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제국주의 관점에서 보는 일본 사도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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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가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이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시도는 1999년부터 시작해 2014년
이 프로젝트는 석탄
일본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일찍 메이지 시대에 산업화를 이뤘다. 일본 지배자들은 그 덕분에 식민지로 전락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일본이 식민 지배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일본의 산업화 성공 과정과 전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이었다. 청일 전쟁, 러일 전쟁 그리고 제1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일본은 선진 자본주의로 도약했다. 이 과정에서 대만
일본 지배자들과 우익이 이 시기의 역사를 다시 쓰고 문화유산으로 등재해 위상을 높이려는 시도에는 장기 침체를 극복하고 과거의 제국주의적 영광을 재현하자는 애국주의 호소가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실 내용은 오늘날 일본도 군사대국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전쟁을 일으킬 수 없도록 규정된
전쟁에 짓밟혔던 한·일 민중
일본 지배자들이 새로 쓰려는 역사에는 자본 축적과 기술 혁신의 신화만 있을 뿐, 피로 물든 착취와 억압의 역사는 완전히 삭제돼 있다.
한국 언론들이 많이 다뤘듯이 조선인, 중국인 강제동원에 대해 일본 정부는 배상이나 사과는커녕 강제동원 사실 자체를 은폐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일본 지배자들이 은폐하려는 역사에는 초기 산업화 과정이나 전쟁기에 일본 노동자들이 겪었던 생지옥도 있다.

가령 미쓰비시가 운영했던 다카시마 탄광에서 1906년 사고가 발생해 307명이 목숨을 잃었다. 진폐증을 비롯한 크고 작은 산업재해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런데도 미쓰비시는 1890년대 청일 전쟁과 국책 사업에 힘입어 사도광산을 인수하는 등 탄광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다.
미쓰이가 운영했던 미이케 탄광은 가혹한 재소자 노동에 기초해 성장했고, 이후에는 일본인 노동자들을 노예처럼 가둬 놓고 일하게 해, 전쟁 시기에는 1년에 300만 톤이 넘는 석탄을 생산했다.
일본 국가와 기업들은 1930년대 후반부터 전쟁 총동원에 따른 노동력 부족으로 조선인 등 식민지 강제동원에 본격 착수했다.
여기에는 일본인 노동자들의 건강이 너무 악화돼 생산 실적이 부진했던 점과 함께 노동자들 사이에서 켜켜이 쌓인 불만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탄광 노동자들의 저항은 계속 벌어졌다. 1897년 다카시마와 하시마에서, 1918년에는 미이케 만다 갱에서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했다. 파업 진압을 위해 군대까지 출동했을 정도다.
1924년에도 미이케에서는 제작소와 여러 갱에서 잇따라 파업단이 조직돼 투쟁이 일어났다. 당시 그 지역 노동자 1만 9000명 중 6800명이 파업에 참가했다고 한다.
1945년 10월에는 패전 후 첫 노동자 소요가 조선인과 중국인 광부들 사이에서 일어났는데, 이 투쟁은 곧 일본인 광부들에게도 번졌다.
이처럼 일본 제국주의와 침략 전쟁은 결코 일본인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전선의 전방과 후방에서 마른 걸레 쥐어짜듯 착취당했던 대다수 일본 노동자들의 처지는 조선인 노동자들과 더 가까웠다.
제국주의 vs 노동계급 국제주의
지금 일본 정부가 벌이는
그러나 오늘날 일본이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전쟁을 벌일 수 있는 국가로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은 결코 평범한 일본인에게 이익이 아니다.
한편,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더는 억압하는 나라와 억압받는 나라의 관계가 아니다. 두 국가는 지난 60년간 미국 제국주의에 협력하는 것을 핵심 고리로 긴밀하게 엮여 왔다. 특히, 그 속에서 한국 자본주의는 세계 10위권으로 성장했다. 성장
그래서 한국 지배자들은 일본 정부에 항의하는 듯하다가도 결국 양보하곤 했다.
그래서 위안부
삐걱거리기도 하지만 완전히 해체된 것도 아닌 한
제국주의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서는 계급적이고 국제주의적인 관점에 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