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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사회주의자가 말한다 — 관동 대지진과 학살 100년
일본 국가가 조선 노동자와 일본 사회주의자의 연대를 파괴하려고 학살을 저지르다

1923년 9월 1일 대지진이 도쿄 등 관동 지역을 강타해 재앙이 덮쳤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올해는 일본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이 발생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일본과 한국에서 이러저러한 조사·연구가 시도되고 있지만 여전히 밝혀야 할 것이 많다. 사회주의자들과 관련된 것도 그중 하나다.

1923년 9월 1일 일본을 강타한 관동대지진은 사망자 약 10만 명, 주거 소실자 200만 명이 넘는 일본 역사상 유례없는 재앙이었다. 하루아침에 인구와 주요 시설이 집중된 수도권이 붕괴함에 따라 일본 사회는 혼돈에 빠졌다.

이런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탔다’, ‘조선인이 방화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며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명백한 국가 범죄

당시 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일본 정부와 군부·경찰은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를 적극 퍼뜨리고 불안한 민심을 부추겼다.

경찰과 지방행정을 관할하는 관청인 내무성은 9월 3일 아침 경보국장 명의로 일본 전역의 부(府), 현(縣) 지사에게 해군 무선 송신망을 통해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하고’ ‘폭탄을 소지하고’ 있는 자도 있기 때문에 ‘도쿄부에서 일부 계엄령을 시행했다’, ‘각지에서는 선인(鮮人) 행동에 대한 엄밀한 단속을 실시하라’는 지령을 보내 조선인 단속을 명령했다.1

이에 따라 각 현청은 지자체에 지시해 민간조직인 자경단(화재나 도난 따위의 재난, 비상사태에 대비해 민간인이 조직한 경비단체)을 만들게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경단 대원들은 군부와 경찰의 주도하에 수많은 조선인을 학살했다.2

조선인 폭동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점이 밝혀진 후에도 정부와 군부·경찰은 폭동 사실을 날조하는가 하면, 학살 사실을 숨기려고 시신을 유기하는 등 악행을 거듭했다.3 최신 연구에 따르면 확인된 조선인 희생자 수만 6644명에 이른다.4

군부와 경찰의 총칼은 일본인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도 겨냥했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초기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히라사와 게이시치(平沢計七)와 가와이 요시도라(川合義虎) 등을 포함한 10명이 경찰에 체포돼 사살당했다.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栄)도 6살 된 조카와 부인과 함께 헌병대에 의해 살해당했다.5 ‘사회주의자가 폭동을 일으켰다’, ’혁명가를 부르며 집에 불을 지폈다’와 같은 근거 없는 유언비어에 속은 사람들이 학살에 가담했다.

일본 정부는 관동대지진 발생 직후부터 최근까지 학살 증거를 은폐하고 사실을 부인해 왔다. 심지어 이를 비판하고 피해자를 추모하는 운동을 탄압하기까지 했다.

운동의 성장이 두려웠던 일본 정부

관동대지진 때 벌어진 학살은 일본 지배계급이 국내의 경제적·사회적 위기와 식민지에서의 저항을 억누르고자 저지른 만행이었다.

제1차세계대전 이후 찾아온 경제 불황으로 대중의 불만이 급증하는 가운데 사회주의 운동이 성장하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을 통해 탄생한 소련의 존재도 운동의 불쏘시개 구실을 했다. 일본 정부는 사회주의 운동을 자본주의와 천황제를 뒤흔드는 위협으로 간주하고 극도로 경계했다.

더욱이 1915년 대만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인 ‘타파니 사건’, 1919년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 등 항일독립투쟁이 식민지에서 나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반식민 투쟁은 일본 제국주의 심장부인 도쿄에서도 일어났다. 3·1 운동 전부터 도쿄에서는 조선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항일독립운동이 벌어졌으며 3·1 운동 이후에는 그 기세가 더욱 거세졌다.6

1920년 이후에는 재일 조선인들과 일본인 사회주의자·아나키스트와의 접촉이 점차 늘어났다.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규합하고자 만든 ‘코스모구락부(コスモ倶楽部)’ 집회에는 매번 수많은 조선인이 참여했다고 한다.7

식민지 해방과 일본인-조선인 간 연대를 호소하는 운동도 성장했다. 1922년 1월 코민테른이 모스크바에서 개최한 극동민족대회에서는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가 가타야마 센(片山潜) 등이 참여해 식민지 해방을 지지했다. 또한 1920년부터 시작된 일본 메이데이 행사에는 일본인 노동자와 연대하고자 참여한 조선인들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22년 니가타현 수력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학살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일본인 노동자들에게 조선인 노동자와 연대할 것을 호소했다. 이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벌인 최초의 ‘대중적’ 연대였다.8 당시 발간된 “전위(前衛)”(사실상 일본 공산당의 기관지였다)에는 ‘일선[일본과 조선] 노동자의 단결(日鮮勞動者の團結)’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일본의 노동운동이 선인(鮮人)9 노동자와 굳게 손잡고 착취자에 대한 공동전선을 확립하지 않는 한 일본 자본가들은 선인 노동자를 이용해 노동운동 전선을 교란시키려 할 것이다. … 무산계급인 우리에게 선인 노동자는 동료이자 형제이자 전우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싸워야 할 공동의 적이 있다. … 국경도 인종도 없는, 무산계급 입장에서 이 사건(니가타현 조선인 학살 사건)에 항의해야 한다.”10

이 사건을 계기로 무산계급 단결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고 조선인·일본인의 연대가 확대되는 것을 위협으로 느낀 일본 정부는 법을 앞세워 점차 탄압을 강화해 나갔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기 딱 넉 달 전인 1923년 메이데이 집회에서는 전례 없는 대규모 탄압이 이루어졌다.

메이데이 집회에서 조선인 사회주의자와 노동자, 일본인 사회주의자와 노동자 사이에 식민지 해방을 위한 본격적인 연대가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집회에 참가한 많은 조선인이 경시청 관계자에게 폭행을 당했고 검거자도 과거에 비해 훨씬 많은 195명을 기록했다. 그야말로 관동대지진 학살의 전야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민간인의 학살 가담은 일본 국가와 자본가들의 분열 지배가 작용한 것

군부와 경찰 등 정부 기관이 학살을 저지르고 증거를 인멸한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밝혀졌다. 하지만 일반 민중까지 이 학살에 가담한 배경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점이 남아 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연구한 야마다 쇼지(山田昭次)는 당시 일본 국가가 국가주의와 군국주의를 일본인들에게 고취시키면서 의도적으로 민족 차별 의식을 부추긴 것을 주요한 배경으로 설명한다.

메이지 초기 정한론을 주창하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국가주의와 군국주의 아래 나머지 아시아 국가에 대한 우월감과 차별 의식을 국민에게 심었다. 나아가 한국을 강제 병합하면서 일본이야말로 문명 개화의 선진국이라는 우월감을 조성하고 조선인을 열등한 존재로 간주하고 차별하는 의식을 부추겼다.11

정부와 함께 조선인에 대한 혐오와 대립을 심화시킨 것은 바로 자본가들이었다. 제1차세계대전 중 일본 자본주의는 유럽에서 일본 공산품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급성장했다. 수요가 늘어난 방직, 직물, 석탄, 중공업 분야에서 노동력 부족을 메우려고 저임금으로 고용할 수 있는 조선인 노동자를 모집하는 자본가가 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 정부가 시행한 ‘토지조사사업’ 등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이 생계를 위해 중국 간도 지방이나 일본으로 이주하고 있었다.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 노동자들이 꺼리는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노동 현장에 투입돼 차별적 임금을 받으며 일했다.

제1차세계대전으로 찾아 온 호황이 오래가지 못하고, 이후 만성적 불황에 대응하려고 자본가들은 저임금 조선인 노동자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고용했다.

일본인 비숙련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원래 일하던 영역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투입됨에 따라 그들을 경쟁 상대로 보기 시작했는데, 일본 자본가들은 임금 하향 평준화를 목적으로 그런 질시와 경쟁을 부추겼다. 불황으로 살림살이가 피폐해진 상황에서 이런 민족 이간질은 더 심해졌다.12

이런 상황에서 대지진의 혼란이 정부에 대한 분노로 돌아올까 봐 일본 군부와 경찰이 조직적으로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탔다’거나 ‘조선인이 방화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려 민족 간 증오를 부추기며 학살에 동원하거나 또는 그렇게 하도록 부추긴 것이다.

즉, 일본 민중 일부가 조선인 학살에 가담한 배경에는 이윤에 눈이 먼 일본 자본주의와 그것의 또 다른 얼굴인 일본 제국주의가 있었다.13

조선인을 보호한 사람들

그러나 험악한 상황에서도 조선인을 보호하고 도우려고 애쓴 일본인들이 있었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조선인 박해를 비난하고 조선인을 보호하는 것은 당시 일본의 사회주의자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는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몇몇 사람들이 소규모로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시작한 시기여서 노동계급에 영향력이나 기반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지진 발발 후 지역 유력자들이 주민을 조직해 만든 자경단에 대항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회주의자들은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노동운동을 이끌던 난카쓰 노동회(南葛労働会)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자 미나미 이와오(南巌)는 이웃 사람들의 상궤를 벗어난 흥분을 진정시키려고 유언비어가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점을 끈질기게 설득했다고 한다.

일본 도쿄도 스미다구에 위치한 관동대학살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출처 100nyeon-housenka

이와오의 형이자 당시 사회주의자 학살 사건에서 희생된 요시무라 코지(吉村光治)도 폭주하는 마을 주민들에게 유언비어가 사실무근이라는 점을 설파하고, 재해방지조사회를 꾸리며 누구 하나 무기를 들지 못하도록 진력했다. 일상적으로 조선인과 교류하며 일정한 인간 관계가 있던 일부 일본인 중에도 자경단으로부터 조선인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 지배계급은 이런 일본인과 조선인의 새로운 연대가 두려웠을 것이다. 국경과 민족을 초월한 연대와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을 주장하는 사회주의가 그런 연대의 다리가 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일제의 관동대지진 대응에서 사회주의자 탄압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관동대지진이 발발한 직후 일제는 ‘불량한 사상을 가진 자’를 단속해야 한다며 ‘치안 유지를 위한 벌칙에 관한 건(治安維持ノ為ニスル罰則ニ関スル件)’이라는 칙령을 만들어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했다. 이 칙령이 바로 악명 높은 치안유지법의 전신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8월 15일 윤석열은 광복절 기념사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기시다 정부를 “파트너”라 불렀다. 일본 총리 기시다 후미오도 종전기념일에 아시아에서의 전시 침략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관동대지진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고이케 유리코 현 도쿄지사는 과거 매년 9월 1일 조선인 추도식에 보내던 추도문조차 2017년 이후 중단했다. 극우 인사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지사도 했던 소소한 위로마저 거부한 것이다.

현재 한일 양국의 지배계급은 이런 역사를 은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민중을 죽음으로 몰고 갈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윤석열은 일본에 있는 미군기지 7곳을 한국 안보의 후방기지라 부르면서 한일 군사 협력을 강화하려고 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새로운 시장과 자원을 찾는 국가 간 다툼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이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어느 시대나 재난은 (처음엔 자연재해로 시작될지라도) 이주민이나 여성, 어린이 같은 약자를 필두로 평범한 시민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 전쟁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세계 정세가 요동치는 지금, 우리는 노동계급이 국경과 인종에 관계없이 단결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질서라는 공통의 적에 맞설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100년 전 사회주의자들이 호소했던 것처럼 말이다.


  1. 編 姜徳相, 琴秉洞, 『現代史資料 関東大震災と朝鮮人』, みすず書房, 1963.11, 18쪽↩︎

  2. 警視庁, 「第五章 治安保持」『大正大震火災誌』, 1925, 455쪽-504쪽↩︎

  3. 조선인에 관한 유언비어가 사실무근이었다는 사실이 9월 3일 공식적으로 인정된 후에도 군대와 경찰에 의한 학살은 멈추지 않았다. 언론을 통제하면서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가 사실이 아님을 밝힌 글은 전문 삭제하는 등 상황을 묵인, 악용했다.↩︎

  4. 「コラム 殺傷事件の検証」, 『災害教訓の継承に関する専門調査会報告書 平成21年3月 1923 関東大震災【第2編】』, 內閣府災害教訓の継承に関する専門調査会, 2009, 218-221쪽↩︎

  5. 加藤文三, 『亀戸事件―隠された権力犯罪』, 大月書店, 1991↩︎

  6. 「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亀戸事件. 軍·警察、扇動された自警団が実行 戒厳令下での国家犯罪―「緊急事態条項」の危険示す」, 『日本共産党しんぶん赤旗 2016年特報』, 2016.9.2 https://www.jcp.or.jp/akahata/aik16/2016-09-02/2016090203_02_0.html↩︎

  7. 松尾尊兌, 「コスモ俔楽部小史」, 『京都橘女子大学研究紀要』, 京都橘女子大学研究紀要 編集委員会 編, 1999, 19-58쪽↩︎

  8. 「歴史を捉える目⑪ 新潟県水力発電所工事現場での朝鮮人労働者虐殺に抗議 1922年ー初の日本人と朝鮮人の大衆的な連帯のたたかい」, 『平和新聞 杉並版』, 日本平和委員会, 2019.6.15.↩︎

  9. 일본인과 조선인이 동일한 대우를 받는 사회를 요구하는 사회주의자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선인(鮮人)이라는 차별적 용어를 쓰고 있는 한계가 보인다.↩︎

  10. 「日鮮勞働者の團結」, 『前衛』, 1922, 78-79쪽↩︎

  11. 山田昭次, 『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その国家責任と民衆責任』, 創史社, 2003, 122-172쪽↩︎

  12. 松村高夫, 『被ばく朝鮮人の歴史と現在に寄せて』, Group Gendai Films, 2022.8 / 大和田茂, 「沢計七における中国·朝鮮人労働者問題:関東大震災前夜、戯曲「非逃避者」の意味するもの(特集 一九二〇年前後 東アジア)」, 『初期社会主義研究』, 2021, 75-91쪽↩︎

  13. 山田昭次, 『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その国家責任と民衆責任』, 創史社, 2003↩︎

하세가와 사오리 씨는 한-일 통번역사이자 인하대학교 의대 박사후연구원이고,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731부대》의 공역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