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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국 신설 논란을 계기로 보는:
경찰의 흑역사

7월 25일 언론들은 행정안전부가 경찰특공대를 투입해 대우조선 하청 파업을 진압하려 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섬뜩하고 분노를 자아내는 일이다. 진압 모의는 경찰국 설립을 주도한 행안부 장관 이상민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특공대 투입 지시도 이상민의 것이었다.

경찰국 신설 목적이 억압적 국가기관의 효율적 통제력 확보에 있음이 잘 드러난 사례다.

그런데 친민주당 진영에서는 윤석열 정부의 행정안전부 경찰국 신설이 경찰청 창설 이전인 과거 독재 정권 치안본부 시절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민주당은 경찰국 신설에 반발한 경찰서장들의 집단행동을 지지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의 반동을 비판한답시고, 지금의 경찰 조직을 미화하는 것은 곤란하다. 마치 경찰청 30년은 민주 경찰이 존재했듯이 말하는 언사는 심각한 역사 왜곡이자 경찰 조직의 본성에 대한 호도이다.

경찰청 설립 이전에도 이후에도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였던 적이 없다. 경찰청 시대 30년 동안에도 경찰은 민중을 패는 몽둥이이자 지배자들과 체제를 지키는 충견 구실을 수행해 왔다.

민중을 패는 몽둥이

1987년 서울 연세대 정문 앞에서 최루탄 조준사격을 하던 경찰은 이제 최루액 물대포를 조준 사격한다.

2016년 경찰 살수차는 고압의 물대포를 조준 사격해 백남기 농민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경찰은 부인했지만, 나중에 조준 사격 장면이 폭로됐다.) 2015년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족과 집회 참가자들에게도 경찰은 곤봉과 방패를 휘두르고 최루액을 탄 물대포를 쐈다. 최루액 조준 사격 물대포는 2008년 촛불 운동 때도 등장했다.

2009년 2월 서울 용산역 앞 재개발 현장에서 강제 철거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철거민들의 항의 농성장에 투입된 경찰특공대는 잔인한 진압 작전을 펼쳤고, 그 결과로 무려 철거민 5명이 사망했다. 작전이 얼마나 무리였던지 진압 과정에서 경찰특공대원 1명도 죽었다. 명백하게 진압 작전의 일부였는데도 경찰과 검찰은 오히려 진압에서 살아남은 철거민들을 구속했다.

같은 해 여름, 경찰은 정리해고에 맞서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에게 경찰특공대를 투입했다. 경찰은 헬기 6대를 296회 출동시켜 최루액 20만 리터를 퍼부었다. 대테러 전문 진압부대라는 경찰특공대가 헬기를 타고 공장 지붕으로 진입해 공장을 지키던 노동자들을 잔혹하게 짓밟았다. 당시 농성에 참여했던 노동자들 상당수가 오랫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릴 정도로 아비규환이었다.

그 밖에도 2008년 촛불 폭력 진압,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폭력 진압, 2013년 민주노총 사무실 침탈, 2014년 삼성전자서비스 염호석 열사 시신 탈취 등 경찰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몽둥이 구실을 톡톡히 했다. 특히 염호석 열사의 경우에는 시신을 탈취하려고 경찰 측 정보수사관들이 열사의 부친을 6억 원에 매수한 일이 드러났다.

2015년 4월 ‘세월호 참사 1주기 범국민대회’에서 최루액 물대포를 쏘아댄 경찰 ⓒ이미진

민주당 정부는 달랐을까?

김대중 정부는 경찰을 민주적으로 개혁하겠다며 시위대를 해산할 때 최루탄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대신 이후에는 직접 두들겨 패는 작전을 즐겨 썼다. 이 시기에 경찰 폭력이 잔인했던 이유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직후 김대중 정부는 롯데호텔 노동자 파업에 경찰특공대를 투입했다. 당시 파업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서울 을지로 롯데호텔 34층에서 농성하고 있었는데, 경찰특공대가 옥상에서 줄을 타고 내려와 유리창을 깨고 농성장에 진입했다. 평화적인 농성에 대테러 작전을 펼친 셈이다. 그때 임산부인 한 조합원이 경찰의 발길질에 맞아 유산했다.

이듬해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에 맞서 벌였던 투쟁에도 유혈 낭자한 진압 작전이 펼쳐졌다. 노동자들을 구타해 공장 밖으로 쫓아낸 것도 모자라, 노조 사무실에 들어가려고 평화 행진을 하던 노동자들을 가로막더니, 이에 항의해 연좌한 노동자들을 기습해 방패와 곤봉으로 내리찍고 군홧발로 짓밟았다. 지옥의 한 장면을 옮겨 놓은 것 같은 그 유혈이 낭자한 진압 장면이 영상으로 공개되자, 많은 이들이 경찰의 만행에 충격을 받고 치를 떨었다.

인권 변호사 출신인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경찰 폭력은 이어졌다. 취임 첫해부터 파업 현장에 경찰을 투입하더니, 급기야 시위대가 경찰에게 맞아 죽는 일까지 벌어졌다. 2005년 11월 농산물 수입 개방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한 농민 두 명(전용철·홍덕표)이 진압 경찰에게 방패와 곤봉으로 두들겨 맞아 사망했다. 심지어 경찰은 시신 탈취까지 시도했다.

몇 달 뒤 건설 노동자 하중근 열사가 집회 도중 경찰에 맞아 죽었다. 그때 경찰은 경고 방송도 없이 소화기를 뿌리고 방패를 휘두르며 진압을 시도했다. 16명이 피 흘리며 쓰러지는 아수라장 속에서 하중근 열사도 방패에 뒤통수를 맞았다. 경찰들은 쓰러진 하중근 열사를 에워싸고 짓밟고 소화기로 내리쳤다.

당시 경찰은 시위 진압 때마다 진압용 방패 아랫부분을 갈아 예리하게 만들고는 얼굴과 목을 노려서 가격하는 일이 잦았다.

폭력과 부패 — 경찰의 DNA

노동계급 대중은 일상에서 지배자들과 체제가 가하는 착취와 차별, 억압과 천대 등 온갖 폭력을 진저리나게 겪는다. 삶의 안녕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무시와 입막음을 당하기 일쑤다.

견디다 못해 투쟁에 나서면 득달같이 경찰이 달려와 목소리를 막고 행동을 제지한다. 노동자들은 그런 경찰 폭력에 맞서면서 국가와 경찰의 본질을 깨닫는다.

정부와 경찰이 시위대의 폭력을 비난하는 것은 역겨운 위선이다. 오히려 폭력은 경찰의 본성이다. 경찰은 정권이 특별한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늘 폭력을 저지른다. 구글에서 ‘경찰 과잉 진압’을 검색하면 3만 개 넘는 기사들이 나온다. 경찰 가혹행위 논란도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온다.

경찰(이나 검찰) 공무원이 폭행과 가혹행위를 저지르는 일(이른바 독직폭행)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유명한 사례로 2009~2010년 서울 양천경찰서 고문 사건이 있다. 경찰은 뒤로 수갑을 채운 채 팔을 들어 올리는 일명 ‘날개꺾기’ 등 피의자들에게 가혹행위를 저질렀다.

가혹행위는 보통 증거 수집이 불편하니 빠르게 자백을 받아내 사건을 처리하려는 과정에서 벌어지는데, 심할 때는 허위 자백까지 강요한다.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사건과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 등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유명해진 사건들에서도 경찰은 애먼 사람을 겁박해 범인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들은 독재 정권 때가 아니라 김대중 정부 때 일어났다.

2001년부터 2018년까지 국가인권위원회가 경찰의 ‘불리한 진술 강요, 심야·장시간 조사, 편파·부당 수사’로 상담한 사건이 무려 6427건이다.

이런 가혹행위와 허위 자백 강요는 경찰의 편견도 보여 준다. 억울하게 국가 폭력의 피해자가 된 사람들 중에는 저학력·저소득층의 소외된 청년들이 많다. 나라슈퍼 사건이나 약촌오거리 사건 피해자들은 저학력에 미취업 상태, 장애가 있는 청년들이었다.

당장 지난달 광주광역시 광산경찰서 경찰들은 베트남 출신 이주노동자에게 누가 봐도 끔찍한 폭력을 휘둘렀다. 공개된 CCTV 영상을 보면, 미국 경찰이 조지 플로이드 씨를 죽게 한 일이 떠오를 정도다.

피해 이주노동자는 애인과 고기를 먹으려고 주방용 칼을 친구에게 빌려 집으로 가고 있었는데, 경찰은 전후 사정을 묻지도 않고 노동자를 폭력으로 제압했다. 심지어 당황한 그 노동자가 무릎까지 꿇으며 항복 자세를 취하는데도 테이저건을 쏴 마비시킨 후 발로 짓밟고 무릎으로 목을 짓눌렀다.

5월 25일 경남 김해에서는 경찰관 5명이 마약 판매 혐의가 있는 태국인 용의자를 미란다 원칙도 고지하지 않고 폭행했다. 범죄 혐의만으로 인권을 무시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 누구나 경찰 폭력과 가혹행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범죄 해결은커녕 그 일부

경찰은 부패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국가기구기도 하다. 3년 전 버닝썬 게이트만 보더라도 경찰은 썩어 빠졌다. 당시 경찰이 묵인·방조·증거 인멸·봐주기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경찰은 성범죄 가해자들이나 클럽 소유주들을 체포하고 처벌하기는커녕 그들과 유착했다. 경찰관들 자신이 뇌물 수수 등 범죄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경찰은 징계·파면 공무원이 가장 많은 정부 부처기도 하다. 2011~2015년 공무원 징계 중 경찰이 가장 많았다. 2018~2020년에도 경찰은 파면 건수 1위, 전체 징계 건수 2위에 올랐다. 그러나 경찰이 자체 중징계한 숫자는 기소에 이른 경찰의 수보다 적다. 자기들끼리는 봐주는 것이다.

2019년 기준 경찰관 2150명이 입건됐다. 이 중 폭행, 상해, 협박, 공갈 등 폭력 강력범죄를 저지른 경찰관은 251명이었다. 살인, 강도, 방화, 성폭력 등 흉악 강력범죄도 70명이나 된다. 성범죄로는 공무원 중 교육부 다음으로 많다.

각종 진압 장비로 무장하고 강제수사권, 임의동행권 등 국가가 부여한 경찰권을 행사하는 경찰이 강력범죄를 저지르면 도대체 인권 보호는 누가 해 준단 말인가? 경찰의 무기 사용 제한 완화나 경찰력 강화 같은 것은 이처럼 흉기가 될 수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경찰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는 게 당연하다. 지난해 경찰청은 대국민 인식 조사를 처음으로 자체 실시했는데, ‘경찰을 신뢰한다’는 응답은 절반에 그쳤고, 경찰이 ‘청렴하다’는 질문에 동의한 응답자는 36퍼센트에 그쳤다. 경찰청은 지난해 공공기관 청렴도 평가에서 중앙부처 중 유일하게 최하위 등급을 받기도 했다.

범죄 대처와 예방을 위해서는 경찰이 필요하지 않느냐고도 하지만, 일상에서의 불가피함을 감안하더라도 우리가 이런 경찰을 신뢰하고 안심할 수 있겠는가? 경찰의 범죄는 도대체 누구에게 신고해야 하며, 누가 막아 줄 것인가? 정작 필요할 때는 경찰이 사람들의 신고를 외면해 버리기도 한다.

대부분의 범죄는 자본주의가 낳는 불평등, 차별, 소외와 박탈감을 배경으로 벌어진다. 지배자들은 그런 절망적인 체제에서 이익을 얻고 부와 권력을 누린다. 그리고 경찰은 그 지배자들의 안녕과 범죄적 체제를 수호하는 조직이다.

경찰 편들기는 심각한 오류

전국 경찰서장회의를 열었던 경찰 간부들은 일선에서 체제 수호 임무를 진두지휘하는 자들이다. 윤석열 정부와 대립각을 세운다고 노동계급 편인 것은 아니다.

경찰국 신설은 윤석열 정부가 점증하는 위기 상황에서 공권력이라는 무기를 더 단단히 틀어쥐려는 것이다. 윤석열은 검찰·경찰·국가정보원 등 억압적 국가기관들을 강화하고 있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조율하고 있다. 경찰청장에는 정보경찰 출신을, 초대 경찰국장에는 정통 보안경찰 출신을,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에는 간첩 조작을 자행한 공안검사 출신(이시원)을 임명했다. 국가정보원은 내부 숙정을 벌이고, 안보지원사는 문재인 정부 때 없앤 보안·방첩 기능을 다시 되살리려고 한다.

검찰과 경찰은 서로 갈등하기도 하지만, 노동계급 운동을 탄압하는 데서는 한 몸처럼 움직여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경찰청 시절 30년 동안 경찰은 겉모양은 좀 달라졌지만 정권의 충견으로서 노동계급 대중을 탄압해 온 데서는 변한 것이 없다.

왜 경찰은 민중의 몽둥이인가? — 자본주의 국가의 억압적 본질

경찰은 태생부터 보통 사람들이 피해자인 범죄 예방이나 해결보다는 기득권 질서 유지를 더 중시하는 조직이다. 경찰 본연의 임무는 치안과 경비 업무를 통해 자본가들의 사유재산권을 보호하고, 원활한 축적에 유리한 ‘안정적’ 질서 유지를 위해 각종 사회적 ‘불안’ 요소를 단속하고 대중적 저항을 억압하는 것이다.

최근 서울경찰청장은 이동할 권리를 요구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을 향해 “지구 끝까지 찾아가 사법 처리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지난해 운전 중인 택시 기사를 폭행한 이용구 전 차관을 봐주기 수사했던 모습과 너무나 딴판이다. 차별받는 사람들에게는 가혹하고 권력자에게는 비굴한 것이다.

경찰의 중립이란 정권을 주고받는 주류 양당 사이에서의 중립을 의미할 수 있을 뿐, 계급 간에는 결코 중립적 기구가 아니고 그렇게 고쳐 쓸 수도 없다.

경찰의 억압적·폭력적 행태와 기능은 자본주의 국가의 성격과 관련 있다. 자본주의 국가는 중립적 기구가 아니라 자본주의 지배자들의 권력을 지키고 기존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계급 지배 도구다. 소수 지배자들이 다수 노동계급을 지배하려면 동의와 강제가 모두 필요하다. 경찰은 국가가 강제력을 행사하는 데서 핵심적 구실을 하는 기구 중 하나다. 치안본부든, 경찰청이든, 경찰국이든 경찰은 국가의 주먹 구실을 하는 억압 기관이다.

그래서 경찰은 사냥개가 사냥감을 찾듯,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사회 질서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을 추적하고 처벌하는 데서 열심이다. 예컨대 노동자들과 활동가들이 집회에 참가했다가 경찰에게 채증을 당해 고초를 겪는 일이 굉장히 많다. 민간인 사찰과 정치 공작도 계속됐다. 또, 보안경찰은 반체제 사상과 좌파 활동가들을 단속하며 표현의 자유를 짓밟아 왔다.

반면,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피해에는 무관심하거나 그 해결에 무능하기 일쑤다. 2018년 불법촬영 항의 운동에서 여성들은 불법촬영물을 찾아내 아무리 신고해도 경찰이 무시와 무성의로 일관해 왔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대우조선 하청노조 파업 진압을 위해서는 경계를 넘어서 경찰력을 지원하지만, 보통 사람이 피해자인 사건에서는 서로 관할 책임을 떠넘기기 일쑤다.

이 모든 일이 경찰 자체의 성격에서 비롯한다.

물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에서 경찰의 권한 행사는 법의 제약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경찰 자체가 그 법의 집행 기관이기도 하기 때문에 조직된 저항이 없다면, 경찰이 마음만 먹으면 법의 제약은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 불법적인 시위 진압이나 인권 침해도 그렇고, 반대로 권력자들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 경찰이 경찰력을 행사하지 않는 경우도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