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사회주의자가 말하는:
사도광산과 일본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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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같은 제목으로 열린 4월 21일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제문이다. 공동 발제자였던 한국인 사회주의자의 발제문 기사를 함께 읽으시오.
안녕하세요. 하세가와 사오리입니다. 저는 사도광산에 대한 일본 내 논의를 중심으로 말씀 드릴까 합니다. 일본에서도 많은 보도가 나오고 있는데요.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주로 조선인 노동자 문제입니다.
일본 정치인들과 주류 언론의 기본 입장은, 사도광산의 조선인 노동자는 일본인 노동자와 같은 대우를 받았고 강제징용 사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상은 “강제징용이 있었다는 한국 측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아베 신조 전 총리도 “강제 노동이라고 할 수 없다”, “역사전쟁팀을 꾸려 일본의 자랑과 명예를 지켜나가겠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제1 야당인 입헌민주당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도광산이 위치한 지역의 마을 역사서나 당시 광산을 운영한 사도광업소가 작성한 자료에 기록된 조선인 노동자의 모습은 그런 주장과는 크게 다릅니다.
조선인 ‘모집’의 동기
마을 역사서에 따르면, 사도광업소는 1939년 2월에 처음으로 조선인 ‘모집’을 시작했는데요. 당시 노무과 직원이었던 한 관계자는 조선인 모집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 “내지인(즉 일본인) 광내 노무자 중에 규폐를 앓고 있는 사람이 많아 출광 성적이 좀처럼 늘지 않는 데다 내지의 젊은이들을 잇따라 군대에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증언했습니다.
규폐는 광산을 채굴할 때 나오는 석영(石英) 분진을 흡입함으로써 생기는 폐질환입니다. 사도광산의 모석(母石)에는 석영이 많이 함유돼 있어 노동자들이 규폐에 걸릴 확률이 높았습니다.
이처럼, 전쟁과 규폐로 인한 인력 부족을 조선인 노동자로 채우려 했다는 점에서 제국주의적 동기와 조선인 차별이 잘 드러납니다.
조선인 노동자의 처지
사도광업소는 1940년 2월 ~ 1942년 3월에만 6번에 걸쳐 총 1005명의 조선인 노동자를 모집했는데요. 사도광산 조선인 노동자의 처지를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① 조선인 노동자들이 어떤 업무를 담당했는지는 사도광업소가 1943년에 작성한 『반도 노무 관리에 대하여(半島労務管理ニ付テ)』라는 자료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43년 5월 자료를 보면, 조선인이 주로 맡은 일은 바위에 구멍을 뚫는 착암이나, 기둥 등이 무너지지 않게 받치는 지주 작업이나 운반처럼 주로 갱내에서 하는 위험한 작업이었습니다.
당시 광산에 종사한 관계자도 “내지인 노동자들은 주로 해안에서 자갈을 수집하는 작업에 종사했고, 노동조건이 열악한 갱내 채굴 작업은 주로 조선인이 맡았다”라고 증언하고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이런 기록을 보면, 조선인이 일본인과 대등했다거나 차별이 없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② 임금 면에서도 아베 전 총리 등의 주장은 ‘팩트’와 거리가 멉니다. 조선인 노동자도 일본인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나이 경험, 업무 종류, 난이도 등을 고려해 책정한 단가에 따라 급여를 받았고, 급여 외에 각종 상여금이 부여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조선인 노동자는 대부분 농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 제도는 아무래도 조선인에게 불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노동자들은 식비와 침구류 이용비, 작업에 필요한 물건마저도 자기 돈으로 부담해야 했습니다. 저축 장려라는 이름으로도 급여에서 돈이 공제됐습니다. 그래서 노동자들 수중에는 돈이 거의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③ 게다가 조선인 노동자는 원래는 2~3년 일하고 귀국하기로 ‘계약’을 하고 사도광산에 왔지만, 사측은 조선인 노동자를 돌려보낼 마음이 없었습니다. 1943년에 사도광업소가 직접 작성한 문서에는 “국가적 필요성을 충분히 헤아려 어떻게든 전원 계속 일을 시키도록 할 것”이라는 방침이 명시돼 있습니다.
사측이 작성한 ‘관리 방침’에는 “도망 방지”라는 항목도 있는데요. 조선인 노동자는 미쓰비시 광업 노사협조기관인 교와카이(協和會), 반관반민 기관인 광산통제회, 특별고등경찰이라는 세 기관의 촘촘한 감시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당시 작성된 자료와 마을 역사 기록 등을 볼 때, 조선인 노동자 동원이 ‘모집’이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강제 노동에 가까웠음을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강제징용은 없었다거나 조선인 차별이 없었다는 말은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일본의 국회 토론 등에서 ‘16세기부터 19세기 사이의 유물로 시기를 한정해 유네스코에 추천했기 때문에 [사도광산 등재 추진은] 한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하지만 20세기에 사도광산에서 벌어진 일을 무시한 채 세계유산으로 추천하는 것은 조선인 노동자를 차별하고 혹사한 역사를 정당화하는 행위입니다.
일본인 노동자도 가혹한 착취와 억압에 시달렸다
게다가 사도광산의 역사는 조선인 노동자가 투입되기 전부터 착취와 억압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도광산 채굴이 본격화된 것은 1542년부터인데요. 그때부터 일본인 노동자들은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노동자들은 대체로 단명했다고 합니다. 1943년부터는 광산 근교에 거주하는 일본인 학생, 노동자, 부인회도 동원됐습니다.
사도광산을 소유한 미쓰비시광업이 운영한 다른 광산, 예를 들어 홋카이도 미쓰비시 비바이 탄광에서도,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노동자들이 비인간적인 노동 현장에서 업무에 시달렸습니다.
이러한 가혹한 노동사를 무시한 채 광산의 과학기술 역사에만 주목해 ‘일본의 귀중한 유산’ 운운하며 찬양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가사키의 군함도 문제도 마찬가지인데요. 가혹한 노동을 강요받은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의 역사를 밝히고 기억하는 것이 유네스코의 취지에도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수이지만 의미 있는 일본 내 목소리
마지막으로 일본에도 진실 규명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2000년대 초에 사도광산 문제에 주목해 조선인 문제에 대한 논문을 쓴 히로세 데이조 교수를 비롯한 학자, 언론인, 시민들이 있습니다. 소수이긴 하지만, 일본 국가가 저지른 어두운 역사를 기억하며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1960~1980년대에는 탄광 노동조합이 전쟁 중의 노동 실태를 밝히거나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전개하는 등 활발한 운동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사회에 영향을 끼칠 만한 운동이 없다는 것이 아쉬운 점인 것 같습니다. 노동자들, 특히 미쓰비시 노동자들이 현재의 노동조건 문제와 더불어 과거사까지 꼬집으며 운동을 건설하면 효과가 있을 텐데 말입니다.
향후 그런 움직임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한국의 노동자들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자리가 그런 움직임을 돕는 작은 발판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