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 재창당은 좌클릭이지만 모호하다
〈노동자 연대〉 구독
정의당이 차기 대표 선거에 돌입했다. 향후 노선을 놓고 경쟁이 치열할 듯하다.
특히, 최근의 복합 위기 심화로 대중의 생활고가 깊어지고 지배계급의 고통 전가 추진 의지도 두드러지는 상황에서, 위기 탈출에 대한 정의당의 절실함이 반영된 듯하다.
대표 선거를 앞두고 9월 17일 당대회에서 재창당을 결의했다. 모호하지만 기존 노선에서 좌클릭하는 방향이다. 창당시 노선인 민주당과의 연립정부 전략을 (일시?) 포기하고, 노동 중심성을 복원하며, 강령을 개정하겠다는 것이다.
사회연대전략에 대해서는 “미조직노동을 향한 조직노동의 ‘나눔과 양보’”를 “미조직노동을 향한 조직노동의 ‘적극적 연대’”로 문구 수정했다.
정의당이 대우조선 등의 투쟁 현장에 출현한 것은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됐다. 9·24 기후정의행진에도 당원들을 가능한 최대 동원해 참가했다.
재창당에 걸맞은 새로운 세력의 합류 여부는 지켜봐야 할 듯하다. 대신 정의당 창당 주역의 하나인 참여계 천호선 전 대표가 탈당했다. 그래도 당대표 선거 후보군에는 좌선회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이 여럿 출마했다.
모호함
최근 〈레디앙〉이 정의당 대외비 보고서를 입수해 정의당 투표층을 대상으로 한 8월 조사에 관해 보도했다. 그 조사에 따르면, “노선/정체성이 정의당 비호감 최대 원인 ... 모호한 정체성, 민주당 2중대, 기존 정치세력과의 차별성 등 전체적으로 노선과 정체성에 대한 문제제기 많았다.”
정의당 당원 대상 조사에서도, “정의당의 호감도가 하락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이념 및 정체성의 불분명함’(29.0%) 응답이 가장 많았다.”
정체성 논란은 결국 정의당 노선의 온건함과 노동 중심성 결여에 관한 것이다.
좌파 정치에서 노동이 중심적 정체성이 돼야 하는 이유는 통상 이렇다.
첫째, 노동과 자본의 계급 구분은 계급 이해관계의 화해 불가능성 때문에 객관적인 좌-우의 지표가 된다. 둘째, 노동계급은 인구의 큰 다수(한국의 경우 70~75퍼센트)이므로 노동계급의 필요야말로 국가적·국민적 의제이고, 노동계급 지향적 좌파는 이 문제들에서 인구의 다수를 대변한다. 셋째, 크고 작은 계급투쟁 속에서 단련된 노동자들은 일상적 시기에 개혁 쟁취 운동의 동력 구실을 한다. 넷째, 노동계급은 기업주들의 이윤에 타격을 가해 양보를 얻어낼 능력이 있다.
정의당은 노동자 당원도 많고, 노동자들이 내는 정치자금 비중도 높았다. 선거마다 민주노총의 공식 지지를 받았고, 노동자 밀집 지구에서의 득표도 높았다. 그러나 4~5년이 지난 지금은 그런 지지를 많이 잃었다.
그러므로 정의당의 정체성 위기는 스스로 강점을 약화시킨 결과다. 정의당 정치인들은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정의당은 정치투쟁/경제투쟁 분업이 핵심 특징인 사회민주주의 정치를 추구한다. 경제투쟁은 노조 지도층이 알아서 맡고, 의원단은 주류 정당 의원들처럼 표를 많이 받고 국회 안에서 입법 협상을 잘 하면 된다는 식이다.
정의당 전체가 이런 선거주의·의회주의 실천으로 기울면서 의원단과 선거공학이 더 우대받는 정치 문화가 조성됐다. 기층 당원들은 방치되고, 수동성이 조장됐다.
노동자들이 해고나 손배가압류 위협을 감수하고서, 땡볕에서 또는 눈비 맞으며 벌인 집회·점거·농성에 눈도장과 인증샷을 넘어 정의당 의원들의 모습을 찾기가 힘들었다. 당원들을 동원해 지지와 연대를 확산시키려는 노력은 특히 없었다.
노동자들에게 한결같이 내 편인 정당으로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노동자 운동의 유기적 일부가 되기를 회피한 것이다. 권영길·천영세 전 민주노동당 대표들도 최근 똑같은 문제를 지적했다.
노동운동의 유기적 일부
정의당 정치인들은 공식 정치에서의 세력 열세를 기층의 투쟁과 결합해 메우려 하지 않고, 민주당과의 선거제 개혁 거래로 해결하려고 하다가 큰 낭패를 봤다.
문재인 정부하에서 노조 지도부들은 경제투쟁들을 만만찮게 연결시켜 대정부 투쟁화하기를 꺼리고 이음매 없는 개별 투쟁으로 머물게 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정의당의 (민주당과의 개혁 공조 노선만이 아니라) 정·경 분업 실천도 이런 경향에 일조했다.
계급투쟁이 정치화되지 못하면, 노동계급 대중의 정치의식도 일반적으로 고양되기가 어렵다. 재작년과 올해 선거들에서 좌파 전체의 존재감이 약했던 주원인이다.
그런데 〈레디앙〉 보도를 보면, 정의당 투표층은 “‘현재 정의당이 집중하는 이념이 무엇이라고 보는지’ 묻는 질문에 ‘페미니즘’(23.9퍼센트) 답변이 가장 많았고, 동시에 가장 불필요한 이념으로도 페미니즘(30.6%)을 꼽았다.” 페미니즘이 과대 대표돼 정의당(정체성)에 해를 끼쳤다는 인식이 적지 않다.
정의당이 (권영길·천영세 두 전 의원의 고언대로) “적극적으로 노동을 중심 사업으로 삼고” 여기에 여성 차별 문제들을 결합시켰다면 적어도 “노동이냐, 젠더냐” 하는 부적절한 대립과 혼란은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의당은 남녀 노동계급의 단결된 투쟁을 호소하지도 않았고, 여성 노동계급의 중요 현안인 저임금 해결, 정규직화, 고용 안정, 임신중지권 등을 위한 투쟁에는 커다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불편한 용기, 비웨이브 같은 전투적인 노동계급 여성 청년들의 운동과도 거리를 둔 정의당 페미니즘은 그러나 (권·천 두 의원의 지적처럼) 미투 지지를 배타적으로 강조했다. 류호정·장혜영 의원이 진실을 따져 보지도 않고 박원순 조문 행위 일체를 2차가해라고 주장한 것은 우파에게 이용만 됐다.
정의당이 노동자 투쟁의 유기적 일부가 돼 노동계급과 더 밀착했다면, 문재인 정부에 대한 광범한 대중의 실망과 환멸과 분노를 더 빨리 감지하고, 노선의 좌선회 압력도 진작 받았을 것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연립정부 노선의 중단만으로는 크게 부족하다. 새로 강조한 사회민주주의적인 노동정치도 정경 분업 실천과 사회연대전략 때문에 약점이 분명하다. 사실 연금 개악, 금리·전기요금 인상 같은 중요한 쟁점들에서 정의당은 아직도 확고하게 노동계급의 편을 들지 않고 있다.
노동자 투쟁과 결합해야 하고, 특히 우파 정부의 각종 개악이 예고되는 상황에서 그에 맞서는 아래로부터의 대중 투쟁이 강조돼야 한다. 반면, 별것 아닌 문제를 놓고도 주류 양당 간 갈등이 극심한 상황에서 ‘의회 협치’를 중재하려는 방식은 진보적일 게 없다.