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IST
제국주의 내란 청산과 극우 팔레스타인·중동 이재명 정부 이주민·난민 긴 글

12.3 쿠데타 미수 1년 10개의 주요 순간

2024년 12월 3일, 쿠데타의 밤

윤석열은 친위 군사 쿠데타를 통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1988년 이전의 권위주의 통치를 되살리려 했다. 정부 반대파들을 “수거”하고 좌파를 “척결”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그러나 비상계엄이 선포되자마자 보통 사람들 수천 명이 국회로 달려갔다.

시민들은 국회의사당에 진입하려는 계엄군을 막으려고 놀라운 투지와 용기를 발휘했다. 군 수송 차량들을 에워싸고, 바퀴 앞에 연좌하고, 소총과 야간투시경으로 무장한 계엄군을 맨몸으로 붙잡았다. 무장부대 헬기들이 국회 경내로 날아들어가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불어나고 있었다.

계엄군 일부는 시민들의 육탄 저지에 막혀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가까스로 들어간 계엄군들도 사기가 저하됐다. “문을 부숴서라도 총을 쏴서라도 끌어내라” 한 윤석열의 명령은 먹히지 않았다.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일찍 잠을 청하려던 회사원, 일하러 집을 나서던 대리운전 노동자, 책에서 본 1980년 5월 광주를 떠올리며 온 대학생, 내가 죽어도 젊은 사람들은 독재를 겪지 않게 하겠다고 계엄군 차 앞에 주저앉은 할머니 등 평범한 사람들의 용감한 저항 덕분에 국회는 계엄 해제를 결의할 수 있었다.

국회에서 계엄 해제 결의안이 통과되고도 시민들은 혹시 있을지 모를 2차 계엄 선포에 대비해 아침이 될 때까지 국회의사당 앞을 떠나지 않았다.

쿠데타를 저지했다는 기쁨과 안도감, 그러나 윤석열이 이내 반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교차한 12월 4일 새벽의 분위기는 이후 반 년 넘게 더 이어진다.

보통 사람들의 용감한 저항이 쿠데타를 저지했다 ⓒ이미진

윤석열 국회 탄핵이 가결되다

12월 14일 윤석열 탄핵소추안이 가결돼 쿠데타 미수 사건 열흘 만에 윤석열에게서 대통령 권한을 빼앗았다. 윤석열이 2차 계엄 의도를 감추지 않고 있을 때였다.

대중의 환호가 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 국회를 에워싼 수십만 명은 온갖 팻말과 형형색색의 응원봉을 흔들며 윤석열의 직무정지를 환영했다.

쿠데타 미수 직후인 12월 7일 국회 탄핵 표결은 국민의힘의 불참으로 정족수에 미달해 투표 자체가 성립되지 못했다. 그러자 일주일 만에 갑절 넘는 사람들이 국회 앞에 모였다. 이 기세가 국힘 의원 일부를 탄핵 표결에 참가하게 만든 것이다.

청년들의 집회 참가가 두드러졌다. 계엄과 쿠데타를 역사책에서나 보던 일로 여기던 청년 세대는 윤석열의 쿠데타 기도와 1차 국회 탄핵 불발을 겪으며 빠르게 정치화했다. 여러 대학 학생총회에서 윤석열 퇴진 요구가 채택됐다.

하지만 탄핵안 가결은 쿠데타 세력과 극우에 맞선 전투의 새 국면의 시작이었다.

청년 세대는 윤석열의 쿠데타 기도와 1차 국회 탄핵 불발을 겪으며 빠르게 정치화했다 ⓒ이미진

윤석열 체포를 둘러싼 양극화

국회 탄핵, 국방장관 김용현과 계엄군 출동 사령관들이 체포·구속된 후에도 윤석열은 지지자들에게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포하고 한남동 관저를 요새화했다.

국민의힘이 윤석열을 방어하며 극우 본색을 급속히 드러냈다. 거리에선 아래로부터의 극우 운동이 급성장했다. 미국은 ‘윤석열 없는 윤석열 정부’에 은근히 힘을 실었다.

윤석열 체포를 둘러싸고 국가기관들 간 갈등이 날카롭게 표출됐다. 군대·경찰·경호처 등이 물리적으로 대치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호처는 물리력을 동원해 공수처·경찰의 윤석열 체포를 2주 넘게 막았다.

윤석열 체포 지연에 맞서 친민주주의 대중도 결집했다. 윤석열 관저 입구를 사이에 두고 윤석열 체포 저지 극우 집회와 대치했다. 폭설 속 철야 시위는 막 정치화한 청년들의 의지를 드러냈다.

국회 탄핵 후 한 달 만에 윤석열이 체포돼 반윤석열 운동은 한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윤석열은 체포 직전까지 극우의 부상을 고무했다.

서부지법 폭동과 극우의 부상

윤석열 구속영장이 발부된 1월 19일 새벽, 이날 낮부터 윤석열 지지 시위를 벌이던 극우가 서울서부지방법원 청사에 난입했다.

이들은 출입문, 창문, 집기 등을 닥치는 대로 깨부수며 분풀이했고, 일부는 판사실을 뒤지고 다녔다. 경찰, 공수처 수사관, 언론사 기자 등이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56명이 당일 현장에서 체포됐고, 총 112명이 기소됐다.

서부지법 폭동은 윤석열, 국민의힘 등이 윤석열의 친위 군사 쿠데타 기도의 정당성을 강변하며 극우 대중을 선동하고 경호처 등 국가기관이 저항한 효과였다. 전광훈 등 극우 선동가들이 대규모 집회를 열며 우파 결집에 나섰다.

쿠데타 세력 처벌을 폭력으로라도 막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 이 사건은 이후 극우의 결집과 과격화를 고무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 국힘은 기력을 차츰 회복했다.

윤석열·김용현은 감옥에서 서부지법 폭도들을 응원하는 메시지를 내보냈다.

국힘 의원들은 극우의 폭동을 선동했다

대학교에 진지 구축하려는 극우와 맞불투쟁을 벌이다

윤석열의 쿠데타는 청년층과 소수의 극우 대학생들을 “계몽”시켰다.

개강을 앞둔 2월, 극우 대학생들은 전국 곳곳의 대학교들에서 윤석열 탄핵 반대 시국선언을 발표하려 했다. 대학가 여론을 왜곡하고 대학 내 극우 세력 조직화를 위한 첫 발 떼기였다. 윤석열과 극우 선동가들이 이를 지원했다.

그러나 연세대·서울대·고려대·이화여대·서울시립대·한국외대·인하대·전남대·부산대·중앙대 등에서 성공적인 극우 반대 맞불 집회가 열렸다.

노동자연대 학생그룹, 한국대학생진보연합 등이 여러 대학에서 함께 앞장섰다. 각 대학 학생들은 물론이고 민주동문회들의 참가도 두드러졌다. 대학 노동자, 교·강사, 지역 주민들도 극우의 학내 진지 구축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함께했다.

2월 대학가 맞불 투쟁은 극우에 맞대응하는 전술이 효과가 있고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당시 광주에서는 극우의 도발로 금남로에서 대규모 맞불 집회가 벌어졌는데 다행히 규모로 극우를 압도했다.

이후 극우는 대학생 간부층을 육성하며 캠퍼스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최근 충북대에서는 극우 학생들이 총학생회에 당선됐다.

대학교는 극우와 맞서는 데서 점점 더 중요한 전장이 될 것이다 ⓒ조승진

법원과 검찰, 윤석열을 기습적으로 풀어주다

3월 8일 윤석열 기습 석방은 법원과 검찰 등 국가기구 곳곳에 쿠데타 지지 세력이 자리잡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판사 지귀연은 전무후무한 구속 날짜 계산법으로 구속 취소를 결정했다. 검찰총장 심우정은 그런 억지 결정을 인정하며 항고 없이 석방을 명령했다. 나머지 검사들도 (최근의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 건과 달리) 이를 고분고분 따랐다.

그러나 민주당은 법원을 향해 비판 한 마디 못하는 무능함을 보였다.

윤석열 석방은 헌재 파면 선고를 낙관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윤석열이 헌재 심판과 내란죄 재판을 구속 상태에서 받느냐 아니냐가 차이를 낼 것이기 때문이었다.

“헌재를 쓸어버리겠다”는 집회에 수십만 명을 동원하고 있던 극우와 이들을 활용하는 윤석열, 국민의힘은 사기가 크게 올랐다.

순식간에 정치적 긴장이 고조됐다. 헌재 등 국가기관에 윤석열 파면을 맡길 것이 아니라 노동자 파업 등 대중적 항의 행동을 조직할 필요가 더한층 커졌다. 비상행동은 다급하게 투쟁 수위를 끌어올리려 했지만 그조차도 더뎠다.

마침내 헌재에서 윤석열 파면!

윤석열 탄핵 정국은 박근혜 탄핵 때와 달랐다. 이번에는 쿠데타 미수 후에도 집권당인 국힘이 분열하지 않고 윤석열을 감싸며 거리 극우와 연대하며 극우화했다.

반면, 윤석열 탄핵 운동 지도부는 헌정 절차 안에서의 탄핵과 순조로운 정권 교체를 전망하며 투쟁을 키우고 급진화시키길 꺼렸고 헌재를 찬양했다.

그러나 윤석열이 기습 석방되고 헌법재판소의 판결마저 이유없이 지연되자 운동 참가자들 사이에서 헌재에 대한 불신과 전투적 행동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야 비상행동 측은 3월말 상징적이나마 ‘총파업’을 선언하고, 차도 점거 철야 시위에 나섰다. 청장년 직장인들의 참가가 두드러졌다.

4월 2일 보궐선거에서 국힘이 참패한 직후 헌재 전원 일치로 윤석열이 파면됐다. 이번에도 기층 대중이 막판 투지를 발휘해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그러나 윤석열이 제거된 후에도 ‘윤석열 없는 윤석열 정부’는 알박기 인사 등 내란 청산을 계속 방해했다. 반면, 비상행동은 대선에서 민주당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조직을 해산하고 대중 동원을 중단했다.

대중의 끈기와 투지가 윤석열 파면의 핵심 동력이었다 ⓒ조승진

쿠데타 응징 염원이 정권을 교체했으나 극우 위험도 확인

윤석열 파면으로 치러진 조기 대선은 쿠데타 세력과의 지속적인 대결이라는 맥락 속에서 치러졌다.

비상계엄 해제에 공을 세운 이재명 민주당 후보에 쿠데타 응징 염원이 집중됐다. 그런데 이재명 후보는 정작 극우화한 국힘을 고립시키겠다며 중도 보수 정당 선언 등 두 길 보기와 중도화로 대응했다. 선거에선 유리해도 대중의 정치의식을 전진시키커나 극우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는 효용이 없는 방식이다.

쿠데타 지지 세력은 총력전을 펼쳤다. 대법원이 이재명 무죄 판결을 초신속 파기 환송하면서 대선 1위 후보를 선거에서 퇴출시키려 했다.

국힘은 극우 후보 김문수를 내보내 우파 결집에 총력을 다해 1439만 표를 얻었다. 극우의 주류화가 우파의 상층과 기층 모두에서 벌어지고 있는 징후였다. 이준석도 극우 본색을 확연히 드러냈다. 대선 직후 국힘은 지도부에 윤어게인파를 끌어들였고 공식 정치에서 극우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시작했다.

좌우 양극화와 윤석열 탄핵 운동의 온건함이라는 맥락 속에서 좌파 후보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이재명 정부 출범과 개혁 배신

이재명 정부 출범 반년이 됐지만 내란 청산은 지지부진하다.

내란 특검 등이 별 성과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부는 이른바 ‘헌법존중TF’를 만들어 국가기관 내 숙정을 선언했지만, 김민석 총리는 시작부터 “절제”를 강조하고 있다. 내란 청산보다 국가기관의 안정성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의 개혁 배신도 시작됐다. 윤석열 정부의 노골적인 친기업·친미 행보에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는데, 이재명 정부도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

한미 안보·무역 협상에서 국방비 대폭 증액, 전략적 유연성 지지, 대미 투자 등을 약속하며 미국 제국주의를 지원하는 노선을 분명히 했고, 동시에 핵잠수함 건조, 우라늄 농축과 핵연료 재처리 추진 등으로 동아시아에서의 전쟁 위험 고조에 일조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윤석열의 ‘부자감세’를 환원하겠다고 공언했지만, 배당소득 분리과세, 상속세 공제 확대 등 ‘부자감세’ 방안을 본격 논의하고 있다. 기업 지원을 위해 반도체특별법, K-스틸법 등도 추진 중이다.

또, 윤석열 정부가 퇴행시킨 성평등 정책을 바로잡기는커녕 이재명 정부의 성평등가족부는 오히려 ‘역차별’ 사례를 찾아내는 토크 콘서트에 열중하고 있다.

“악수는 사람과 하는 것”이라더니 윤어게인파의 지지를 받는 장동혁과 손잡는 이재명 대통령과 정청래 민주당 대표 ⓒ출처 대통령실

극우의 주류화와 내란 청산 저항

내란 청산은 미진한 반면, 극우의 저항은 과감하고 집요하다. 극우의 구심이 된 국힘은 윤석열의 친위 군사 쿠데타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고 있다. 부정선거 음모론자들도 끌어안아 여차하면 선거 결과도 불복할 수 있음을 내비친다.

조희대 사법부는 이재명 재판을 카드로 쥔 채 한덕수·박성재·황교안 등 주요 쿠데타 공범들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거듭 기각해 내란 수사의 맥을 끊고 있다.

그 짧은 시간에 국힘이 극우 본색을 드러내고 고위 국가 관료들이 섬찟한 극우 민낯을 드러냈다는 것은 (비록 미수로 그쳤지만) 윤석열 쿠데타의 가공할 위협을 보여 준다. 선거만으로는 극우를 주변적인 세력으로 만들 수 없다.

민주주의 투쟁은 노동계급이 조직을 건설하고 대중을 동원하고 계급 의식을 고양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런 민주주의 투쟁을 통해 노동계급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리더십을 쟁취할 수 있다. 내란 청산에서도 노동계급이 앞장서야 한다.

추악한 자들 국힘은 극우 운동의 핵심부가 됐다 ⓒ출처 국민의힘
카카오톡 채널, 이메일 구독,
매일 아침 〈노동자 연대〉
기사를 보내 드립니다.
앱과 알림 설치
앱과 알림을 설치하면 기사를
실시간으로 받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