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난 세수, 대체 어디로 흐르길래:
소방 예산 삭감, 비정규직 처우 개선 요구 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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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 인건비의 국비 지원을 확대하는 법안들이 잇따라 발의되고 있다. 소방관이 목숨을 잃고 “재정 빨대” 발언에 비판이 쏟아진 뒤에야 지원 확대가 비로소 논의되는 것이다. 세수가 역대 최대라는 마당에 말이다.
소방만이 아니다. 학교비정규직, 돌봄노동자, 공공기관 하청 노동자들의 임금과 처우 개선 요구도 예산의 벽에 가로막혀 있다.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기본급을 인상하라는 요구를 거부당해 11월 말 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돌봄노동자들은 반년 동안이나 노정 교섭을 하며 임금 등 처우개선안을 마련했지만 정작 예산안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공공기관 하청 노동자들은 식대·명절상여금 차별을 없애라고 요구하고 있다.
반도체 호황으로 경상수지는 역대급 흑자를 기록했고, 국세수입도 역대 최대 규모로 걷힐 전망이다. 올해는 애초 예상보다 약 63조 원이, 내년에는 올해 추경보다 169조 원이 더 걷힐 전망이다. 돈이 없는 게 아니다. 그럼 대체 이 늘어난 세수는 어디로 흐르나.
늘어난 세수의 가장 큰 몫은 당장 쓰이지 않는다. 정부는 미래대응기금에 100조 원 넘는 여유 자금을 쌓아 두고, 대부분은 금융기관에 예치할 계획이다. 결국 자본 축적을 뒷받침할 화폐 자본으로 돌리는 셈이다.
국힘은 “팽창 예산의 폭주”라며 정부 예산을 공격했지만 억지 비난이다. 오히려 정부가 세수로 들어오는 돈에 비해 매우 짜게 돈을 풀고 있는 것이 문제다.
내년 국세수입은 올해 본예산보다 약 50퍼센트 늘지만, 정부 지출은 12.8퍼센트 늘리는 데 그친다. 수입과 지출 증가폭을 비교하면 “긴축 예산”이라고 해야 어울릴 정도다(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연구위원).
그나마 풀리는 돈이 먼저 대규모로 향하는 곳은 기업 지원과 국방비 증액이다. 산업·중소기업·에너지 예산은 약 30퍼센트 늘린다. 메가프로젝트와 AI 지원 예산은 거의 두 배로 늘었다(21조 3천억 원). AI에 필요한 대규모 컴퓨터 자원을 확보하고 활용하도록 지원하는 사업도 두 배 넘게 늘린다. 기업들이 국제 경쟁에서 앞서가는 데 필요한 비용에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돈을 대는 것이다.
국방예산도 올해보다 8.2퍼센트 늘려 최근 20년 사이 가장 큰 폭으로 증가한다. 특히 무기 도입·개발에 쓰이는 방위력개선 예산은 13.8퍼센트나 늘려 역대 최대 증가폭이고, 핵잠수함 건조 예산도 처음 반영됐다.
반면, 고령화와 물가 상승 반영으로 자연 증가분 몫이 큰 사회복지 예산은 9.4퍼센트 증가에 그친다. 전체 지출 증가율(12.8퍼센트)에도 못 미친다. 고용 분야는 3.1퍼센트, 노동 분야는 3.5퍼센트 느는 데 그쳤다.
반대로 정부는 호황 세수가 저절로 흘러가던 통로는 막았다.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에 나눠 주는 보통교부세(지방정부가 용도를 자율적으로 정하는 지방교부세)는 정부가 늘어난 세수의 상당 부분을 기금으로 돌리면서 겨우 2퍼센트 늘었다. 기금으로 돈을 돌리지 않았다면 약 47퍼센트가 늘어날 수 있었다. 오히려 지방정부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방의 공공서비스는 돈이 부족해 휘청거리고 있다. 경기도의료원 노동자들은 추미애의 긴축으로 임금 체불을 걱정하고 있다. 결국 경기도의료원은 연말 급여 지급에 부족한 돈을 은행에서 대출하기로 했다. 중앙 정부는 100조 원 넘게 쌓아 두고, 공공병원은 월급 줄 돈을 빚으로 메우는 꼴이다.
교육에 쓰이는 교육교부금도 내국세 연동을 없애, 돌아가는 몫을 대폭 줄이려 한다.
보건의료단체연합은 역대 최대 세수가 걷히는데도 건강보험에서 국가가 마땅히 내야 할 몫도 채우지 않는다고 비판했다(법정 기준 20퍼센트에 14.4퍼센트 편성). “나라 곳간에 넘치도록 쌓인 돈을 기업에 퍼주고도 다 쓰지 못해 남겨 뒀는데, 건강보험에 쓸 돈은 없다고 선언한 셈이다.”(보건의료단체연합)
정부는 지출 증가율도 내년 12.8퍼센트에서 이후 9퍼센트, 7퍼센트, 5퍼센트로 낮춰 갈 계획이다. 세수가 넘칠 때도 노동자들의 요구를 뒤로 미루면서, 앞으로는 지출 확대 속도마저 늦추겠다고 미리 공언한 것이다.
진보당의 “초과세수는 불평등 타파에” 운동에 대해
진보당은 초과세수를 “불평등 타파”에 쓰라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10월 31일에는 서울 도심에서 민생회복 시민대회를 연다. 늘어난 세금을 기금으로 쌓아 두지 말고 불평등 해소에 쓰라는 요구 자체는 옳다. 진보당은 청년 일자리 확충, 공공임대주택 100만 호 공급, 돌봄·의료·간병 국가책임제 등 불평등 해소를 위한 6대 요구안도 내놨다.
이 요구를 실현할 방안으로 진보당은 ‘100조 위원회’를 제안한다. 김종훈 대표가 당대표 선거 때부터 내놓은 것으로, 여야 정당과 시민사회가 초과세수의 쓰임새를 함께 논의해 국회의 예산·기금 심의에 반영하자는 것이다. 국회 주도 사회적 대화 기구를 통해 정부의 재정 배분을 바꾸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요구가 밀리는 것은 돈의 쓰임새를 논의할 자리가 없어서가 아니다. 국가가 늘어난 세수 상당 부분을 금융기관에 맡겨 두고(자본 축적을 뒷받침하는 화폐자본으로 돌리는 것이다), 기업 투자와 군비 증강을 앞세우며, 일자리와 복지에 인색한 것은 근본에서는 자본주의 국가가 경쟁을 위한 자본 축적의 필요를 뒷받침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AI, 군비 등을 둘러싸고 국가 간 경쟁이 격화하는 오늘날 각국 대자본들에게 국가의 개입과 지원은 더한층 중요해지고 있다.
그래서 사회적 대화로 국가 예산의 우선순위를 획기적으로 바꾸기란 재정에 여유가 있을 때조차 쉽지 않다. 정부와 자본가들은 위기에 대비해 차라리 돈을 쌓아놓는 것을 선호한다. AI 거품이 꺼지고 세수가 줄어드는 상황이 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결국 관건은 아래로부터 투쟁이다. 지금 프랑스 등 유럽에서 번지는 반란도 열악한 처지로 내몰려 온 청년·학생·노동자들이 사람들의 삶보다 기업과 군비 증강을 우선하는 예산, 즉 기성 체제의 우선순위에 대한 항의이다.
그런데 진보당은 그런 저항 정신과 애써 거리를 두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도 유럽처럼 사회적 갈등이 임계점을 넘어 폭발하기 전에 정부가 선제적으로 나서 갈등을 줄여나가는 정치를 펼쳐야 한다.” 강조점이 저항 운동 건설이 아니라 첨예한 계급 갈등 예방에 있는 것이다.
진보당은 올 상반기 삼성전자 임금 투쟁을 지지하지 않았다(물론 정부 탄압에는 반대했다). 그 초과 세수를 만들어낸 주역이었고, 그 주된 공장이 김재연 당시 대표가 출마한 선거구에 있었는데 말이다.
또한 진보당은 이번 캠페인에서 군비 증강 예산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다. 진보당은 주한미군 역할 확대, 이란 전쟁 파병 등에 반대와 비판 목소리를 내왔지만, 이재명 정부의 하위제국주의 지향 정책은 일관되게 반대하지 않아 왔다. 남북 무기 경쟁의 하나인 이재명 정부의 초음속미사일 시험을 비판하지 않은 것도 그런 경우의 하나다. “자주 국방” 논리를 수용하는 탓이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증대하고 있는 군비 증강 경쟁은 보통 사람들에게 쓸 돈을 갉아먹고 군사 긴장을 키우는 중요한 문제다. 불평등을 낳는 국가의 우선순위를 문제 삼으려면 군비를 빼놓아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