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생각한다
좌파 민족주의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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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정부가 이재명 정부를 집요하게 압박하며 이란 전쟁 참전까지 강요하자 반미자주파 정당과 산하 조직들은 “굴욕 외교”를 피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외교안보 라인(특히 위성락) 교체를 요구하고 있다. 물론 위성락 등 외교안보관료들은 당연히 경질돼야 한다.
그러나 좌파 민족주의에는 반제국주의·반전 운동의 전진을 저해할 심각한 난점이 있다.
좌파 민족주의가 반전운동에 미치는 문제는 2003~2004년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났다. 크게 다섯 갈래로 정리할 수 있다.
1. ‘국익’ 프레임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좌파 민족주의는 파병 반대 근거를 흔히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 “미국에 예속되는 것이다”, “우리 청년들이 죽는다”로 짠다. 그런데 이 프레임에 들어서면, “무엇이 국익에 이로운가”라는 실용적 계산으로 축소된다.
노무현 정부는 바로 이 지형에서 맞섰다. 파병해야 북핵 문제에서 발언권을 얻고, 재건 사업 수주로 실리를 챙기며, 결국 파병이 자주로 가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자주 대 예속 구도 안에서는 이 논리를 반박하기가 의외로 어렵다. 게다가 이 계산에서 이란인(이라크인)의 목숨은 처음부터 변수로 잡히지 않는다.
2. 주적을 밖에 설정하기 때문에 국내 지배계급의 일부를 동맹으로 삼는다
민족 모순을 일차적인 것으로 놓으면 국내 지배계급 가운데 ‘자주적’이라고 여겨지는 세력이 잠재적 우군이 된다. 개혁 정부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 운동은 정부와 정면 충돌하기를 피하게 된다. “파병은 반대하지만 이재명 정부를 흔들면 보수 수구 세력만 이롭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2003~2004년 결과는 명확했다. 여론 다수가 파병을 반대했는데도 반전 운동은 정부를 저지하지 못했다. 같은 시기 영국에서 반전운동이 노동당 정부를 상대로 훨씬 오래 버틴 것은 자국 정부를 명확히 표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3. 자국 군대를 비판하지 못한다
좌파 민족주의는 파병에는 반대하되 자주국방과 군비 증강에는 우호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면 파병이 미국의 압력뿐 아니라 한국 자본의 해외 진출 이해관계와 맞물려 있다는 사실, 한국이 스스로 지역적 수준의 소제국주의적 행위자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없게 된다. 반미주의는 반제국주의와 같지 않다. 미국만을 제국주의로 규정하면 다른 강대국의 확장이나 자국 지배계급의 이해관계 앞에서 나침반을 잃는다.
4. 계급이 아니라 국민을 운동의 주체로 놓는다
파병을 실제로 막을 수 있는 힘은 노동계급의 독립적 행동에서 나온다. 그러나 국민 통합 프레임은 노동자와 자본가를 같은 국민으로 묶기 때문에 반전 요구와 계급투쟁을 결합시키지 못한다. 1914년 각국 사회민주당이 국민 통합의 이름으로 전쟁 예산안에 찬성한 것도 같은 원리였다. “주적은 국내에 있다”는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정식은 그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다.
물론 반론도 있다. 분단과 미군 주둔이 실재하는 조건에서 민족 문제를 부차화하는 것은 추상적이라는 주장이나, 개혁 정부와의 협력에서 얻은 실용적 성과를 무시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파병 문제를 놓고 그 협력이 치른 비용이 얻은 것보다 크다(노무현 때도 컸다)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
5. 국제주의가 아니라 배외주의로 뒤집힐 수 있다
“우리 병사가 위험하다”는 논거는 파병 초기에 폭발력을 갖지만,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다. 이란인에 대한 적대와 복수 정서로 얼마든지 굴절될 수도 있다. 압박 받는 나라의 저항권을 옹호하는 논리가 없으면 파병 반대는 자국민 안전 캠페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기본 원칙을 세운다
대안의 축은 단순하다. 정부 자체(단지 외교안보 분야 관료만이 아닌)와 자국 지배계급을 주된 표적으로 삼고, 무조건적·즉각적 철군을 요구하며, 개혁 정부·여당과 반전 운동을 철저히 분리해 운동의 독립성을 지키고, 제국주의의 압박을 받는 민족(이란)의 자결권을 그들의 정치에 관계없이 옹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