제를 중요한 “노동 개혁” 목표로 내세웠다.
노동조합들이 개혁하라고 요구해 온 의제들을 논의 대상으로 포함시키지만, 노동조합 할 권리들은 아주 제한적으로만 합법화해 주고 대신 쟁의권을 최대한 예측 가능하고 감당 가능한 범위로 제한하는 식이었다.
가령 노무현 정부의 노사관계로드맵은 필수 공익 사업장 직권중재제도를 폐지하라는 노동계 요구를 의제로 삼았다. 직권중재제도는 공공부문의 노사 협상이 결렬될 경우 정부가 임의로 ‘중재’해 버리면 공공부문의 파업이 불법이 되는 악법이었다.
최종 결과는 공공부문 파업을 허용하되 필수업무유지 인력을 사전에 지정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파업 효과를 극히 제한하거나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2006년 말에 비정규직 개악 법안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비정규직 노동자 ‘보호’ 입법으로 포장됐지만, 실제로는 비정규직이 급속히 늘어난 현실에서 숙련 비정규직은 계속 사용하면서도 차별은 유지하고 싶은 사용자들의 필요가 반영된 입법이었다.
노동계는 상시업무에서는 비정규직 채용을 제한하라고 요구했지만, 노무현 정부와 사용자들이 끝내 거부하고 2년 비정규직 채용 후에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했다. 노동계는 기간 제한이 오히려 일부에서 대량 해고를 부를 수 있다며 반대했다.
법이 통과된 지 반년밖에 안 지난 2007년 7월 1일,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량 해고에 맞서 점거 파업에 들어가면서 노무현 정부의 거짓말은 들통이 났다.
이명박의 노사관계로드맵 개악 당시에도 마치 노조의 복수노조 허용 요구, 사용자 측의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등을 공정하게 다루는 외양을 취했다. 그러나 그 결과 복수노조 결성은 허용되지만, 창구 단일화를 강제해 소수파 노조가 되면 노동3권이 제약됐다.
당시 한국노총 지도부는 막판까지도 10만 명을 동원한 개악 반대 집회를 열다가 돌변해 이명박 노동 개악의 들러리를 섰다.
실제 입법 과정에서는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합의로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반대를 제치고 날치기 통과됐다.
대정부 투쟁
박근혜가 정권 말에 다급하게 추진한 직무성과급제 도입과 쉬운 해고제 도입은 좌절됐다. 박근혜 정부가 실패한 것은 노사정 대타협 방식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에 이미 박근혜 정부에 대한 광범한 분노와 반대가 표출되기 시작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노동계 저항의 선두였던 철도노조 파업은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의 마중물이 됐다.
이처럼, 역대 정부가 “노동 개혁”이라고 부른 것은 모두 개악이었다. 노사정 대타협 형식을 취할 때조차도 정부와 사용자들은 함께 밀어붙였으며, 주고받기조차 거의 없었다. 민주당은 노사 간 중재자인 척하지만 집권했을 때는 노동 개악 추진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1997년 초에 그랬듯이 노동계급의 조직된 부분이 단호하게 투쟁에 나섰을 때는 (일시적일지라도) 개악을 막아 내기도 했다. IMF를 불러들인 경제 공황에 직면해 개악을 막지 못했던 것이 필연은 아니었다. 김대중과 노무현 등의 민주당 정부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투쟁성과 사기를 잠식했던 것이다.
윤석열의 노동 개악 전쟁 선포에 단호하게 반대 투쟁에 나서는 것만이 개악을 막을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