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대선에서 왜 좌파는 존재감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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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5일 발행된 글을 제목만 수정했다.
문재인이 대통령직에 취임했을 때 ‘촛불 정부’라며 환영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의 배신에 환멸을 느끼고 “지난 5년간 우리가 얻은 게 뭐냐,” “상황이 5년 전으로 돌아간 것 아니냐” 하고 묻는다.
그러나 촛불 승리 이후 주요 좌파 단체들인 민주노총·정의당·진보당이 모두 성장했다.
여기에다 여성 운동도 성장했고, 기후 정의 운동도 성장했다는 사실을 덧붙일 수 있다.
또한 문재인에게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이 당혹감과 곤혹스러움을 느끼기는 해도 의식과 사기가 나락으로 떨어졌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다.
대중 운동이 성장했는데도 왜 사람들은 당혹감을 느끼고 있을까?
그것은 성장한 운동의 정치적 표현이 가시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민주노총 후보가 민주노동당(그리고 통합진보당)의 후보였다. 그러나 지금 민주노동당(그리고 통합진보당)은 정의당과 진보당으로 분당돼 있고, 민주노총은 이 정당들의 후보들을 단일화시키지 못했다.
정의당과 진보당이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손 치더라도 민주노총은 이를 공식화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한상균 전 위원장 측이나 노동당 측을 무마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 운동과 기후 정의 운동도 대안 부재일 것이다. 여성 운동을 대표해 온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은 비록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탐탁치 않아도 30년 동안 민주당과 맺어 온 연계를 미련 없이 끊고 심상정 정의당 후보 지지로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기후 정의 운동도 공식적으로 심상정 후보를 지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정의당의 민주노총 기반은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밀리는 것은 물론, 진보당 지지자들에게도 한참 밀린다. 심상정 후보의 노동선대본 본부장 7명 중 겨우 한 명만이 민주노총 간부이다. 그나마 전현직 총연맹 위원장이나 연맹 위원장이 아니라 교육공무직본부 본부장이다.
민주노총의 중앙집행위원회는 민주노총 주도로 후보 단일화를 이루겠다고 결의했지만,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더구나 매우 중요한 점은 기층 조합원들이 고위 간부층의 이 움직임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반 조합원들은 썩 내키진 않아도 이재명을 찍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대다수 민주노총 조합원 등 변화 염원 대중은 민주당에 흔쾌히 투표할 마음 상태라기보다는 국민의힘이 싫어서 민주당에 투표하려 하는 것이다. 바로 차악론이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당시 민주당 후보에게 찍으려 했을 때 그들은 지금처럼 심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한 2007년에는 정동영 당시 민주당 후보가 패배하고 한나라당 이명박이 승리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어서, 차라리 마음을 비우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2022년 현재, 변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당혹감의 실체는 이렇다: ‘민주당 정부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국민의힘으로 교체되는 것은 싫다. 그렇다고 장기 투자하는 셈 치고 좌파 세력에 베팅 하는 건 무의미한 일 같다.’
요컨대 성장한 대중 운동이 그 지지자들 자신에게 정치적 대안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노동조합의 박근혜 퇴진 운동 주도에 내포된 가능성과 한계
그 원인을 정확히 알려면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리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바로 ‘노동계급 중심성’이다. 계급투쟁이야말로 정세 분석의 진정한 쟁점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사회운동을 볼 때 ‘민중 중심성’이나 ‘민중 연대’, ‘민중 헤게모니’를 말하는 것은 좌파적 포퓰리즘, 즉 민중주의에 불과한 것으로, 계급 이전의 사고일 뿐이다.
문재인 하에서 운동답게 일어난 운동은 노동운동과 여성 운동과 기후 운동, 이 세 가지였다.
기후 운동은 이제 막 시작된 운동이고 아직 결정적 기회와 시험을 치르지 않은 상황이다.
여성 운동의 동력은 한때 꽤 강력한 듯했으나 지금은 그다지 강력하지 못하다. 해방을 향한 여성들의 염원과 정서는 여전히 강력하고 앞으로도 매우 오래가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여성 운동의 주도적 활동가들은 정체성 정치 지지자들로, 중간계급 지향적이다. 그래서 노동계급 운동에 비해 후위적 성격이 강하다.
또한 정체성 정치와 친중간계급적 성격 때문에 그들은 여성 정치인들, 여성 권력자들과의 관계가 밀접하다. 그래서 그들의 운동은 혼란스럽고 동요하기 쉽다.
최근 사례는 바로 박원순 사건이었다. 우선, 독점적 전유물인 듯했던 ‘성폭력 피해자 중심주의’와 ‘성폭력 2차가해’ 교리를 우파가 이용해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자리를 되찾는 꼴을 봐야 했다. 게다가 여성계 지도자들은 명예와 위신이 실추되는 행동들을 했고, 그로 말미암아 연합단체 여연의 지도부를 재편해서 이미지 쇄신을 해야 했다.
신지예 사건은 정체성 정치와 중간계급적 성격 때문에 빚어진 여성 운동의 또 하나의 혼란 사례였다.
그러므로 노동운동이 남는다. 실제로 노동운동은 박근혜를 끌어내리는 데서 방아쇠이자 견인차 구실을 했다. 더 정확히 말해, 박근혜 퇴진 운동으로 특별히 떠오른 집단은 민주노총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점, 즉 노동계급이 헤게모니를 발휘했지만 그 리더십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행사했다는 점이 이후 전개될 상황의 핵심 모순을 대표한다. 2016년 12월 초순 거리로 나온 수백만 대중의 알짬인 노동계급을 사실상 지도한 것은 민주노총 지도자들이었다.
그래서 2016년 12월 초순, 박근혜 퇴진 운동의 주도권이 노동계급이냐 아니면 자본주의 개혁가들인 문재인 등 민주당 정치인들로 넘어가느냐가 판가름나던 결정적 시점에서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철도 파업을 끝내어 운동의 초점을 국회로 옮기려는 자본주의 개혁가들에게 양보했다.
철도 파업을 끝내는 데서 사회민주주의 정치인 심상정 정의당 국회의원이 가장 중요한 구실을 했지만 김영훈 당시 철도노조 위원장도 큰 구실을 했다.
한상균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과 이영주 당시 민주노총 사무총장은 침묵했다.
개혁주의의 공과를 드러낸 노동조합 지도층
노동계급이 대중 운동의 중심을 이뤘음에도 그들에 대한 지도는 개혁주의적 노조 지도자들이 하는 이런 패턴은 문재인 하에서도 계속 되풀이됐다. 문재인 출범 1년째 되던 2018년 메이데이 직전에 임종석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과 〈경향신문〉 데스크는 민주노총을 비난하고 있었다. ‘사회적 대화’에 임하라는 압박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전술은 기본적으로 이간질이었다. 먼저, 우파 노동조합 한국노총을 끌어들이고, 그다음 민주노총 온건파를 회유하며 강경파를 비난한다. 이때 민주노총이 자기 문제로 받아들여 중시할 쟁점들과 그렇지 않을 쟁점들을 함께 제시해, 주거니 받거니 협상을 하자고 한다. 최저임금 억제와 탄력근로 확대, 사회안전망 회피 조처 등에선 양보를 받아 내면서,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관심사 일부(가령 전교조 합법화 같은)에서는 양보할 수도 있음을 넌지시 비친다.
전자는 대부분 미조직 노동자들과 비정규 노동자들이 관계된 요구들인데,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부문주의적으로 대처한다. 즉, 자기 조합 조직 챙기는 데에 우선순위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미조직 노동자들과 관련된 요구들은 배신적 타협에 노출된다. 가령 민주노총은 자신이 소속된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이 제출한 후퇴안을 자기 요구로 채택했다.(경사노위에 참가하지 않았어도 마치 참가한 것처럼 행동한 건데, 이런 일은 이것 말고도 많았다.)
노동조합 지도층은 결국 투쟁보다 교섭을 우선시하는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계층이다. 그래서 2018년 5월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는 그해 1월부터 참가하고 있던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참가 중단을 선언하면서도 ‘노정교섭 병행추진’을 제시했다.
‘노사정’이냐 ‘노정’이냐를 대단한 차이인 양 주장하는 것은 1998년 이후 민주노총 좌파 지도자들이 애용하던 대안이다. 이제는 특별히 좌파 지도자가 아니어도 모든 민주노총 지도자들이 수중에서 부리는 짝패가 된 것이다.
며칠 전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도 노정교섭 추진이 결의됐다(아마도 한국노총과 이재명의 경사노위 강화 합의에 맞서).
민주노총은 위에 언급된 ‘노사정대표자회의’ 참가 중단 이후, 6월 30일 8만 명 규모의 노동자대회를 개최했다. 하지만 곧 ‘노사정대표자회의’ 복귀를 말하거나 노정교섭 추진을 말했다.
그해 11월에는 주로 금속 노동자 16만 명이 참가하는 하루 파업을 벌이고 두 차례에 걸쳐 몇만 명 규모 노동자대회를 열었다. 하지만 역시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부적절하게도 정의당은 민주노총에 “[정부와의] 대화의 끈을 놓아 버리지 말라”고 권고했다.
2019년, 결정적인 해
많은 사람들이 정의당이 민주당 2중대처럼 행동했었던 것이 주된 문제라고 지적한다. 맞다. 그러나 정의당이 문재인에 대한 노동계급의 저항 분위기에 조응하는 듯했을 때는 정의당의 지지율이 그런대로 괜찮았다고 말하는 것도 틀리지 않은 진술일 것이다.
가령 2019년 4·3재보선에서 노동운동가(금속산업연맹 조직국장) 출신 여영국 후보가 노동계급 거주 지역인 창원 성산에서 당선됐는데, 이는 두어 달 전에 열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사회적 대화’(경사노위) 반대가 결정된 데서 드러난 노동자들의 정서를 배경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7월에 한일갈등이 크게 불거졌을 때 정의당, 진보당(당시 민중당), 민주노총 등 주요 좌파 단체들은 일본의 수출규제를 “경제 침략”이라고 규정하고는, “국란 극복을 위한 국민적 단결에 힘을 싣자”고 호소했다. 노골적인 계급협조주의 선동이었다.
현대차노조 집행부는 예정된 파업을 유보했다. 그 집행부는 현대차노조 집행권 획득을 위해 활동하는 일부 조합원 그룹 민투위가 주도했고, 민투위는 당시에 노동전선의 회원 조직이었다.
정의당은 ‘일본수출규제대책 민관정협의회’에 참가했고, 자민통계 활동가들은 정부 지지자들과 함께 집회를 열었다.
주요 좌파 단체들은 ‘재벌 중심 대외의존형 경제’ 탈피라는 1980년대의 좌파적 포퓰리즘, 좌파적 민족주의 강령을 되살려 내고 있었다.
정의당은 이듬해 봄에도 “사회적 합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것을 위해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메이데이 기념사). 이때는 코로나 19 위기 극복이 대의명분이었다.
정의당은 그때 민주노총의 양보도 지지했다. “[정의당은] 노동계가 선도적으로 고통을 분담하여 더 어려운 계층을 위해 나서겠다고 한 것에 환영의 입장을 전한다.”(레디앙)
8월 중순부터는 노동계급이, 특히 그 미조직 청년층이 문재인 정부에 환멸을 결정적으로 느끼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조국 사태’였다. 부의 대물림, 이것만큼 요즘 청년들을 화나게 만들고 문재인 정부를 위선자들로 보게 만들 이슈가 또 있었을까.
물론 조국 사태는 조국 자신의 부패 사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재인의 핵심 측근이자 정부의 실세 각료이고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개혁가가 자녀가 계급적 특권을 누리도록 방조하고는 뻔뻔하게도 이를 노골적으로 정당화한 일이었다.
조국을 반대해 20여만 명씩 모이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조국을 방어하는 비슷한 규모의 맞불 집회는 이에 맞선 방어적 성격의 집회였을 뿐이다.
9월 3일 민주노총 위원장과 임원들은 김상조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과 만났다. ‘조국대전’이 한창이고 정부가 최초의 심각한 위기에 처했던 상황이었다. 만난 자리에서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노정 협의 틀” 마련을 촉구하고 김상조는 그것을 약속했다.
이런 일로써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문재인 정부를 은근히 감싸주는 행동을 했던 것이다. 노동계급과 서민층 청년들을 거슬러서 말이다.
청년들이 민주노총을 어떻게 봤겠는가? 이기적인 조합주의 단체로 보지 않았겠는가.
66일간의 ‘조국대전’ 동안 민주노총은 조국과 문재인 정부 비판을 일절 삼가며 철저히 침묵했다. 그럼으로써 사실상 문재인 정부를 비호했다. 이 점에서는 정의당도, 진보당도 마찬가지였다.
10월부터 문재인 정부는 친기업 노선을 더한층 분명히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0월 23일 노동자연대를 포함한 급진 좌파 단체들은 연명해서 총파업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많은 활동가들의 우호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거기까지였다. 실행은 전혀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국 사태를 거치며 노동계급 청년들 다수가 위선적인 문재인 정부에게서 감정적으로 이반하는 한편, 노동계급은 지도부들의 친정부 노선으로 스스로 주변화된 나머지, 계급간 세력관계에서 다소 불리해졌던 것이다.
또한 한일갈등 문제와 조국 문제를 놓고 민주노총 좌파 지도자들도 온건파 지도자들과 공개적으로 충돌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좌파계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급진 좌파 단체들의 총파업 촉구 성명을 무시해도 됐다.
스스로 기층에서 선동할 기반이 너무 협소한 급진 좌파 단체들은 무기력을 감수해야 했다.
이는 이듬해에도 재연됐다. 2020년 4월 16일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는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원포인트 사회적 대화’를 정부에 제안하기로 결정했고, 그 대화의 결과로 나온 잠정합의안은 7월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됐다. 그러나 이를 행동의 청신호로 삼아 전면적 저항을 일으키기 시작할 급진 좌파 세력은 기층 수준에서 너무도 희박했다.
맺으며: 정치란 무엇이 아닌가
2018년 11월 10일자 〈노동자 연대〉 신문에서 김하영 당시 노동자연대 조직노동자운동팀장은 문재인 하 노동운동의 기본적 특성을 이렇게 요약했다. “노동자들은 크고 작은 투쟁에 나서긴 했지만 분산돼 싸웠기 때문에 투쟁이 보편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여기서 “보편화”는 계급 대부분을 참여시킨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바로 사회주의적 의미에서 정치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대화에 미련을 두고 투쟁을 협소한 개별 부문들에 가[둠으로써] 영향력을 잃고 주변화되는 길”을 걸었다(위 기사).
달리 말해, 노조 관료주의가 부문주의를 강화한다. 유대계 팔레스타인 마르크스주의자 이가엘 글룩슈타인(필명 토니 클리프)는 노조 지도자들의 이런 전략을 “자기 패배적 전략”이라고 불렀다.
박근혜를 물러나게 만들고 문재인의 부상에 결정적 도움이 됐던 노동운동은 이렇게 노조 지도층의 개혁주의와 노동조합 부문주의라는 한계에 부딪혀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무시당하며 자체의 정치적 표현도 못 찾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의 대안으로 흔히 민주노총은 일단의 요구들을 묶어 ‘사회 개혁 강령’을 제출하고 하루 집회를 연다(대개 민중대회라는 명칭으로). 며칠 전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도 올해 가을로 ‘집중 정치투쟁’ 일정을 잡았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브라케에게 보낸 편지(1875년 5월 5일)에서 강조했듯이, “현실 운동의 한 스텝, 한 스텝이 한 묶음의 강령보다 중요하다.”
2019년 톨게이트 노동자 투쟁이나 2021년 건보 고객센터 노동자 투쟁은 모두 노동계급 전체의 광범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전 계급적, 즉 정치적 투쟁으로 만들기 위한 민주노총 지도자들의 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특히,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한 건보 정규직 노조(조합원이 1만 3천여 명이나 되는 큰 조직이다) 위원장에 대한 민주노총 관료들의 한솥밥 의식과 무위(無爲)는 투쟁의 전진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을 방치하는 구실을 했다.
민주노총 조직들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지지하지 않거나 심지어 노골적으로 반대하기까지 한 일이 문재인 집권 동안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민주노총 관료들과 그 기구들은 침묵을 지켰다.
정치는 연대를 구축하고 확대할 능력과 의지를 뜻한다. 이는 연대를 파괴하는 종파주의와 부문주의, 경제주의에 맞서 가차없이 싸우는 것을 흔히 포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동조합 지도층은 사회적 평화와 교섭 중심주의, 무사안일을 선호하므로 그들에게 ‘정치’는 결국 선거와 의회를 뜻하는 것으로 극히 협소해지게 된다.
그러나 선거와 의회 영역에서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전진하려 해도 현재와 같은 온건함으로는 크게 역부족이다. 이것이 문재인 정부를 등장케 한 일등공신이 정부 중반부 이후에는 점점 주변화돼, 노골적으로 괄시받는 처지가 된 비결이다.
이 난국을 벗어나려면 처음부터 다시, 즉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 노조 집행권 장악을 지향하지 않고 급진적·투쟁적인 네트워크를 일터에서 건설해야 한다. 아마도 그럴 의지가 있는 사람들은 혁명적 좌파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