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기 사건과 관련된 정치적 쟁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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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윤기의 범행은 ‘우발적’ 살인이 아니다. 정황상 ‘계획적’ 살인이다
장윤기가 저지른 여고생 살해를 현장에서 갑자기 발생한 ‘우발적 살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성폭행을 목적으로 여고생을 계획적으로 납치하려 했다. 살해 목적으로 다른 여성(동남아시아 국적)을 찾아다녔고, 준비한 흉기를 소지한 채 범행에 나선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피해자의 저항이나 범행 발각에 대비해 살해까지 염두에 뒀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다만, ‘성폭행 후 살해’를 구체적으로 계획했는지는 재판을 통해 추가로 규명해야 한다.
성폭력처벌법상 ‘강간 등 살인죄’는 성폭력 범죄를 저지르거나 시도한 자가 피해자를 살해할 때 성립한다. 범행을 사전에 계획해야만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계획적 살인’ 여부는 별도의 사실 판단 영역이며, 형량을 가중하는 주요 양형 요소로 작용한다. 동남아시아 국적 여성 살해 계획은 여고생 살해 계획을 추론할 중요한 근거다. 장윤기는 성폭행과 살인을 서로 전혀 별개의 행위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여성을 강제로 제압해 성폭행하고 필요할 경우 살해하는 일련의 범행을 구상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여기서 ‘성폭행 후 살해하기로 확정했다’는 것과 ‘저항·신고·신원 노출 등의 상황이 생기면 살해할 준비가 돼 있었다’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현재 공개된 증거는 후자의 ‘조건부 살해 계획’ 또는 ‘살해 가능성을 예정한 범행’을 시사하지만, ‘성폭행을 마치면 무조건 살해한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직접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장윤기의 방에서 발견된 리얼돌이 여러 조각으로 훼손돼 있었는데, 특히 가슴과 목 부위가 집중적으로 훼손됐다. 가슴과 목은 실제 여고생이 공격당한 부위와도 관련이 있으므로, ‘사람 형상의 성인용품을 상대로 치명적 부위를 찌르며 폭력적 성적 환상을 실행하거나 실제 공격을 연습한 것 아닌가’라는 의심은 완전히 합리적이다. 다만, 훼손된 물건만으로 살인 연습을 직접 증명하기는 어렵다. 특히 그의 경찰 간부 아버지가 해당 리얼돌을 폐기해 정밀한 추가 검증이 어려워졌다. 이런 정도의 핵심적인 증거 인멸이 (형법상 ‘친족 특례’에 따라) 형사 처벌에서 면제되는 것은 직관적으로 부당하다.
2. 장윤기 사건은 여성 대상 성폭력이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번 사건은 여성 대상 폭력이 얼마나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성폭행은 성욕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폭력 문제다.
피해자가 저항하자 살해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성폭행이 얼마나 쉽게 치명적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피해자 자신이 목격자라는 이유에서도 성폭행은 때때로 살인으로 이어진다.
현재까지 드러난 범행만으로도 죄질은 극히 나쁘다. 그러나 사실은 아직 다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수사기관은 디지털 자료와 통신기록, 이동 경로 등을 분석하며 추가 피해자가 있는지도 확인하고 있다. 수사는 계속돼야 한다.
성폭행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신고하지 않았거나 뒤늦게 용기를 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따라서 여죄 여부는 끝까지 확인돼야 한다.
이번 사건은 단지 잔혹한 강력범죄의 하나가 아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이 어떻게 반복되고, 어떻게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다.
3. 왜 진실이 묻힐 뻔했는가: 경찰의 부패, 조직 보위를 위한 은폐
장윤기 사건의 진실은 경찰의 초동수사가 아니라 이후 진행된 검찰의 보완수사를 통해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부실수사’를 넘어 경찰 조직의 구조적 유착 의혹과 은폐 혐의로까지 번졌다.
사건 직후 광주 광산경찰서는 장윤기를 살인과 살인미수 혐의 등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그러나 성폭행 목적 범행이라는 혐의는 적용하지 않았다.
이후 검찰 보완수사를 통해 드러난 사실들은 충격적이었다. 장윤기의 차량에는 피해자를 결박하는 데 사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의심되는 케이블타이가 있었다. 주거지에서는 특정 부위가 심하게 훼손된 리얼돌이 발견됐다. 경찰이 확보하지 않은 차량 블랙박스 SD카드도 검찰이 다시 수색해 찾아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DNA 감정 결과도 검찰 송치 과정에서 누락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채증영상과 일부 수사자료도 처음에는 검찰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혐의가 제기됐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만 문제였다면 단순한 실수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중요한 증거들이 거듭 확보되지 않았고, 확보된 자료조차 제대로 넘겨지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특히 이들 대부분은 성폭행 목적 범행 여부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들이었다.
장윤기 사건은 이제 살인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사건이 진행될수록 훨씬 더 큰 충격을 준 것은 경찰 수사 과정이었다. 초동수사를 맡았던 경찰은 성폭행 의도를 입증할 수 있는 여러 정황과 증거를 확보하지 않았고, 피의자의 아버지인 현직 경감은 수사 정보를 전달받아 증거를 없앤 혐의를 받고 있다.
사건을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은 장윤기의 아버지 장 경감이었다. 수사 과정에서 장윤기의 집 비밀번호와 수사 상황이 아버지에게 전달됐다는 혐의가 제기됐다. 아버지는 이후 장윤기의 주거지에 들어가 경찰이 압수하지 않은 리얼돌을 해체해 버리고, 장윤기의 이전 휴대전화를 불태운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이 확보하지 않았던 케이블타이도 나중에 아버지의 집에서 발견됐다.
그가 어떤 경로로 그것을 가져가게 됐는지는 현재도 수사 대상이다.
경찰은 이미 담당 수사팀장을 구속했고, 수사는 경찰서 지휘부와 광주경찰청 간부들까지 확대되고 있다.
뿌리째 흔들린 경찰 수사의 공정성
그러나 사람들은 묻고 있다. ‘경찰은 왜 장윤기를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히 ‘실수를 했다’는 말로 대신할 수 없다. 심각한 것은 단순히 증거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아니다. 경찰 내부에서 수사 정보가 피의자의 가족에게 전달됐다는 혐의 자체가 경찰 수사의 공정성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경찰 조직에서는 오래전부터 ‘제 식구 감싸기’라는 비판이 반복돼 왔다. 같은 조직이라는 이유로 서로를 보호하고, 내부 문제를 외부에 드러내지 않으려는 조직문화다.
이번 사건에서도 그런 문화가 작용했음이 틀림없다. 더구나 장윤기의 아버지는 해당 경찰서에서 근무했던 경력이 있다. 일부 형사는 그를 ‘선배’라고 불렀다는 보도도 나왔다.
물론 이것만으로 조직적 공모가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 경찰 특별수사팀은 담당 형사들뿐 아니라 당시 경찰서장과 형사과장, 광주경찰청 간부들까지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이는 사건을 단순히 현장 형사 몇 명의 판단 착오만으로 보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수사 과정에서 언제든 실수할 수 있다. 증거 하나를 놓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수와 은폐는 다르다. 실수는 뒤늦게라도 인정하고 바로잡을 수 있다. 반면 은폐는 책임을 피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과 누락을 낳는다.
이번 사건에서 제기된 혐의는 단순히 ‘압수하지 못했다’가 아니다. 왜 압수하지 않았는가? 왜 송치하지 않았는가? 왜 수사자료가 누락됐는가? 왜 피의자의 아버지가 증거를 치울 수 있었는가? 왜 수사 정보가 외부로 흘러갔는가?
이 질문들에 답하지 못한다면 경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이번 사건을 경찰관 몇 사람의 도덕성 문제로만 볼 수 없다. 경찰은 막대한 강제력을 가진 국가기관이다. 체포하고, 압수수색하고, 증거를 확보하고, 사건의 방향을 사실상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다. 그만큼 외부의 엄격한 통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경찰 비위를 경찰이 조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조직 내부의 상명하복 문화는 책임을 위에서 아래로, 또는 아래에서 위로 숨기기 쉽게 만든다.
특히 피의자나 가족이 경찰 조직과 연결돼 있는 사건에서는 공정성에 대한 의심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번 사건이 보여 준 것은 바로 그 위험성이다.
현재 수사는 경찰 지휘부를 향하고 있다. 과연 강간 등 살인 혐의를 처음부터 적용하지 않은 것에 누군가의 개입과 압력이 있었는지는 앞으로 차차 밝혀져야 할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이번 사건이 평범한 부실수사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기관이 특정 피의자에게 특혜를 제공했는지, 즉 국가기관의 부패 여부를 규명하는 사건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장윤기 개인의 범죄 못지않게 철저히 밝혀져야 한다.
4. 장윤기 사건의 진짜 쟁점은 국가기구다: 경찰·검찰 모두 신뢰할 수 없다
이번 사건은 검찰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검찰에 대한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필요한 것은 어느 한 기관의 권한 독점이 아니라 국가권력에 대한 실질적인 견제와 민주적 통제다. (민주적 통제가 무엇인지는 6절에서 언급하겠다.)
경찰과 검찰은 서로 다른 조직이지만, 둘 다 자본주의 국가기구의 일부다. 따라서 어느 한쪽을 정의의 구현체로 보는 것은 착각이다. 그러나 국가기구가 하나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권한과 이해관계가 다른 기관들이 서로 경쟁하고 견제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감춰질 뻔한 진실이 드러나기도 한다. 장윤기 사건은 바로 그런 사례다.
장윤기 사건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줬다. 검찰의 보완수사가 없었다면 이 사건은 일반 살인사건으로 마무리됐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검찰 보완수사권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이번 사건이 경찰은 부패한 반면 검찰은 정의롭다는 함의를 지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검찰도 오랫동안 권력을 남용하고 정의를 훼손해 온 국가기관이다. 검찰은 권력형 비리나 고위층 범죄에서 거듭 부실수사와 봐주기 수사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사건에서는 여러 차례 무혐의 처분과 부실수사가 사회적 공분을 샀고, 결국 재수사와 진상조사가 이뤄졌다.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씨 간첩조작 사건에서는 검찰이 제출한 출입국 기록이 위조된 것으로 드러나 검찰의 신뢰가 또다시 크게 훼손됐다.
노동자 투쟁과 집회에 대해 업무방해죄와 집시법 등을 적극 적용하며 공권력을 앞세워 탄압해 왔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이런 사례들은 검찰도 결코 보통 사람들 편에 선 기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번 구체적인 사건에서 검찰이 한 역할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 장윤기 사건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이번에는 경찰이 성폭행 살인의 실체를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고, 검찰이 추가 수사를 통해 이를 드러냈다.
불편하더라도 사실은 사실이다. 문제는 여기서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느냐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검찰 권한을 대폭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쪽에서는, 검찰개혁을 위해 보완수사권 폐지는 예정대로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둘 다 문제의 핵심을 비켜 가는 것이다. 장윤기 사건이 보여 준 것은 검찰이 훌륭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사실상 경찰에 수사권을 독점시키는 것 역시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장윤기 사건과 검찰 보완수사권 문제
국가기관은 어느 하나도 스스로를 통제하지 않는다. 경찰은 조직을 보호하려 하고, 검찰 역시 조직을 보호하려 한다. 경찰은 ‘제 식구 감싸기’라는 비판을 받아 왔고, 검찰도 마찬가지였다.
권한이 집중될수록 권한 남용의 위험도 커진다. 그렇기 때문에 검찰 보완수사권을 전면 폐지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한다.
이번 사건에서 보완수사는 경찰의 판단과 증거 확보를 다시 검증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이런 최소한의 장치마저 사라진다면 경찰의 초동수사에서 발생한 은폐를 바로잡을 제도적 수단은 더욱 약해질 수 있다.
물론 보완수사권이 언제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아니다. 검찰은 보완수사를 이용해 사건 처리를 늦추거나, 수사의 방향을 자신들이 원하는 쪽으로 바꾸거나, 특정 사건을 과도하게 확대 또는 축소할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는 검찰의 선택적 수사와 정치적 수사, 권력 비호 수사라는 비판을 받은 사례가 적지 않다.
따라서 보완수사권의 일부 존속을 찬성한다고 해서 검찰 권한의 재강화를 지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경찰에 독점시키는 것도 위험하고, 검찰에 독점시키는 것도 위험하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민주적 통제다.
장윤기 사건은 검찰을 신뢰하라고 말하는 사건이 아니다. 동시에 경찰에 수사권을 독점시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보여 준 사건이다. 검찰도 믿을 수 없고 경찰도 믿을 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권력기관 사이의 견제 장치나마 섣불리 없애서는 안 된다.
그러나 수사기관끼리의 견제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뿐이고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누구나 국가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노동자 등 보통 사람들의 조직된 힘이 국가기관의 폐쇄성과 권한 남용을 끊임없이 견제해야 한다.
5. 경찰은 왜 그토록 부패했는가
장윤기 사건을 보면 “경찰이 어떻게 이 정도까지 썩을 수 있나” 하는 분노가 드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경찰관 개개인이 모두 부패했다고 일반화하기보다는, 경찰 조직이 부패와 은폐를 낳고 보호하기 쉬운 구조를 지녔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장윤기 사건에서 특히 충격적인 것은 단순한 무능이나 실수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황이 겹쳐 있다는 점이다. 성범죄 목적을 뒷받침할 수 있는 많은 증거들이 확보되지 않거나 사라지고, 수사 정보가 피의자의 경찰 간부 아버지에게 전달됐다는 혐의가 제기됐다. 이제는 현장 수사팀뿐 아니라 경찰서 지휘부가 강간 등 살인 혐의 적용을 막았는지도 수사 대상이 됐다. 아직 윗선 개입이 법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한두 사람의 사소한 착오로 치부할 단계는 지났다.
제 식구 감싸기
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첫째, 경찰 조직은 강한 동료 의식과 상명하복 문화로 묶여 있다. 경찰 업무는 동료의 협조와 보호에 크게 의존한다. 위험한 현장에서 서로를 믿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있지만, 이것이 변질되면 “우리 식구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폐쇄적 연대가 된다. 특히 피의자나 그 가족이 현직 또는 전직 경찰이면, 개인적 친분이 없어도 같은 조직 사람이라는 이유로 정보와 편의를 제공할 가능성이 커진다.
장윤기의 아버지가 해당 경찰서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고, 일부 경찰이 그를 선배로 대했다는 보도가 사실이라면, 이는 돈을 주고받는 고전적 뇌물 부패라기보다 조직 인맥을 이용한 특혜와 은폐에 해당한다. 이런 종류의 부패는 당사자들이 그것을 부패라고조차 인식하지 않고 “선배를 돕는 것”, “동료의 사정을 봐주는 것”으로 합리화하기 쉽다.
둘째, 내부 감찰이 독립적이지 않다. 경찰의 잘못을 경찰이 조사하고, 같은 지방경찰청이나 같은 계통의 부서가 감찰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다른 경찰 사건에서도 문제를 일으킨 수사관과 감찰 담당 부서가 같은 경찰청 수사 계통에 속해 ‘제 식구 감싸기’ 우려가 제기됐다.
내부비리 신고센터나 시민감찰위원회 같은 장치가 있기는 하지만, 신고자는 이후의 인사·근무 관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경찰 내부에서 상관이나 동료의 비위를 폭로하는 것은 일자리를 걸어야 하는 일이 되기 쉽다. 결국 공식적인 감찰 장치가 있어도, 조직 전체가 사건을 축소하려 하면 초기에 제동을 걸기 어렵다. 경찰 자체 연구도 오래전부터 사후 적발 중심의 감찰에서 독립적이고 예방적인 상시 감사로 전환할 필요성을 제기해 왔다.
셋째, 권한은 큰데 외부 통제는 약하다. 경찰은 현장 통제, 체포, 압수수색 신청, 피의자 조사, 증거 수집, 혐의 판단, 송치 여부 등에 막대한 실질적 권한을 갖는다. 일반 민간인에게는 경찰이 작성하는 최초 수사기록이 사실상 사건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한다.
문제는 수사 초기 경찰이 증거를 압수하지 않거나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외부 기관이 나중에 그것을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이번 사건은 검찰이 같은 차량과 주거지를 다시 조사하면서 경찰이 확보하지 않은 자료를 찾아냈기 때문에 문제가 드러난 특수한 사례다. 검찰의 보완수사가 없었다면 일반 살인 사건으로 굳어졌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그러므로 검찰에 강력한 권한을 줘야 한다”는 결론으로 연결해서는 안 된다. 검찰 역시 폐쇄적 관료 조직이고 수많은 봐주기 수사와 정치적 수사를 벌여 왔다. 핵심은 경찰과 검찰 중 어느 한 기관이 선하다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관(특히 강제력을 행사하는 기관이라면 더욱더)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경찰 조직은 진실보다 조직의 평판과 지휘 책임을 먼저 보호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건 초기에 경찰의 잘못을 인정하면 수사팀장, 형사과장, 경찰서장, 지방청 지휘부까지 책임 문제가 번질 수 있다. 그래서 초기에 작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덮다가, 은폐를 유지하기 위해 더 큰 조작과 누락이 이어질 수 있다. 이를테면 처음에 케이블타이를 압수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고 해도, 그 사실을 솔직히 기록하고 즉시 보완했다면 사건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채증영상이나 수사보고서까지 삭제·누락했다면, 그때부터 목적은 수사가 아니라 경찰 자신의 책임을 피하는 것이 된다. 조직의 체면을 지키려는 행동이 결국 범죄 피의자를 보호하고 피해자를 두 번 짓밟는 결과를 낳는다.
다섯째, 경찰은 시민을 보호하는 기관이라는 성격보다는, 국가권력과 지배계급의 이익을 지키는 기관이라는 성격이 훨씬 크다. 경찰은 단순한 공공 서비스 기관이 아니다. 경찰은 기존 소유와 질서를 강제력으로 유지하는 국가기구의 일부다. 노동자 파업, 철거 저항, 집회에서는 시민에게 매우 공격적인 경찰이 대기업, 고위관료, 조직 내부 사람에게는 유독 관대한 일이 반복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물론 이는 경찰이 살인 용의자를 잡는 등 필요한 일을 한다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다. 국가기관은 기본적 치안 기능도 수행한다. 그러나 경찰의 궁극적 우선순위는 보통 사람들의 안전과 정의보다는 국가의 권위, 조직의 안정, 지휘 체계와 기존 질서의 유지에 놓여 있다.
이번 사건에서도 피해자인 평범한 여고생과 동남아시아 국적 여성의 권리보다 경찰 간부 아버지와 경찰 조직의 이해관계가 앞섰다면, 그것은 몇몇 악질 경찰관만의 도덕적 타락으로 설명할 수 없다. 권력과 인맥을 가진 사람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는 국가기관의 구조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여섯째, 성폭력에 대한 경찰의 낮은 인식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훼손된 리얼돌, 결박용으로 의심되는 케이블타이, 앞선 성폭행 정황 등을 각각 “직접 관련이 없다”고 떼어 놓으면 성범죄 목적을 놓치기 쉽다. 피해 여성을 납치·통제하려 한 전체 행동 양식을 보지 않고, 살인이 일어난 순간만 좁게 보면 우발적 살인처럼 처리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기술 부족 문제가 아니다.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과 통제 욕망을 사소한 사생활이나 기이한 취향 정도로 취급하는 조직문화와도 관련될 수 있다. 특히 앞서 피해를 입은 동남아시아 국적 여성의 신고나 피해가 처음부터 충분히 중시됐는지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그 여성은 성·인종·계급 삼중의 차별을 받은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나쁜 경찰 몇 명을 엄벌하라”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수사팀장과 지휘부의 형사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지만, 다음과 같은 제도적 변화가 함께 필요하다.
제도적 변화
경찰 비위는 경찰 지휘부로부터 독립된 기관이 수사해야 한다.
수사 과정의 압수·미압수 판단과 증거 목록, 현장 채증자료를 자동 보존하고 사후 삭제가 불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경찰관이나 그 가족이 관련된 사건은 처음부터 다른 지방경찰청이나 독립 수사기관으로 넘겨야 한다.
내부 고발자를 실질적으로 보호하고, 피해자와 유족이 수사기록 누락과 증거 미확보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경찰권 확대에 상응하는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
장윤기 사건에서 가장 끔찍한 점은 경찰이 단지 범행을 관대하게 처리할 뻔했다는 것이 아니다. 경찰 내부의 연줄이 있다면 흉악 범죄의 죄질까지 축소되고, 결정적 증거가 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줬다는 점이다.
이 혐의가 사실로 확인된다면 그것을 일부 개인들의 비리가 아니라 국가기관이 성폭행 목적 계획 살인 피의자를 비호한 중대한 권력형 범죄라고 불러야 한다.
6. 민주적 통제: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아래로부터의 권력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의회제 민주주의에 환멸을 느낀다. 공약은 지켜지지 않으며, 선출되지 않은 은행가와 자본가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좌우하는 결정을 매일 내린다. 그런데도 지배계급은 이 극도로 제한된 민주주의를 인류 성취의 정점인 양 포장한다.
그러나 역사 속 민주주의는 언제나 계급투쟁의 산물이었으며 그 형태도 다양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시민의 정치 참여는 대체로 재산에 좌우되지 않았다(비록 여성과 노예는 배제됐다). 근대 선거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혁명의 필요와 아래로부터의 참정권 투쟁이 결합된 특수한 역사적 산물일 뿐이다. 1867년 영국 선거법 개정처럼 핵심적인 민주적 개혁은 노동자 투쟁이 쟁취한 결과였다. 20세기 말까지도 전 세계 국가의 절반 미만만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였다. 아랍 혁명이 보여 줬듯, 수많은 대중이 이 제한된 민주주의라도 쟁취하고자 거리로 나섰다. 문제는 이러한 열망이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 안에 갇혀야 하는가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사기”라고 불렀다. 경제 권력과 국가의 억압 기구 모두 의회로는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4~5년에 한 번 원자화된 개인으로서 투표할 뿐, 그 사이에 대표자를 통제하거나 소환할 수단이 없다. 판사, 경찰 수뇌부, 군 장성, 정보기관 책임자들은 선출되지 않은 채 대기업 총수들과 같은 배경에서 나와 긴밀히 결탁한다. 자본가와 다국적기업은 의원을 직접 심을 필요도 없이 로비스트를 통해 국가 기구를 움직인다.
소수에서 다수로 권력을 이동시키겠다며 선출된 정당들이 번번이 기존 체제의 관리자로 전락한 역사가 이를 입증한다. 영국 노동당은 자본주의 체제가 감당할 수 있을 때만 개혁이 가능하다는 전제 위에 설립됐고, 위기 상황에서는 노동자가 아니라 체제의 편에 섰다.
부패도 몇몇 ‘썩은 사과’의 일탈이 아니라 경쟁이 강제하는 체제의 논리다. 미국 엔론 스캔들이나 영국 방산업체 BAE의 사우디 왕가 뇌물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보통 사람들의 민주적 통제가 강화될수록 부패는 감소한다.
요컨대 국가는 계급 대립의 산물인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 집단’일 뿐이며, 자유주의가 주장하듯 사회 위에 군림하는 중립적 심판관이 아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파리코뮌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계급이 기존 국가기구를 그대로 인수해 사용할 수 없으며, 이를 반드시 분쇄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현대 혁명은 임금 인상 같은 경제적 요구와 경찰 폭력 중단 같은 정치적 요구를 결합한 대중 파업 운동에 의존한다. 사장과 관리자들이 도망치거나 쫓겨나면, 노동자는 공장위원회를 설립해 스스로의 지식으로 생산을 직접 운영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일터와 지역사회를 아우르는 조정의 필요성이 커지며 새로운 기구가 등장한다. 역사상 모든 혁명과 혁명적 시도는 놀랍도록 유사한 해답을 내놓았다. 바로 ‘노동자 평의회’다. 1905년과 1917년 러시아의 소비에트, 1918~1919년 독일의 노동자 평의회, 1919~1920년 이탈리아의 초기 평의회, 195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평의회, 1972년 칠레의 코르돈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기구들은 원자화된 개인의 투표에 의존하지 않고,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토론하고 조직하는 일터에 기반을 두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대의원을 즉각 소환하거나 해임할 수 있어 대중의 급진적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미국 언론인이자 공산당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존 리드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방 소비에트가 중앙 정부를 창출하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었다. 요리사, 청소부, 마부까지 대표하는 이 기구들은 부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생산 자체를 민주적으로 통제할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이는 5년마다 거짓말하는 정치인을 선택하는 대의제보다 훨씬 더 진보한 민주주의다.”
민주적 통제는 정치를 넘어 경제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시장 옹호자들은 시장만이 수요를 정확히 반영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시장은 부유층의 수요에 맞춰 생산을 편성하는 ‘무정부적’ 체제에 불과하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이미 고도의 계획에 의존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 아마존의 물류망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그 계획이 오직 경쟁과 이윤 추구에만 매여 있다는 점이다. 민주적 계획은 이러한 기존의 계획 역량을 자본가와 경영진에게서 해방시켜,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할지 현장과 지역, 사회 전체 각 층위에서 노동자와 주민이 집단적으로 결정하는 일이다. 전쟁, 광고, 패스트패션에 낭비되던 자원을 보건, 돌봄, 대중교통으로 전환하고, 상업적 경쟁의 무기로 쓰이는 과학·의료 지식을 공유하는 협력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기후 위기의 해결도 이러한 민주적 계획 없이는 불가능하다.
여기서 명확히 구분해야 할 점이 있다. 국유, 즉 국가 소유가 곧 민주적 통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과거 소련과 동유럽의 소위 ‘현실 사회주의’는 관료가 노동자를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체제였으며, 노동자 민주주의가 결여된 국유화는 결국 국가자본주의로 귀결됐다.
한편 경제학자 리처드 울프식의 노동자협동조합처럼, 자본주의 국가와 시장의 압박 속에서 개별 일터의 민주주의만 추구하는 모델은 한계가 뚜렷하다.
노동자 통제는 단순히 의사결정이 더 민주적이라는 데 그치지 않는다. 투쟁 과정에서 노동자 스스로를 마르크스의 표현처럼 ‘지배하기에 적합한’ 주체로 성장시키는 데 참뜻이 있다.
민주적 통제는 책상 위에서 설계되지 않는다. 대중 투쟁 속에서 자라난다. 파업과 시위는 평범한 사람들을 구경꾼의 자리에서 끌어내어 ‘누가 결정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조직된다면 노동자들은 체제를 멈출 힘과 사회를 재편할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다.
투쟁이 격화되면 지배계급은 분열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전문가만이 운영할 수 있다’는 통념과 자신들을 갈라놓던 편견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그러나 평의회가 새 사회의 토대라는 잠재력을 저절로 실현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운동을 위로부터의 개혁을 압박하는 지렛대로 한정하려는 온건화와 타협의 압력에 맞서, 혁명적 정치가 승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평의회 권력에 기초한 노동자 국가조차 영구적일 필요는 없다. 반혁명 세력이 사라지면 억압 기구는 소멸한다. 결국 인간의 필요에 따라 생산과 분배를 결정하는 민주적 기구만 남는다.
계획하고 협력하는 능력은 마르크스가 말한 “잠자는 힘”이다. 그 힘을 함께 깨우는 것이야말로 민주적 통제의 진정한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