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김진주 지음):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의 당찬 투쟁과 진정한 피해자 중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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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 김진주 씨(가명)가 범죄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무관심과 부조리한 사법 절차를 몸소 겪고 그에 맞서 싸운 기록을 책으로 냈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범죄 피해자들이 사법 절차에서 경험하는 실제 현실을 생생히 전해 줄 뿐 아니라, 부당한 현실을 바꾸고자 직접 분투한 기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김진주 씨는 본인이 피해자였던 사건에서 수사기관이 간과한 증거들을 직접 발로 뛰며 조사해 진실을 드러내는 데 기여했다. 이 과정이 책에 생생히 묘사된다.
평범한 20대 여성 프리랜서 노동자인 그가 그저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기적인 상황에서 이런 대단한 일을 어떤 ‘전문가’보다 훌륭하게 해 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그 과정을 보면, 보통 사람들이 투쟁 속에서 변하고 엄청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법 시스템에서 소외된 범죄 피해자들
김진주 씨가 범죄 피해자가 돼 경험한 모든 절차에서 피해자는 빠져 있었다. 그의 말대로 “이 사건은 내가 없으면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이지만, 그는 “피해자는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세요”라는 말을 계속 들어야 했다. 그가 겪은 일들은 범죄 피해자들이 부딪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머리를 수차례 짓밟혀 사건 당시 기억을 잃고 실신한 김진주 씨는 간신히 깨어났으나 한동안 하반신이 마비된 채 병원에서 지냈다. 당연히도 그는 도대체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한 건지, 도주 중이라는 범인이 보복하러 오지는 않을지, 잡히기는 한 건지 궁금하고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런 피해자의 처지와 안위에는 무관심했다. 신변 보호도, 수사상황에 대한 기본적 안내도 없었다. 범인이 도주 중이라는 사실과 이후 잡혔다는 소식조차 언론 보도를 통해 사후에 알게 됐을 뿐이다. 김진주 씨의 말처럼 “이 시간 동안 피해자가 얼마나 메말라 죽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는 사고를 당한 것도 억울한데 직장까지 잃었다. 아무 잘못 없는 범죄 피해자가 갑자기 생계 수단을 잃었지만 국가의 대책은 부재했다.
엄청난 병원비도 피해자가 감당해야 했다. 범죄 피해자 구조금이 있지만, 피해자가 병원비를 낸 뒤 복잡한 신청·확인 절차를 거쳐야만 겨우 받을 수 있었다. “진짜 개털도 없는데 왜 바로 지원해 줄 수 없는 건지 답답했다,” “[구조금을] 신청하기도 전에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재판이 잡힌 후에도 피고인(가해자)의 정확한 혐의가 뭔지, 사건이 얼마나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 검찰·법원 사이트에서도 사건 검색이 불가능했다. 뭐라도 알려면 재판에 참석해야 했지만, 재판 출석 시 피해자 보호 조처가 제공되지 않아 무방비 상태로 다녀야 했다.
심지어 김진주 씨는 첫 재판에 가서야 가해자에게 살인미수 혐의뿐 아니라 성범죄 의심 정황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CCTV로 볼 수 없는 사각지대에서 7분의 공백 동안 성범죄가 벌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재판부는 처음에 이에 대한 추가 감정 신청을 기각했지만, 진주 씨는 스스로 진실을 추적해 나갔다.
“피해자는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세요”
그러나 그는 거듭 여러 장벽에 가로막혔다. 사건 피해자로서 사건 기록 열람·복사를 재판부에 신청했으나 거부당했고, 재판부는 그 이유도 알려 주지 않았다.
사건 기록을 보려면 하는 수 없이 가해자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걸어 형사소송 기록을 증거로 신청해야 했다. 단지 형사소송 기록을 보기 위해 비싼 변호사 수임료를 내고 온갖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민사소송을 치러야 하는 현실에 분통이 터졌다.
더 큰 문제는 피해자의 신상정보가 민사소송의 상대방인 가해자에게 노출된다는 점이었다. 가해자의 보복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온갖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김진주 씨는 의문점을 풀고자 발로 뛰었다. 범죄 관련 공부를 하고, 법정 견학을 가고, 사건 기록들을 샅샅이 파헤치고, 위험을 무릅쓰고 공론화를 하고 제보자들과 접촉했다. 결국 진주 씨는 성범죄 혐의를 밝힐 DNA 재검증 허가를 이끌어 내어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됐다.
김진주 씨는 본인의 소송이 끝난 뒤에도 다른 피해자들에게 연대하며 범죄 피해자 처우 개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 책은 그 일환으로, 수사/재판/재판 후 과정에서 구멍이 숭숭 뚫린 범죄 피해자 관련 제도의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대안을 제시한다. 피해자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내용이어서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범죄 사건 피해자에 주목해야 한다
이 책은 ‘피해자 중심주의’의 본래 취지를 상기시킨다. 원래 ‘피해자 중심주의’는 범죄 피해자들이 사법 절차의 가장 중요한 당사자임에도 소외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현실을 개선하고자 제안된 것이다.
형사사법에서는 피해자가 겪은 사건으로 인해 소송이 진행되지만 정작 피해자는 소송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소외된다. 형사사법은 범죄의 본질을 법에 대한 침해로 보고 국가를 피해자로 인식하며 범죄자를 처벌하는 데 주된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죄 피해자는 사건의 당사자이므로 이런 접근법은 바뀌어야 한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기존 사법 절차에서 간과돼 온 피해자의 요구와 권리, 피해자와 그 가족의 치유와 회복을 중시하고 관련 개선책을 제시해 왔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 피해자에 대한 정보통지 및 공판기록 열람·복사 등 알 권리 보장.
- 범죄 피해자의 재판 참석 지원 제도.
- 재판 시 피해자 진술권.
- 피해자 변호인 지원 제도.
- 피해자와 그 가족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각종 지원(신변 보호, 법률 지원, 생계 지원, 의료 지원, 심리적 치료) 등.
김진주 씨도 이와 비슷한 대안을 제시한다.
김진주 씨는 피해자 처우 개선을 위해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한 개선안을 직접 정부 부처 등에 전달하고 공론화하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몇몇 약속을 받아 내는 성과도 남겼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아직 갈 길이 멀다.
국가의 충분하고 지속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훌륭한 대안도 흐지부지되거나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정부의 긴축 재정에 맞서는 투쟁도 필요할 것이다.
김진주 씨의 당부처럼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는지 부족한 점은 없는지 끝까지 지켜보고 응원하자.
피해자 중심주의의 원 취지와 왜곡
앞서 살펴본 피해자 중심주의의 원 취지는 한국 급진 페미니즘 일각에서 통용돼 온 ‘피해자 중심주의’와 다르다. 그간 한국 급진 페미니즘 일각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는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의 인식과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건을 판단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박경신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렇게 지적한다. “[피해자 중심주의의 국제적 원류는] 국내에서 통용되는 피해자 중심주의 즉 범죄 발생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피해자의 말을 가해자의 말보다 신뢰해야 한다거나 성폭력 발생에 대한 입증 책임을 가해자에게 전환하여 성폭력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입증해야 무죄가 되는 법리와는 거리가 있다.”(‘미투 운동이 극복해야 할 피해자 중심주의’, 《문학동네》 2018년 여름 통권 95호)
이렇게 왜곡된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 주장의 검증 자체를 터부시하거나, 진상조사와 사실 확인, 당사자의 소명과 합리적 문제 제기조차 ‘2차가해’로 모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종종 정치적 경쟁 상대나 이견자를 배척하는 수단으로도 악용됐다.
심지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나 성평등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우파 정치인들이 정적 제거를 위해 이 개념을 위선적으로 이용하는 일도 벌어진다.
이는 진실을 경시하게 만들고 꼭 필요한 논의마저 봉쇄하는 역효과를 낳는다. 그래서 성폭력과 2차가해에 반대하는 사람들 중 다수도 왜곡된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규정과 그 적용에 회의감을 갖게 됐다.
이런 방식은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정의와 거리가 멀다.
한편, 우익들은 피해자 중심주의를 사형 집행 부활 등 엄벌주의를 추진하는 데 이용하려 한다.
그러나 사형제는 ‘국가가 저지르는 또 다른 살인’으로 유엔도 폐지를 권고하는 불합리한 형벌이고, 흉악 범죄를 줄이지도 못한다.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복수심을 충족시켜 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