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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는 내란 세력을 뿌리뽑을 수 있을까? ─ 마르크스주의의 전망

이 기사는 최일붕 노동자연대 운영위원이 8월 24일 노동자연대의 어느 모임에서 한 발제다.

지난해 12월 평범한 사람들이 온몸으로 쿠데타를 막아냈다 ⓒ출처 이재명 SNS

윤석열 계엄을 반대하고 그의 탄핵을 지지한 사람들은 모두 이재명 정부가 내란 세력을 깨끗이 청산하기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게 되지 못할/않을 것입니다. 왜 그런지 살펴보기 위해 저는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한 이론적 분석을 내놓으려고 합니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를 보고 지배 계급이 대부분 어떤 태도였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본 분들이 계셨을 것입니다. 하나의 계급으로서 전체적으로 그들은 뜨뜻미지근한 태도였습니다. 왜냐하면 지배 계급은 민주적 권리를 방어할 의지가 별로 없는데, 윤석열의 군사 쿠데타 기도는 민주적 권리들을 침해하고 유린할 목적을 이루려 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12·3 계엄 포고령을 살펴보겠습니다:

1.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2.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가짜뉴스, 여론조작, 허위선동을 금한다.

3.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4.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행위를 금한다.

5.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

6. 반국가세력 등 체제전복세력을 제외한 선량한 일반 국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 이상의 포고령 위반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계엄법 제9조(계엄사령관 특별조치권)에 의하여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14조(벌칙)에 의하여 처단한다.

역사적으로 자본가 계급은 억압받는 대중의 민주적 권리 문제에 열의가 없이 뜨뜻미지근했습니다. 1789~99년 10년간 당시 세계를 뒤흔든 프랑스 혁명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온전히 성취했다거나 평범한 민중의 민주적 권리를 보장했다는 말은 자유주의적 역사가들의 뻥튀기입니다. 물론 봉건 전제 국가를 전복하고 민주적 이상을 설파해, 미래를 위한 씨앗이 뿌려지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역사뿐 아니라 이론으로도 우리는 지배 계급이 민주적 권리를 향한 의지가 별로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 점을 설명하겠습니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지배 계급, 특히 그 가장 효과적인 정치 조직인 국가가 자체 내의 쿠데타 세력을 뿌리 뽑는 일에 심드렁할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본주의 국가는 쿠데타 세력 숙정 의지가 없을 뿐 아니라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의지 부족 문제를 다룬 다음에 능력 부족 문제를 다루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은 “내란 세력”을 일소할 의지가 설사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그럴 능력이 없거니와, 그들 자신도 이를 잘 알기에 의지도 발휘하지 않을 것이다.

얘기를 계속하기 전에 간단한 용어 해설이 필요할 듯합니다. 국가는 헌법·사법부·입법부·행정부·군경·관료제·공기업 등과 제도·조직·법질서까지 포괄해 총칭하는 말입니다. 반면, 정부는 정책 결정과 집행을 중심으로 일하는 행정부 상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본주의 국가는 왜 민주적 권리 방어에 열의가 없는가

먼저, 자본주의 국가에게는 민주적 권리를 보장할 의지가 강하지 않다는 점을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늘 전제로 삼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결정적 특징인데, 자본주의적 민주주의하에서는 정치와 경제가 매우 분리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에 한정됩니다. 그러나 착취는 선거·의회 등 정치 영역 ‘바깥’에서 일어납니다. 즉, 착취는 기업주와 그의 관리자들이 독재적으로 경영하는 일터에서 일어납니다. 자본주의는 일터를 민주적 통제 바깥에 두면서도 형식적 인권은 보편화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폭이 넓은 듯해도 전혀 깊지가 않습니다. 정치와 경제의 이 제도적 분리 덕분에 국가는 정치적 평등을 선언하면서도 경제적 압제는 온전히 남겨 둡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민주적 권리가 미치는 영역은 사실 크게 제한됩니다.

그나마 정치적 민주주의도 국가의 중심부에 선출되지 않는 권력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비록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선출돼도 자본주의 국가는 정보기관과 검찰과 경찰, 대법원, 상비 관료, 군부 같은 기관들에 결정적 권력이 집중돼 있습니다. 이들은 ‘체제 안정’이나 소유 문제가 걸린 경우 선출된 권력을 제약하거나 압도할 수 있습니다. 윤석열 탄핵 지지자들이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에만 의존한다면 민주적 권리는 선출되지 않은 강압적 핵심 권력에 의해 쉽게 후퇴 또는 역행할 수 있습니다. 가령 국정원과 보안경찰은 일부 반미 자주파 활동가들을 보안법에 근거해 탄압하고 있습니다. 대외 경쟁과 전쟁은 ‘국가 안보’ 논리를 강화시켜 (가령 보안법 등으로) 표현·언론·여행의 자유를 축소하는 경향을 낳고 있는 것입니다. 국내의 정치적 반대파는 안보 프레임에 따라 표적이 되기 쉽습니다.

새 정부하에서도 보안법 탄압은 계속되고 있다. 보안법 탄압 중단을 요구하는 〈자주시보〉 기자들 ⓒ김영익

민주적 권리도 그나마 ‘선 소유, 후 민주적 권리’입니다. 민주적 권리는 소유권이나 영업의 자유와 충돌할 때 번번이 좌절됩니다. 형식적 평등은 실질적 불평등 앞에서 빛이 바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은 개인의 형식적 평등과 계약의 자유를 전제하지만, 커다란 물질적 격차를 전제로 작동합니다. 헌법은 민주적 권리를 형식상 보편화하지만 사회 체제는 소유와 이윤을 우선시합니다. 그래서 만약 민주적 권리가 이윤이나 기존 질서와 충돌하면 국가의 강제력이 우선합니다. 국가가 자본가 계급의 이익과 권력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스스로를 ‘공익’으로 포장하면서도 민주적 권리의 한결같은 보장을 방해하는 구조적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국가의 계급적 성격 때문입니다. 국가는 중립적 중재자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주의 사회 관계들의 일부입니다. 저는 제가 편집한 《자본주의 국가》라는 책의 서문에서 “국가도 자본의 일부”라고 말했습니다. 국가의 기본적인 임무는 자본주의 사회 관계들을 유지·재생산하는 것,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소유·임노동·자본축적 시스템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충돌하면 민주적 권리는 쉽게 후순위로 밀립니다.

그래서 ‘민주적 권리’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민주적 권리는 자본가 계급의 이윤과 권력을 보장하도록 확립된 질서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민주적 권리는 자본 축적과 사회 체제 안정에 기여할 때는 유지되지만, 그 목표를 위협할 때는 제한되거나 철회됩니다. 예컨대 강력한 노동자 투쟁, 대규모 항의, 반제국주의 투쟁 등이 기존 질서를 위협할 때는 민주적 권리가 제한되거나 철회됩니다. 민주적 권리는 신장되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하지만 계급 권력을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경제와 사회의 권력이 자본가 계급 수중에 있는 한은 민주적 권리는 여전히 부분적일 뿐 아니라 언제든 회수될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선출돼도 국가의 결정적 권력은 선출되지 않는 자들에게 집중돼 있다 ⓒ출처 대통령실

이 문제를 그람시가 말한 헤게모니 개념을 통해 파악해 볼 수도 있습니다. 자본주의 질서는 경찰·군대·법원 같은 ‘강제 기구’와 학교·언론 등 ‘이데올로기 기구’가 결합돼서 유지되는 것입니다. 평시에는 ‘동의’가 강조되지만, 심각한 위기나 격렬한 계급투쟁 국면에서는 강제가 더 부각되고 민주적 권리의 제한이 정당화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가능하면 동의, 필요하면 강제’. 그람시가 말한 헤게모니는 동의를 얻는 것과 강제를 위협하는 것이 결합되는 것입니다. 지배 계급은 정당성이 필요할 때는 민주적 권리를 신장하고, 전쟁·경제공황·대중반란 같은 위기시에는 민주적 권리를 위축시킵니다. 민주적 권리는 ‘평상시’에는 넓고 ‘비상시’에는 좁아지는 탄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민주적 권리가 불안정하고 취약한 처지에 있는 것은 나쁜 지도자들 때문만은 아닙니다. 국가는 상층의 인물들을 바꾼다고 성격이 바뀌지 않는 장치입니다.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가 계급의 지배가 관철되는 특별한 강제력의 구현체입니다. 그래서 선거로 정부가 교체돼도 검찰·경찰·군대·행정관료·법원 등 국가 기구의 구조와 운영 규칙은 그대로 남아, 지속적으로 자본가 계급에 유리하게 작동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싹 갈아치우면 해결된다”는 발상 자체가 비현실적입니다.

물론 이재명과 민주당 인사들이 좌고우면하는 것도 문제이긴 합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크리스 하먼이 말한 “국가와 자본의 구조적 상호의존” 때문입니다. 국가 재정은 기업 이윤에 구조적으로 의존합니다. 그리고 국가는 투자·성장·경쟁력 같은 자본주의적 필요와 얽혀 있습니다. 물론 국가는 제한적으로는 특정 기업과 충돌할 수 있고 노동계급에 일부 양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 관계들의 재생산을 지향합니다. 특정 자본가 집단과 충돌하기도 하지만 국가는 (자본주의) 체제 전체의 이익을 우선합니다.

이처럼 국가는 자본과 결부돼 있으므로, 경제 위기 시기에 국가는 민주적 권리를 제약하는 비상 조처(감시 확대, 집회 제한, 긴급 명령)를 택하기 쉽습니다. 또, 민주적 권리(가령 노조 할 권리, 시위의 권리 등)가 신장되는 바람에 기업 이윤과 공공 질서가 위협받는다고 판단되면, 국가는 기업들의 압박을 받아 민주적 권리를 제약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당장의 사례로 노란봉투법이 있습니다. 노란봉투법 문제의 핵심은 파업권 제약인데, 파업권은 민주적 권리의 하나입니다. 이재명 정부는 경제 6단체의 반대를 받자 통과시켜 놓고도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이재명 정부는 국가의 장벽을 돌파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제가 얘기한 바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자본가 계급과 자본주의 국가는 민주적 권리를 지키는 데에 별로 이해득실이 있지 않아 심드렁하다. 민주적 권리를 보호할 의욕이 별로 없다.

그렇다면, 이재명 정부는 자본주의 국가의 이런 미온성을 거스를 능력이 있을까요? 의지는 있다고 가정하고요.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은 민주적 권리들을 둘러싼 자본주의 국가의 미온성을 거스를 능력이 없습니다.

첫째, 법과 제도 문제가 있습니다. 가령 헌법 제7조는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을 법률로 보장합니다. 대규모 일괄 해임·면직은 위헌·위법 소지가 큽니다. 사법부 독립 문제도 있고, 검찰·경찰·군대 내의 인사·징계 절차도 각각의 법률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최상층의 일부 자리들은 대통령의 인사권으로 교체 가능하지만, 신분이 보장되는 대다수 관료층은 법적 지위가 다릅니다. 그들은 권력자 네트워크(고위층, 정보기관 수뇌부, 경찰 수뇌부, 고위 공무원, 언론사 소유주 등의 연결망·관계망)의 일부입니다. 권력자 네트워크는 산업계와 금융계, 검찰, 정보기관, 고위 행정관료, 군부, 보수 언론 등으로 이뤄진 네트워크입니다. 이들은 정부 교체보다 훨씬 느리게 바뀌거나 거의 바뀌지 않습니다. 성급한 대규모 인적 청산 기도는 ‘정치 보복’ 프레임을 키워 역풍을 부를 수 있고, 사법적 제동을 받을 가능성도 큽니다. 검찰 조직의 정치화 문제를 다룬 연구들도 이러한 관성과 네트워크 효과를 지적합니다. 정성호보다 더 급진적인 자가(가령 조국) 법무장관 자리에 있다 해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대규모 인사와 전면적 제거는 곧바로 법정공방, 헌법소원, 국제여론전으로 비화합니다. 그러면, ‘질서’와 ‘중립’을 내세운 보수파의 반격이 강화되고, 그리되면 강력한 행정권·치안기구에 기대어 전세가 역전되는 시나리오가 펼쳐질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행정과 인사만으로는 구조를 못 바꿉니다.

그래서 이재명 정부는 법치에 근거한 책임 추궁의 연쇄를 만들려 애쓰고 있습니다. 특검, 진상조사, 국회 청문, 감사 강화 등으로 사안별 기소와 징계를 축적해서 국가 조직의 재보수화 성향을 야금야금 바꾸려 하고(가령 12·3 계엄/내란 관련 사법 절차의 정상화) 있습니다.

또, 제도 개혁을 중심적인 전략적 선택지로 삼고 있습니다. 여당은 검찰의 수사와 기소 분리 등 검찰 제도 개편 법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숙정이 아니라 권한 배분과 조직 재설계를 통해 장기적 균형을 바꾸려는 접근법인 것입니다. 여기에 우군으로 노동조합·시민단체·사회단체 지도자들을 동원해 국가 기관들의 저항을 견제하려 할 것입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개량주의적으로 변형해 활용하는 것이죠.

이 모든 일들은 기존 정치 제도의 한계 내에서 취하는 경로입니다.

이재명 정부의 이런 답답하고 소심한 방식에는 제가 앞에서 설명한 국가의 계급적 성격 문제가 근저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강조했듯이, 국가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국가는 자본가 계급의 지배와 자본 축적을 위한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쿠데타 세력의 철저한 제거는 검찰, 경찰, 법원, 군대 등 소유와 노동 규율을 보호하는 바로 그 장치들을 불안정하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쿠데타 공모자를 모두 척결하는 것보다 최소한의 혼란으로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국가에게 최우선입니다. 전면적인 숙정은 정부가 노동자 투쟁이나 대규모 항의 시위 등에 대비해 강화되기를 바라는 핵심적인 강압 기구들(경찰, 정보기관, 법원, 군대 등)을 무력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제도적 자기보존 논리에 따라 정부는 형사 기소보다는 관대한 처분, 수평적 전근, 또는 조기 퇴직을 선호하게 됩니다.

국가의 기본적인 임무는 자본주의 사회 관계를 유지·재생산하는 것이다. 대통령 이재명과 재벌 총수들의 만찬 ⓒ출처 대통령실

그 밖의 구조적 요인들

둘째, 쿠데타 세력 전면 숙정 기도는 자본가 계급의 내분을 격화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국가는 자본가 계급 내부의 타협을 중재하는 데에 주체성과 자발성을 발휘할 수 있는데, 실제로 자본가 계급 내의 갈등을 봉합하는 기능을 해야 합니다. 정부는 국가의 기반을 균열시킬 수 있는 전면적인 숙정보다는 권력자들끼리의 협정이나 면책 거래나 제한된 형사기소를 선호합니다. 권력자들은 그러한 타협을 통해 가장 증오받는 인물들만을 제거하면서, 제도를 보호하고 근본적 권력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사실 권력자들의 관점에서는 친위 쿠데타를 계급적 프로젝트로 계획된 것이 아닌 개인의 과잉 행위로 규정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정부 지도자의 쿠데타를 범죄화하는 것은 나중에 비슷한 일을 획책했다 실패한 다른 권력자들에게 더 쉽사리 위협이 될 수 있는 선례가 되기 때문입니다. 쿠데타를 개인의 일로 만듦으로써 나중에 더 광범하게 지배 계급 자체에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는 수단이 되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쿠데타를 지원한 권력자들은 바로 국가가 곧 필요로 하게 되는 자들입니다. 그들을 한꺼번에 교체하는 것은 통제력 상실, 정보 유출, 그리고 관료적 방해 공작 등의 위험을 초래합니다. 따라서 철저한 숙정이 아니라 제한적이고 선별적인 징계와 제한적·선별적 인사 이동 정도가 필요합니다. 이재명 정부는 윤석열 정부가 의존했던 것과 똑같은 억압기구·행정기구에 의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국가는 아래로부터의 대중 동원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쿠데타 세력의 진정한 숙정을 위해서는 노동자 등 대중을 결집시켜 기성 체제에 맞서야 하지만, 대중 동원은 ‘민주주의 수호’를 넘어 임금 투쟁, 군사비 증액 반대 투쟁, 이주민·난민 방어로까지 확대될 수도 있습니다. 국가는 노동계급의 힘 강화를 막기 위해 대중 동원을 제도적이고 협소하게 유지합니다. 따라서 이재명 정부가 “내란 세력” 척결 의지가 있다 해도 국가의 우려 사항을 건들면서까지 그런 시도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재명 정부는 법치를 통해 “내란 세력”을 청산하겠다고 하는데, ‘법치’와 적법 절차는 대중 저항의 제어를 뜻합니다. 법률주의, 절차주의, 끝없는 기구나 위원회 설립과 운영 등은 정치적 갈등과 충돌을 느리고 개별적인 판결이나 결정으로 바꾸는 구실을 합니다. 이는 자본가들에게 이윤 획득 활동의 정상적인 조건들을 제공함과 동시에, 국가가 시간을 벌며 대중의 분노를 달래는 효과를 냅니다.

다섯째, 국가는 자본주의 세계 속에 있으므로 국제적 제약을 받습니다. 금융 시장, 신용평가 기관, 동맹국들 등은 예측 가능성을 중시합니다. 쿠데타 세력의 전면적인 숙정은 한국의 정부는 물론이고 사법부와 군부조차 불안정해지고 있거나 정치화하고 있는 것으로 해외 자본에 비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는 자신에게 연속성이 있다는 신호를 외부에 보냅니다. 즉, 제한된 재판과 신속한 사면 등을 그들에게 암시합니다.

이상의 요인들을 종합해 보면 이렇습니다. 쿠데타 세력 숙정을 놓고 국가가 보이는 미온적인 반응은 과오나 실책이 아닙니다. 민주적 책임보다는 자본주의의 안정, 기성 권력층의 응집력, 노동계급에 대한 통제를 우선시하는 시스템과 그 수혜자/수호자가 핵심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란 세력”의 숙정은 이재명 정부가 쿠데타 세력과 단호하게 결별하지 않고 대충 정리하는 것이 기본 전망입니다.

자본축적 질서를 유지하는 국가의 역할은 민주적 권리와 거듭 충돌한다. 권리는 투쟁으로 지키는 것이다 ⓒ이미진

요약

결론으로, 이재명 정부는 자신이 표방한 제일 과업인 “내란 세력” 청산을 못하고 대중의 증오를 한 몸에 받는 몇몇 권력자들과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처벌하는 데에 그칠 것입니다. 쿠데타 세력의 제대로 된 청산은 노동계급 투쟁과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몫입니다.

혁명적 사회주의에 따르면, 민주적 권리의 안정적 보장은 생산수단의 민주적 통제(노동자 민주주의)로 나아갈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민주적 권리를 무조건적·보편적으로 방어해야 합니다. 민주적 권리는 노동계급이 스스로 조직하기 위해 필수적이므로, 그것을 수단으로서 전면 방어해야 합니다. 파리 코뮌의 경험은 민주주의의 확장이 노동자들의 역량을 강화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민주적 권리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통해 쟁취되고 보호됩니다. 결코 위에서 하사되는 선물이 아닙니다. 보통선거권, 결사의 자유, 노동조건 악화 없는 노동시간 단축 등은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고도로 고양됐을 때 확보됐습니다. 투쟁이 후퇴하면 국가는 민주적 권리를 쉽게 약화시킵니다.

자본주의 국가가 민주적 권리를 일관되게 보호하지 못하는/않는 이유는 국가의 핵심 기능이 권리 보장이 아니라 자본축적 질서의 안정에 있고, 법·제도·재정·국제질서가 모두 그 방향으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권리는 투쟁으로 획득·방어되어야 하며, 경제·정치의 민주화를 결합할 때만 장기적으로 공고해질 수 있습니다.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사회적·경제적 권리와 연결시켜야 합니다. 자유주의의 한계를 들춰 내면서 사람들의 일터나 지역사회에서 민주주의를 넓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노조 할 권리, 파업권, 피케팅 할 권리, 핵심 부문에 대한 사회적 통제, 경찰·규제기관의 선출성과 소환 가능성 등이 그 예입니다.

의회가 아래로부터의 권력을 대신하도록 놔두지 말아야 합니다. 선거는 순전히 전술적으로 활용하되, 권리를 획득·방어하는 중심은 노동조합, 여성단체 등 사회운동의 대중 조직과 의회 밖 행동이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국가와 경제를 함께 민주화해야 합니다. 권리의 일관된 보장을 위해서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넘어 사회적 소유, 노동자 통제, 구 국가기구를 대체하는 진정으로 급진적인 민주적 제도 — 코뮌이나 소비에트 — 가 필요합니다.

자본주의하에서는 축적과 질서를 유지하려는 국가의 역할이 보편적 권리와 거듭 충돌합니다. 따라서 권리란 필수적이지만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것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권리는 투쟁을 통해 획득된 성취이며, 자유주의 입헌정치(“헌정”)가 의도적으로 손대지 않은 영역 — 생산의 조직과 사회적 권력 — 으로 민주주의가 확장될 때만 공고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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